상처는 너만 받는 게 아냐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더블린 외곽에 중년의 한 남자가 살고 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하고 홀로 살아간다. 그의 고상한 취미는 책 읽기와 음악당 가기. 한 여자를 알게 되어 가까워지지만, 관계는 일방적이다. 남자는 말하고 여자는 듣고. 세상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그에게 그녀는 글을 써 보라고 격려하고 위로한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자, 그는 이별을 통보한다. 4년 후, 남자는 여자의 부고소식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지만, 그녀를 서서히 기억에서 지우고 자신에게 퇴각한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1914)의 ‘가슴 아픈 사건’에 나오는 더피와 시니코 부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왜 자신을 사랑한 그녀의 아픔을 볼 수 없었을까. 그는 왜 폭력적으로 이별해야 했을까. 그는 왜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슬프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나는 그가 자신의 상처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문학을 전공하고 석사논문까지 쓰게 된 이 단편소설은 상처받은 자의 이기심과 폭력을 잘 보여준다.

더피의 상처는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제국주의의 지배 구조가 내재화되어 폭력과 배신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고립을 선택한다. 나르시시즘과 우월감으로 무장한 그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관계에서 폭력적이다. 시니코 부인에게 일방적으로 본인의 현학적인 생각을 늘어놓을 뿐, 소통하지 않는다. 헤어질 때도 자신의 감정만 있을 뿐, 상대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다. 만남에서 이별까지,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그는 그녀의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을지를.

반면 시니코 부인은 ‘따뜻한 토양이 외국 식물을’ 감싸듯, 그의 상처에 아파하고 상처를 보듬는다. 그런데 왜 그녀는 그의 아픔, 결핍, 욕망을 알아보고 기꺼이 자신을 내주려 했을까. 과거의 나는 시니코 부인이 되어 더피의 아픔을 보고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이기심과 폭력이, 그녀의 외로움과 슬픔이 보인다.

우리 사회에는 더피처럼 자신에게 갇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위에서 깨지고 직장 후배에게 갑질하는 권위적인 상사가 있는가 하면,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집에 와서 처자식에게 화풀이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 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연인에게 요구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자 여자를 비하하며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려는 가부장적인 남자가 있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냉담하며 자신의 입장 ‘밖’을 상상할 수 없다. 본인이 고통을 주는 가해자인데도, 자기 상처만 아픈 사람들. 어느 새 상처는 폭력의 핑계가 되고 무기가 된다.

피해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고통을 준 사람이 아니라, 엉뚱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핵심은 강자에게 당한 것을 여성과 아이 같은 힘없는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해서 보상을 받으려 한다는 것.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없다. 예전에 방송에서 이스라엘 남자의 넋두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할머니가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되었다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피해자도 아니면서 피해자인 척하는 그들의 연기가 참 당혹스럽기만 하다. 결국 더피처럼 자기 안에 갇힌 에고는 타인과의 관계를 망친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와 같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삶의 향연’에서 추방당한다.

물론 상처받은 자들의 고통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든 상처는 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폭력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자신의 아픔을 무기로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정말 말해 주고 싶었다. 상처는 너만 받는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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