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그쪽이야말로” 화법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퇴임 후에도 단 하루도 뉴스를 장식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지난 8일 미 연방수사국(FBI)의 자택 압수수색 이후 더욱 등장 빈도가 높아졌다. 임기 내내 이어진 그의 전형적인 화법을 일컫는 ‘왓어바우티즘(Whataboutism)’도 다시 회자되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비난이나 어려운 질문에 대해 맞비난하거나 다른 이슈를 제기하는 응답의 기술이나 관행’이라고 이 단어를 정의한다. 상대가 잘못을 지적하면 “너는 어떻고”라고 받아치는 일종의 수사적 도구다.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이번에도 트럼프는 예의 그 레토릭을 답습하고 있다. 비밀문건 유출 의혹으로 간첩 혐의까지 받고 있는 트럼프가 FBI의 압수수색에 내놓은 첫 반응은 ‘오바마도 그랬다’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규정을 위반해 퇴임 후 비밀문건을 포함한 3000만쪽의 문건을 시카고로 가져갔다고 주장한 것이다. 트럼프의 주장은 몇 시간 만에 거짓말로 탄로났다. NARA는 이례적으로 반박 성명을 내고 오바마 시기 비밀문건은 모두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 이관했다고 밝혔다.

미 언론들에 팩트체크라는 일거리를 던져준 트럼프의 상습적 거짓말만큼이나 트럼프의 “그쪽이야말로” 어록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한 방송 진행자가 “푸틴은 살인자”라고 하자 “살인자는 미국에도 있다. 미국은 결백한 줄 아는가”라고 되묻는 그의 모습은 많은 미국인들을 아연하게 했다. 2017년 초 러시아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그는 “힐러리 클린턴의 e메일 스캔들이 더 심각하다”고 역공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예나 지금이나 정적 탓을 하고, 이로 인해 지지자들의 후원까지 쇄도하는 상황은 우려와 동시에 피로감을 자아낸다. 지난 몇 년간 미국과 세계 민주주의 퇴보의 신호탄이 된 ‘트럼프 현상’의 생명력이 지독할 정도로 끈질기구나 싶다. 물론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행동 양식이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왓어바우티즘이란 표현도 냉전 시기 소련이 서방의 비판에 ‘너희는 어떻고?’라고 응수한 데서 유래했다.

어쩌면 왓어바우티즘이란 유령은 2022년 8월의 워싱턴뿐 아니라 여의도와 용산도 배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 편중 인사, 장관 후보자 부실 인사 논란에 번번이 전 정부 인사 실패를 거론했다. 국정 청사진 제시를 기대했던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탈원전, 소득주도성장 등) 전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폐기했다”는 일성만 울렸다. 조국 사태와 지자체장 성폭력 사태를 거치며 ‘내로남불’과 동의어가 되고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또 어떤가.

“그쪽이야말로”는 논점 일탈 오류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된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의 습관적인 남 탓, 성찰 부족은 논리적 허점을 넘어 과연 이들이 막중한 자리에 어울리는 자질을 갖췄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아무리 작은 조직의 리더라도 매번 전임자나 옆 부서에 책임을 전가하다가는 이런 수군거림을 당하기 십상이다. 무능하거나, 의욕이 없거나, 혹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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