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소스페소

박종성 논설위원

여름이 지나고 있다. 코로나19로 닫혔던 하늘길이 열리면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늘었다.

유럽에서 다른 나라로 장기간 여행을 떠나는 붐이 일었던 때가 있다. 17~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귀족 자제들의 유럽 탐방이다. 요즘 말하는 수학여행의 원형일 수 있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배웠다. 이를 그랜드 투어라고 한다. 목적지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였다. 유럽문명의 발상지를 직접 보고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박종성 논설위원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그랜드 투어에 합류했다. 그는 여행 목적을 “육체적·도덕적 폐해를 치유하고 참된 예술에 대한 뜨거운 갈증을 진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을 떠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누볐다. 이동수단은 마차였고 먼 거리를 떠나는 만큼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2년 가까이 걸렸다. 그는 이탈리아 명소를 방문하며 느낀 소감과 사람들과 교유하며 나눈 대화, 고국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일기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이탈리아 기행>이다.

괴테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폼페이, 시칠리아, 나폴리 등지를 방문했다. 나폴리. 그는 남부 항구도시 나폴리에 머물며 ‘로마에 관한 것은 다시 생각해볼 기분이 안 드는 곳’이라고 썼다. “이곳의 광대한 주변에 비하면 티베르강 저지대에 있는 세계의 수도(로마)는 벽지의 낡은 사원처럼 느껴진다.” 나폴리 찬가가 아닐 수 없다.

나의 기억 속에서 ‘나폴리’ 하면 ‘세계 3대 미항’이 먼저 떠오른다. 주입식 교육의 소산인지 모르겠다. 3대 미항에는 시드니, 리우데자네이루도 있지만 나폴리 이외의 항구가 생각난 적은 거의 없다. 사실 ‘한국의 나폴리’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항구도시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시드니’ ‘한국의 리우데자네이루’라고 부르는 곳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폴리는 상상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그려졌는지 모른다. 실제 나폴리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쇠락한 도시, 낙후된 뒷골목, 청결하지 못한 부둣가 등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나폴리는 피자와 디에고 마라도나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하는 경우라면 나폴리 피자를 떠올릴 것이다. 피자의 발상지이자 원조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축구 천재 마라도나는 7시즌 동안 SSC 나폴리에서 활약했고 만년 하위 팀에 이탈리아 리그(세리에 A) 두 번의 우승컵을 안겼다. 이탈리아 남부의 촌동네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인 기대에 부응했고 세상을 떠나며 전설이 되었다.

나폴리에는 소중한 커피 문화가 있다. 나폴리에서는 공짜로 커피를 주는 카페가 있다. 거리의 노숙인이나 부랑인들은 새벽에 커피 한 잔을 공짜로 마실 수 있다. 공짜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 입구에는 ‘카페 소스페소(Cafe Sospeso)’라고 쓰여 있다. 직역하면 ‘유예된 커피’, 설명을 붙이면 ‘모든 이들을 위한 커피’다.

고작 커피 한 잔이라고 할 줄 모른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커피 전통과 그들의 커피 사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탈리아는 유럽 최초(1720년)로 카페가 탄생한 곳이다. 베네치아 산마르코광장에 지금도 성업 중인 플로리안이라는 카페다. 호색한 자코모 카사노바의 활동무대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는 교도소에서도 커피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교도소에는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모카포트가 있다. 일반 범죄자들과 격리되어야 하는 흉악범들이 갇히는 독방에서 가장 큰 형벌은 모카포트를 뺏는 것이라고 할 정도다. 이탈리아에서 커피는 최소한의 인권인 것이다.

카페 소스페소는 누가 제공하는가. 카페 주인이 노숙인들을 위해 자선을 베푼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고객들이다. 커피를 주문하는 고객이 한 잔을 주문하면서 두 잔 값을 낸다. 작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누가 마실지 모른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누가 제공하는지 모른다. 바리스타가 기록해 두었다가 부랑인이나 노숙인이 오면 기부한 만큼 커피를 내주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카페 소스페소>에서는 이를 ‘공동체의 연대’라고 말했다.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 나폴리에서는 커피가 기호품을 넘어 공동체의식을 다지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올여름은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어려운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보았다. 비가 그치자 관심도 사라지고 있다. 함께 사는 공동체를 위한 연대와 협력은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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