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이 그려낸 우리 사회의 자화상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오발탄이 그려낸 우리 사회의 자화상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 멧돼지가 내려온다. 파랗게 익어가던 채소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불청객이 사라지자, 마을 남자들이 총을 챙겨 사냥에 나선다. 얼마 전 로또 당첨으로 돈벼락을 맞아 기세가 등등해진 영수(박호산)가 선봉에 섰다. 남자들이 몰아준 방향으로 멧돼지를 쫓아가던 영수는 눈앞의 수풀이 흔들리자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총알이 날아간 방향에서 들려온 것은, 짐승의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신음이었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지난달 MBC가 방영한 4부작 드라마 <멧돼지 사냥·사진>은 한 남자의 오발 사고가 불러온 시골 마을의 비극을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다. 지난해 MBC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서 PD상을 수상한 작품은 짧은 분량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 추석 특집 TV 무비로도 편성됐다. K드라마의 화려한 열풍 속에서 소위 ‘한류 스타’ 한 명 없이, 오로지 작품성만으로 승부한 드문 수작 스릴러로 놓치면 아쉬울 작품이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지독하게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를 배경 삼은 이야기는 스릴러 장르 안에서 하나의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영화 <이끼>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SBS) 등의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멧돼지 사냥>도 역시 ‘시골 스릴러’를 표방한다. 하지만 기존의 시골 스릴러가 흔히 평온한 전원 이면의 사악한 비밀을 밝히는 이야기 전개를 따라간다면, 이 작품은 마을 사람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의 균열로부터 파국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차별점을 획득한다.

<멧돼지 사냥>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주민 중 하나였던 영수가 로또 일등에 당첨되는 꿈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평소 마을의 도움을 받아온 영수는 고마운 마음에 잔치를 벌이고, 이웃들은 진심으로 그의 행운을 축하해준다. 화목하던 마을에 파국의 그늘이 깃들게 된 것은 문제의 그 멧돼지 사냥 이후였다. 숲에서 총을 잘못 쏘고 공포에 질려 도망쳤던 영수는 그날 밤 아들 인성(이효제)과 반 친구 현민(이민재)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극도의 불안감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오발 사고의 목격자로부터 로또 당첨금 일부를 요구하는 협박 전화까지 걸려 온다.

영수는 대체 누구를 쏜 걸까. 협박범은 또 누구일까. 총알의 방향이 가리키던 의문은 이내 꼬리를 물고 다른 물음을 낳고, 평소 가족 같았던 이웃들이 하나둘 의심의 대상이 된다. <멧돼지 사냥>은 이 주요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특정 공동체 내부의 사악한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 속으로 들어간다.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행운에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질투나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입체적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관계는 그러한 인간의 숱한 얼굴들로 이뤄져 있다. <멧돼지 사냥>은 영수의 오발 사건으로 그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시기심, 이기심, 의심, 욕심 등의 특정한 심리적 요소들이 하나로 뭉쳐져 점차 거대한 악의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멧돼지 사냥>은 기획의도에서 이 작품을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이들이 아닌, 언제든지 괴물이 되어버릴 수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더욱 서늘할 자화상”으로 그리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절대적인 악인이나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평범한 인간들은 예기치 못했던 삶의 기로에서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악의 공모자가 되어버린다.

그런 면에서 ‘잘못된 총알’이라는 1화 에피소드의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총알 자체는 문제가 없다. 영수의 오발은 말 그대로 사고였다. 그의 잘못은 겁에 질린 나머지 사람이 죽었을지 모르는 상황을 외면하고 도망친 데서 시작한다. 피해자 시신의 목격자도 같은 전철을 밟는다. 어려움에 시달리던 그는 이 비극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로 삼는다. 과녁을 벗어난 총알은 이렇듯 불완전한 인간들의 이기심에 더 큰불을 지른다.

절대적인 악인의 악행보다 보통 사람들의 사소한 악의가 모였을 때 더 잔혹한 거악이 된다는 메시지는 전 지구적 윤리의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이 시대를 향한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울린 오발탄 한 발이 우리 사회의 위기의식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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