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To Buy), 죽느냐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추석은 잔소리의 시간이다. 2030만 듣는 게 아니다. 낼모레 쉰도 듣는다. 결혼 후 16년 동안 두 번쯤 뵌 먼 친척 형님이 물었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집은 좀 올랐고?”

건물은 콩나물처럼 자라지 않는다 답하려다, “집이 없습니다. 세들어 삽니다”라고 말했다. 애써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집을 안 사고 여태 뭐했어.”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뒤에 붙었나 어땠나. 여러 가지 대답을 궁리하다 “같은 집에 세 올려가며 오래 살았더니 때를 놓쳤습니다”라고 말했다. 괜히 뒤통수를 긁었다. 지금 사는 집에서만 만으로 11년. 임대차보호법에 따라 2년 연장 계약을 해서 13년을 산다.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주위에선 “우와” 또는 “이야”라는 반응이 나왔다. 운이 따랐다고 생각하지만, ‘벼락거지’라는 단어가 가끔씩 어른거리는 것도 사실이다.

어릴 적 읽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실존 양식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소유 대신 존재적 실존 양식을 지향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지금은? 소유하지 않으면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1기 신도시 재건축을 두고 시끌시끌했다. 아무리 따져봐도 재건축에 대한 요구는 “내 집 새로 지어주고 집값 더 올려줘. 공짜로”라는 식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집을 소유한 이들의 주장이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진다. 그곳에 사는 임차인은 재건축이 결정되면 쫓겨나야 한다. ‘권리’가 없으니까.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한국인의 능력주의>에서 ‘소비자 정체성’은 동시대적이며 전 사회적이라고 했다. “한국은 부동산이라는 불로소득으로 터무니없는 부를 쌓아올리는 게 오랫동안 용인되어 온 사회”이고, “배려나 관용 같은 단어는 왜 우리만 호갱님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 냉철하고 절박한 소비자에게 위선으로 들리기 쉽다”고 설명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언어소통, 지식, 의견 등도 사회적 공유가치가 아니라 ‘시장의 소비재’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심심한 사과’는 불친절한 서비스이고 표절 논란 박사 학위, 대입을 위한 ‘스펙’ 역시 구매 가능한 재화로 치환된다. ‘구매력’ 여부가 ‘사회적 권력’이 되는 사회이고 공정의 기반이 되는 사회다. 억울하다고? 너도 사지 그랬어. 안희곤은 “중산층 소비자 민주주의가 아마도 우리 공화국의 정체”라고 적었다.

박권일은 데카르트의 말을 비틀어 “나는 구매했다. 고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더 심각해 보인다. 햄릿의 대사가 딱이다.

“사느냐, 죽느냐.” To Buy, or Not to Be.

그러니까 ‘영끌’은 세상 잘 모르는 이들의 무모한 투자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사지 않으면 죽는 사회. 종종 벌어지는 ‘오픈런’은 생존을 위한 ‘오징어 게임’의 모의고사처럼 보인다.

인플레이션이 계속된다. 살 수 있는 것들이 줄고 있다. 어머니는 추석 차례상에서 한 단에 8000원이 넘는 시금치를 뺐다. “조상님께 미안하다”고 하셨다. 중산층 소비자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구매력 하락은 존재 자체의 위기를 가져온다. 서울시장은 ‘반지하 방’을 없애겠다고 했다. 살 수 있는 것(곳)이 사라진다.

연휴 기간 김훈의 <하얼빈>을 구매했다. 채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가슴이 서늘했다. 일본 천황 메이지는 순종의 아들 이은에게 말했다.

“공부할 때, 시계를 책상 앞에 놓아라. 짐이 내리는 시간이다.”

110년 전, 제국주의 시대였다. 시간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넘어오던 시기다. 시간을 내리는 건, 제국주의 왕의 역할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시대가 바뀌었다 할 수 있을까. 중산층 소비자 민주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까. 시간 대신 소비를 통해 권리를 허락받아야 하는 이 서늘한 세상은 진짜 나아진 걸까.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끝은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겨눴다. 심문 때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답했다.

안중근의 ‘총탄’은 진력을 다했으나 역사는 바로 바뀌지 않았다. To Buy, or Not to Be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중력 탈출 속도 초속 11.2㎞보다 더 빠른 총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추석이 끝났다. 14일 발표된 미국 8월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는 7월보다 다시 높아졌다. 가슴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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