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 미국은 겁내고 국민은 겁주나

김민아 논설실장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순방에서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의 출근 일성은 뜻밖이었다. 윤 대통령은 26일 ‘비속어 논란’과 관련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했다. “전 세계의 두세 개 초강대국을 제외하고는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자국 능력만으로 지킬 수 있는 국가는 없다”면서 한 말이다. “진상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도 했다.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윤 대통령 말을 종합하면 비속어 논란은 사실과 다르고, 한·미 동맹을 훼손하며, 관련 보도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것이다.

김민아 논설실장

김민아 논설실장

잘 모르는 독자도 계실 수 있으니 전말을 요약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글로벌펀드 재정공약 회의장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48초간 환담했다. 이후 회의장에서 나오던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말하는 듯한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 XX’는 미 의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대통령실은 영상 공개 후 13시간이 지나 해명을 내놓았다. ‘이 XX’는 한국 국회를 지칭한 것이며,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했다는 취지였다. 논란은 더 커졌다. 한국 국회의원은 폄훼해도 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소셜미디어에선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벚꽃 엔딩’의 가사 ‘봄바람 휘날리며’가 ‘봄바람 휘바이든’으로, 영화 제목 ‘태극기 휘날리며’가 ‘태극기 휘바이든’으로 패러디됐다.

모두가 대통령의 첫 출근길을 주목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당시 발언 취지를 설명하거나, 껄끄러우면 직답을 피하리라 생각했다. 틀렸다. 대통령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답을 피하지 않았다.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며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상은 발언 당사자가 가장 잘 알 텐데, 스스로 밝히는 대신 타깃을 언론으로 돌렸다. 국민의힘도 발 맞춰 영상을 처음 공개한 MBC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항의 방문과 경위 해명 요구 등 여러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김행 비대위원은 “수사의뢰”를 거론했다. 이종배 서울시의원은 MBC 사장과 편집자·담당 기자를 경찰에 고발했다. 전날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이 “가짜뉴스”를 언급한 게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팩트체크를 해보자. ① 윤 대통령은 비속어를 ‘발화’했다. 이 부분은 김은혜 홍보수석도 인정했다. ② ‘이 XX’는 미 의회 의원 또는 (적어도) 한국 국회의원을 지칭한다. 앞에 ‘국회에서’란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③ 윤 대통령이 발언한 곳은 각국 정상이 모인 국제회의장 안이었고, 바로 옆에 사적 지인이 아니라 고위공직자들이 있었다. 백보 양보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 했다고 치자. ①②③만으로도 대통령은 사과해야 마땅하다. 바이든 대통령이 화내는 건 겁나지만, 한국 국회와 국민은 분노하든 말든 상관없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도 잘못 끼우기 마련이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솔직하게 시인하고 논란을 매듭지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①②③이 부적절했다는 점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사적 발언’ ‘혼잣말’로 덮으려다 사태를 키웠다. 스스로 퇴로를 끊은 셈이다.

이제 어찌할 텐가. 이명박 정권이 <PD수첩>과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수사했듯 MBC를 수사하고 ‘휘바이든’ 패러디를 퍼뜨린 소셜미디어 이용자를 잡아들일 건가. 윤 대통령이 몰입해온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통치 방식대로라면 이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시민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핵심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를 기대할지 모른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야기했다. “만약 (사랑과 두려움)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여될 수밖에 없다면, (군주는) 사랑을 받기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도 했다. “증오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받는 것을 피하고, 인민이 그에게 만족하도록 한다면, 그 군주는 스스로를 충분히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정치철학자이자 마키아벨리 연구자인 곽준혁은 저서 <지배와 비지배>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음모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면, 다수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인민을 적대시하면 군주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고까지 단언한다.”

국민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지도자는 없다. 500년 전에도,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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