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성과 국제성

백학순 김대중학술원장

강대국에서 태어나면 당장 유복하고 누릴 것이 많겠지만, 그렇다고 약소국에서 태어난 이들이 받는 복이 더 적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기에 따라서는 특별한 복을 받는다. 약소국 사람들과 지도자들은 강대국 세상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궁리하고 노력함으로써 국제정치의 본령을 더 잘 알게 되고 외부세계의 충격에 대처하면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략적 능력을 더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백학순 김대중학술원장

백학순 김대중학술원장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강대국 질서이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약소국의 생존전략의 기본 가치는 ‘자주성’이다. 내 땅과 나라, 역사에 대한 확고한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과 후손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미래 비전과 목표를 명확히 하면서, 현재를 ‘미래를 품은’ 역동적인 현재로 재구성하여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면서 미래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자주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자주성만 갖고는 부족하다.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따른 상생과 평화의 실천이 필요하다.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동시에 연결돼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선택지는 협력, 경쟁, 대결이지만, 우리와 지구 전체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서는 대결보다는 협력, 전쟁보다는 평화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 많은 분야에서 세계 7~10위의 강국이지만, 여전히 분단국이며 전통적 의미의 강대국은 아니다. 이는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과 강대국들을 잘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강대국 정치의 충격으로 빈번히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민족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꾼다면,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 놓인 지정학적, 지경학적 위치 덕분에 오히려 자주성을 중시하면서 전략적 사고 능력을 가진 시민으로 성장하고, 지도자들은 국제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 문제해결 능력을 가진 전략가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주어져 있다.

해방 이후 국제정치를 잘 알고 위기에 맞아 뛰어난 대처를 했던 대통령은 이승만·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의 정전 과정에서 국제정치와 미국정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무릅쓰고 끈질긴 벼랑 끝 협상을 통해 대한민국을 구했다. 비록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지는 못했지만, 정전협정의 묵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공·해군의 강화를 포함한 한국군 전력을 20개 사단으로 강화, 10억달러의 경제협력을 받아냈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소련 붕괴 후 새로운 국제질서가 들어서기 전의 과도기에 우리가 한반도 운명의 주인이 되어 북한과 화해하고 미국, 중국과 협력하여 한반도 국제정치를 민족화해,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평화통일의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김 대통령은 자주성과 국제성을 결합한 바탕 위에서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을 만들어 냄으로써 ‘한국 민족이 최초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했다’는 해외 평가를 받았다.

위의 두 대통령의 업적에서 보듯이, 우리 외교의 성패는 현실적으로 북한과 미국에 대한 정책과 외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요새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윤석열 정부를 보면, 우리가 자주성을 갖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주도적으로 북미양국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대응 위주의 피동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핵전쟁 위협의 상존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 없이, 핵전쟁 위협을 높이는 ‘확장억제’ 중심의 한·미연합훈련 강화뿐이고, 미국에 대해서는 나토정상회의에까지 참석하여 공개적으로 중국을 적대국으로 천명하는 등 미국의 세계전략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미 동맹 강화뿐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일련의 외교적 실수와 실패, 비속어 사용 등으로 구설에 올라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는 외교를 잘해야 먹고사는 나라’임을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정상회담 때마다 다음 몇 가지 원칙을 지켰다. 첫째,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진정성을 갖고 진실하게 대한다. 둘째, 상대방에게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말은 결코 빠뜨리지 않고 적절한 시점에서 반드시 말한다. 셋째,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와 의견이 같으면, 반드시 ‘내 의견과 같다’고 말해준다. 넷째, 회담이 성공하면, 그 공을 상대방의 덕으로 돌리고, 혹시라도 회담이 실패한 경우에도 결코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는다. 품격 있는 지도자의 전범(典範) 김대중 대통령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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