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밥 먹여 주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밥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권위주의 시절 ‘법학’이 ‘밥학’이라고 불린 적이 있다. 법이 그 이념인 정의는커녕 정치권력과 사회경제적 기득권의 지배도구로 전락한 것을 비아냥된 것이다. 목숨이나 부지하고 알량한 생계를 위해 정작 법의 존재이유를 외면한 법률가의 현실을 풍자한 것이었다. 권위주의는 충분히 청산했다고 믿었던 대한국민들이 무도하게 법을 권력의 도구로 남용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길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가가 ‘밥벌레’로 불리는 일이 되풀이되지는 말아야 하기에.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편 밥은 생존과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의 핵심 수단을 상징하기도 한다. 고상한 이상을 내세워 탁상공론이나 일삼지 말고 현실에 기대어 민생이나 챙기라는 은유로 “밥 먹여 주나?”라는 직설적 표현이 사용된다. 국가와 사회의 기본법인 헌법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존엄을 향유하기 위한 가치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직접 손에 쥐여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밥 먹여 주나?”라는 힐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헌법이 힐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작 헌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세력의 음모론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헌법에는 개인이 가지는 침해될 수 없는 기본적 인권이 국가의 존재이유임이 선언되어 있다. 법 앞의 평등,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재산권은 물론이고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 근로의 권리,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 등 인간의 존엄을 구현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이와 같은 추상적인 자유와 권리가 공염불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예시했던 다양한 헌법상의 자유와 권리는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법률체계의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시민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헌법이 밥 먹여 주나?”라는 힐난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기본적 인권이나 원리를 내세워 밥으로 상징되는 민생이나 경제관계가 일반 시민이 인간의 존엄을 향유하면서 일상을 꾸릴 수 있는 중요한 보루가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따른 시장경제질서를 추구하는 경제질서의 핵심을 이루는 재산권의 경우를 보자. 헌법은 원칙적으로 아무 부대조건 없이 자연적 권리로 누리는 다른 자유권과는 달리 재산권의 경우 자연적 권리가 아니라 그 내용과 한계를 법률로 정하는 조건부 권리임을 명문으로 선언하고 있다(제23조 제1항). 나아가 이런 조건부 권리마저도 그 행사에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행사하여야 하는 헌법적 의무가 부과된다. 한편 공공필요가 있다면 재산권을 박탈하는 수용도 법률에 근거하여 정당한 보상만 한다면 허용된다.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한 토지거래허가제나 주택임대차보호제를 비롯한 토지공개념에 입각한 법제나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인간의 존엄을 기준으로 설정하는 법제, 사립학교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제,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을 규제하는 법제, 국가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집중을 규제하는 법제, 수익 대비 조세부담을 증가시키는 누진세제 등이 모두 이러한 재산권의 조건부적 성격과 공공복리 적합의무에 따라 헌법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흔히들 재산권을 규제하는 법률을 두고 자본주의의 원론을 내세우면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는 색깔론을 덧씌워 헌법 위반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헌법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억지주장에 불과할 때가 많다.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의 소위를 겨우 통과한 ‘노란봉투법’도 헌법상의 기본권을 통해 근로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한 정당성을 가진다. 하청근로자의 원청사용자에 대한 근로관계의 인정이나 헌법이 보장하는 쟁의권의 범위를 극도로 축소시키면서 그 부산물인 손해배상가압류를 오·남용하는 것은 공공복리와 헌법의 기본가치를 존중하는 범위에서 정당하게 보장될 수 있는 재산권을 비롯한 경제적 자유의 헌법적 위상에 비추어 적절히 법률적 조정을 받아야 한다.

헌법은 사용자와 같은 재산권이나 경제적 자유를 향유할 국민들과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근로관계를 실현한 근로자 사이의 법률관계를 공정하게 조정하는 중요한 지침과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이럴진대 “헌법이 밥 먹여 주나?”라고 쉽게 힐난할 수 있을까? 법률가가 밥벌레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헌법도 그 진가를 제대로 알 때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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