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 열려 있는 팬덤은 가능한가

[강준만의 화이부동] 대화에 열려 있는 팬덤은 가능한가

한국은 정당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다. 양적 규모로만 보면 그렇다. 202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각 정당이 보고한 ‘2021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485만여명, 국민의힘 407만여명, 정의당 5만여명 등 전체 당원 수는 1042만여명에 달했다. 대중 정당의 역사가 100년이 훨씬 넘는 영국·독일 등은 당원이 100만명이 안 되고 감소 추세인데 한국은 1000만 당원으로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당원인 나라가 되었으니, 이 어찌 놀랄 일이 아니랴.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최근 국회미래연구원이 공개한 <만들어진 당원: 우리는 어떻게 1천만 당원을 가진 나라가 되었나>란 제목의 보고서는 1000만 당원의 비밀을 “80%에 달하는 자신이 당원인지조차 모르는 ‘유령 당원’” “각종 공직 후보자들에 의해 ‘매집된 당원’” “대통령 후보자 등 특정 팬덤 리더를 위해 당을 ‘지배하려는 당원’” 등 3가지 유형으로 분석했다.

이 세 번째 유형의 당원이 가장 중요하다. 보고서를 공동 작성한 거버넌스그룹 연구위원 박상훈은 “여야가 참여를 명분으로 온라인 투표 등 개방형 경선을 도입한 뒤 10만~20만명 상당의 팬덤 당원만 있으면 당권은 물론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게 됐다”며 “포퓰리스트만 승자가 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윤왕희는 “기성 정당이 중앙당만 있고 당원 기반은 취약해 외부 팬덤 세력의 포획(hijacking)이 쉬웠다”며 “지역 풀뿌리 정당이 생겨나도록 정당법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자 정효식이 중앙일보 2023년 5월2일자에 쓴 1면 머리기사의 핵심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을 잘 포착한 기사다. 어떤 위기인가? ‘1% 법칙’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법칙’은 처음엔 웹사이트의 콘텐츠 창출자는 전체 이용자의 1%라는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이젠 어느 분야에서건 꼭 1%가 아니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전체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걸 가리켜 ‘1% 법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는 그런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드려야 할 일도 많지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비판하거나 사정해야 할 일도 있다. ‘팬덤 정치’가 바로 후자의 경우로 지목되어 뜨거운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0만~20만명 상당의 팬덤 당원은 전체 인구의 0.2~0.4%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현재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실세로 군림하고 있다. 이 당원들에겐 일단 감사드리는 게 옳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대중의 능동적인 참여에 있건만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투표를 제외하곤 참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팬덤 당원이 정당 민주주의 실세

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시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참여는 아름답거니와 신성하다는 교육을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받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팬덤으로 불릴 정도로 열성적인 당원의 자긍심은 매우 강하다. 참여를 하지 않는 시민과 비교해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 나머지 독선과 오만으로 치닫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부 강성 당원들은 자신들이 반대하는 의원들을 모욕하고 공식 행사 참석을 물리적으로 저지하고 대화조차 거부하는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강성 당원들이 추앙하는 의원들이 그걸 즐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극 개입해 그런 폭력성을 없애려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넘어가는 정당의 전반적인 행태가 기가 막히다.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가 이 지경이 됐을까?

정치인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팬덤 옹호론을 펴고 있는 민주당 의원 정청래의 이론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그는 이미 7년 전 <정청래의 국회의원 사용법>(2016)에서 “국회의원을 움직이는 최고 단위 정치 행위는 팬클럽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2022년 6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팬덤 정치’와의 결별을 주장하는 당내 의원들을 향해 “팬덤은 무죄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정치인이 문제”라며 “팬덤을 욕할 시간에 왜 나는 팬덤이 형성되지 않는가 성찰해 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의원들도 이재명을 응원하는 팬덤이 부러우면 이재명처럼 실력을 연마하고 지지받을 생각을 해야 한다”며 “괜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이재명을 응원하는 국민과 당원을 향해 눈 흘기지 마시라”고 했다.

이런 식의 논법은 곤란하다.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일지라도 이성적인 비판을 시기·질투의 산물로 몰아가는 건 과거 보수가 진보를 비판하던 전형적인 수법이 아닌가. 그가 강조하는 ‘실력’의 정체도 궁금하다. 민주당 의원들 중 “누가 더 많은 팬을 갖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톱10’을 뽑아보자. 그건 순전히 실력 순인가? 실력이라면, 어떤 실력인가? 팬들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증오·혐오의 선동과는 전혀 무관한 실력인가?

정치인 팬덤 원동력은 증오·혐오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정청래가 문재인 청와대의 행정관 출신인 섀도우캐비닛 대표 김경미처럼 생산적인 화두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렵다. 김경미는 “비명계에 던지는 차가운 질문들”이라는 제목의 한국일보(2023년 5월31일자) 칼럼에서 “비명계의 비판이 타당한 면이 많음에도, 비명계가 개딸 탓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라면서 몇 개의 질문을 던진 후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친명계가 개딸들의 열정 뒤에 숨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내는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면, 비명계 역시 개딸들의 다소 과격한 활동 뒤에 숨어 자신들의 비전에 동의하고 이를 함께 실현해나갈 것을 결의하는 시민들을 조직해내는 조직가로서의 역할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친명계가 개딸로 대표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열정을 남용 혹은 오용하고 있다면, 비명계는 시민들의 정치적 열정을 조직화해내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맞다. 분명히 그런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적 열정의 조직화’에 포퓰리즘이나 포퓰리즘에 가까운 정치적 담론이 미치는 영향이다.

포퓰리즘에 취약한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의 시대에 포퓰리즘을 거부하는 사람이나 세력이 포퓰리즘에 친화적인 사람이나 세력과 공정하게 경쟁하는 게 가능할까? 상대편에 대한 증오·혐오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

우리는 정치인 팬덤을 연예인 팬덤과 비슷한 팬덤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둘은 속성이 다르다. 연예인 팬덤이 특정 연예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정치인 팬덤도 특정 정치인을 사랑한다. 그러나 둘은 사랑의 목적과 수단에 있어서 다르다. 연예인 팬덤은 연예인을 사랑하며 그게 바로 팬덤의 목적이자 수단이지만, 정치인 팬덤에게 정치인에 대한 사랑은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다. 정치인 팬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증오·혐오이며, 그 실현을 위한 매개체로서 정치인을 사랑할 뿐이다.

당신은 특정 정치인의 팬이거나 팬에 가까운 지지자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자답해 보시라. 당신이 지지의 이유로 내세운 가치의 실현은 증오·혐오와 무관한가? 그럴 수는 없다.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를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내야만 한다. 그런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동력이 바로 증오·혐오다. 당신은 스스로 선하고 정의롭다고 확신하지만, 당신들의 선과 정의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선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언행을 보인다.

그런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는 증오·혐오의 선동과는 거리를 둔 ‘정치적 열정의 조직화’도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런 점에서 김경미의 주장을 지지한다. 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는 <우리는 증오를 팝니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정치란 타협을 수반할 수 있거나 수반해야 하는 행위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를 키웠다”며 “우리는 독자와 시청자 대신 팬을 길들이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증오·혐오의 감정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마저 거부하면서 드러내는 폭력성은 곤란하다. 대화와 타협에 열려 있는 팬덤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반드시 풀어야 할 우리 모두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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