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칼럼

위험사회와 망각의 정치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위험사회.’ 세계적 석학 울리히 벡이 현대사회를 규정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21세기의 위험은 자연재해 같은 불가항력적 재난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환경과 결합해 나타나는 재난, 곧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생산된 위험’이다. 쉽게 말해, 인간이 만든 ‘인재’다. 9년 전 수학여행을 떠난 꽃다운 고등학교 학생 등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가 대표적인 예다. 세월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고의 원인 중 하나인 노후 선박 운행허가 연장으로부터 구조실패에 이르기까지 압축 근대화 속에 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이윤지상주의, 생명경시주의, ‘빨리빨리주의’라는 ‘생산된 위험’이 낳은 비극이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벡에 따르면, 위험사회를 만드는 주된 원인은 ‘조직화된 무책임’이다. 이는 ‘정책결정자들은 위험에 처하는 민초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위험에 처하는 민초들은 정책결정에 참여할 방법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벡은 세월호 참사 이후 방한해 세월호의 비극이 파국을 통해 조직화된 무책임과 위험사회에 대해 각성하고 이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나가는 ‘해방적 파국’이 되기를 기원하며 경고했다. “이후 사태가 조용해지면 정치인들은 과거의 관행을 답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겪는 위험사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가 그간의 이윤지상주의, 생명경시주의, 빨리빨리주의를 반성하고 생명과 안전을 중시하는 ‘생명안전사회’로 탈바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지 않았다. 세월호는 해방적 파국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불행하게도 벡의 경고가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해방적 파국 대신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세월호의 교훈을 잊고 예전으로 돌아간 ‘망각의 정치’였다. 아니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유가족 등의 외침에 대해 보수세력은 “나라 지키다가 죽기라도 한 것이냐”는 악담이나 늘어놓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8년이 지난 지난해 가을, 이태원의 해밀톤호텔 골목길에서 핼러윈을 즐기던 젊은이 등이 용산구청과 경찰 등의 부실대응 속에 159명이나 압사한 참사가 발생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번에는 폭우 속에 오송 지하차도 참사, 예천 산사태 등으로 5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 사건들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오송의 경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제방을 무단 철거했고, 임시제방도 부실했다.

청주시와 충청북도도 도로통제 등 대응에 문제가 많았다. 경찰은 112신고에도 제대로 출동하지 않았고 소방본부는 119신고에 출동했지만 후속조치는 부족했다. 김영환 충북지사는 침수 등 지하차도에 관한 보고를 받고도 자기 땅이 있고 댐이 넘쳤지만 위기상황이 진정돼 시급하지 않은 괴산으로 향했다. 언론 등이 이를 비판하자 김 지사는 “제가 거기(사고 현장)에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는 한심한 망언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유럽 순방 중 뜬금없이 일정에도 없는 우크라이나로 달려갔다.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사즉생’을 외치고 있을 때 이 땅에서는 정부의 임무방기로 죄 없는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작은 사고들은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다. 석 달 전 분당 정자교를 건너던 주부는 갑자기 보행로가 붕괴해 목숨을 잃었다. 6개월 전 안전점검에서 ‘양호’ 판정을 받은 다리가 무너진 것이다. 이제 다리도 마음 놓고 건너지 못하게 됐다. 안타깝게도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바뀐 것이 없다.

정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으로 재난대응체계 정비를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망각의 정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번 폭우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이번 폭우 이상의 자연재앙들이 줄줄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재난대응시스템을 정비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대응체계 정비는 ‘폐암환자에게 감기약 주기’식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더불어민주당도 이번 기회에 기후위기에 대한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가? 이번만은 망각의 정치를 넘어 모든 정책이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에 따라 ‘해방적 파국’이 되길 기원해 본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모두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세월호, 이태원, 오송 참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우리 모두의 불안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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