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칼럼

‘1인 1/7표제’를 넘어서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한 나라가 ‘민주주의’, 정확히 이야기해 ‘정치적 민주주의’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표는 무엇일까? 흔히 사상, 언론, 결사,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지표가 있다. 성인이면 모두가 동등하게 한 표의 투표권을 갖는 보통선거권이다.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보통선거권에 의해 가난한 사람과 여자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선진국들도 100년밖에 안 된다. 그 이전에는 투표권은 재산을 가진 부유한 남자들에게만 주어졌고 사회주의자를 제외하고 자유주의자 등은 보통선거권에 결사반대했다. 결국 노동자, 여성 등의 투쟁 덕분에 보통선거권은 제도화됐고, 이제 우리는 보통선거권과 1인 1표제는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처럼 승자독식주의에 기초한 단순다수대표제를 채택하는 나라의 경우 많은 유권자들의 표가 사표가 되고 있다. 그 결과 1인 1표제는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주목한 헌법재판소는 선거구 인구 차이로 유권자 표의 가치가 2배 이상 차이 나는 것은 위헌이라 판결했다. 특정유권자들이 사실상 1인 2표 이상을 행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당과 같은 소수정당은 10% 득표를 하고도 반민주적 선거제도에 의해 의석은 2%에 불과해 소수정당에 투표하는 표와 거대양당에 투표하는 표의 가치 차이가 5배 이상 벌어졌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도입한 것이 득표율과 의석이 일치하도록 만든 독일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쯤 흉내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이다. 그러나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라는 거대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의석까지 독식하면서 양당의 독점은 오히려 강화됐고 양당과 소수정당 투표자들의 표의 가치 차이는 7배 이상으로 더 벌어졌다. 2020년 총선에서 거대 양당 투표자는 소수정당 투표자에 비해 7배의 표를 행사하는 ‘1인 7표제’를 실시했다는 얘기다. 뒤집어 말하면, 소수정당 투표자는 똑같은 1표가 아니라 1/7표밖에 행사 못한 ‘7등 시민’에 불과한 ‘1인 1/7표제’였다. 한심한 것은 위성정당 쇼를 벌인 뒤 연 첫 정기국회에서 두 당이 야합해 서둘러 통과시킨 법이다. 2020년 12월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비례대표 후보에 대한 민주적 선출절차’를 삭제하는 법안을 함께 통과시켰다. 입맛에 맞는 사람을 비례대표로 밀실공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2024년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위성정당을 금지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선거제도를 오히려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처음부터 준연동형을 반대했던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을 이유로 선거제도를 일본식 병립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구더기가 무서우니 장 담그지 말자’는 얘기로, 사표가 엄청나게 발생해 표의 등가성이 훼손되는 반민주적 제도로 돌아가자고 떼쓰고 있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민주당에서도 “준연동형의 취지에 동의하지만 위성정당을 피하기 위해선 병립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예전의 병립형으로 후퇴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위성정당을 규제하지 않음으로써 ‘위성정당 시즌 2’가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선거제도가 후퇴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인 것은 이탄희 의원 등 30여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위성정당 금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하자고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비례의석들은 중소업자들을 위한 ‘골목상권’ 같은 것으로 소수자들과 소수정당을 위해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위성정당만이 아니라 지난 총선 열린민주당처럼 ‘위장된 위성정당’이 될 가능성이 큰 ‘비례정당’, 곧 지역에는 후보를 내지 못하면서 비례만을 노리는 ‘비례대표용 정당’을 금지하도록 입법화해야 한다.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이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거대양당이 지배하는 ‘정치교체’와 다당제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자신의 사법혐의 방어에 바쁜 것인지 선거제 개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 대표는 대선공약으로 돌아가 위성정당 금지, 나아가 비례대표의 민주적 선출의 입법화에 앞장섬으로써 선거제의 후퇴를 막고 선거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끌어야 한다. 국민의힘도 정말 위성정당, 비례정당이 걱정이라면 이에 찬성해야 한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정말 1인 1표제인가? 이제 반민주적 1인 7표제, 1인 1/7표제를 넘어서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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