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의 색감이 쨍하더라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붉은빛 감도는 육수에 노을빛 비치고, 얼음가루는 눈꽃 되어 엉기고. 젓가락으로 집어 입속에 넣자 잇새부터 향기로운데, 옷을 껴입어도 몸에는 냉기가 스미는걸(紫漿霞色映/玉紛雪花勻/入箸香生齒/添衣冷徹身).”

장유(1587~1638)가 남긴 시 <자장냉면(紫漿冷麪)> 속 냉면 한 그릇이 이렇다. 어느 겨울 노을 질 때, 글쟁이는 냉면 한 그릇을 달게 비웠던 모양이다. 그 육수가 이미 고운 붉은 빛깔이었는데 노을빛까지 받고, 햇메밀 사리였는지 메밀향까지 잇새에서 터졌으니 그야말로 시 읊어 남길 만한 한순간 아닌가. 붉고도 고운 육수라니, 떠오른다. 필시 잘 익은 산갓물김치를 섞어 눈으로 먼저 먹을 만한 빛깔을 낸 육수였을 테지. 찬바람이 분다. 냉면 먹기 참 좋은 계절이다. 부르르 떨면서도, 찬 육수 꿀꺽꿀꺽 넘기며 사리를 씹고, 사리를 씹으며 살얼음도 함께 씹을 만한 계절이다.

냉면. 차게 말아 먹는 한국 특유의 국수이다. 음식에서 냉온(冷溫)이란 상온(常溫)에 견주어 상대적인 감각이다. 절대온도 얼마의 아래위란 뜻이 아니다. 상온이란 일부러 냉각하거나 열기를 더하지 않은 상태의 온도이다. 한국에서는 15도 언저리이다.

그런데 냉면의 ‘냉’은 이뿌리가 시리고, 목구멍이 놀랄 정도의 차가움이다. 중식 냉채와 비교해 보자. 온기를 뺀 재료에다 시원한 정도의 즙을 뿌리면 중식 냉채는 완성이다. 상온으로 족하지, ‘차갑다’까지 가지 않는다. 얼어붙기 직전의 차가움이 깃든 음식이라면? 지구의 평균적인 감각으로는 빙과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요컨대 냉면은 차가워도 한참 차갑게 먹는, 얼음이 서리는 지경조차 마다하지 않는 별난 국수이다.

한국인이 하도 이를 즐기다 보니, 한국의 화교 요리사들은 냉채용 즙에서 연역한, 새콤달콤한 육수에다 중화면 사리를 더해 한국식 ‘중화냉면’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중화냉면 기록은 한국 언론에 1950년대면 벌써 등장하거니와 한국을 뺀 다른 지역의 화교 중식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면 요리이다. 이주자에게 없던 것까지 창조하게 했단 말이다. 냉면에다 ‘한국 특유’라는 말을 가져다 붙임은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붉은가 하면 푸르기도 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황해도 곡산에서 근무하며 해주에 출장을 왔다가 친구로부터 냉면 한 사발을 얻어먹고는 이렇게 노래했다. “서관(西關, 황해도와 평안도)의 시월에 눈이 한 자나 쌓였는데 휘장 겹쳐 두르고는 푹신한 담요에 손님을 주저앉히더라. 벙거지 모양 전골냄비에는 저민 노루고기가 붉고, 사리 튼 냉면에 곁들인 배추김치는 푸르고(西關十月雪盈尺/複帳軟氍留款客/笠樣溫銚鹿臠紅/拉條冷麪松菹碧).”

제대로 한다면 그 한 사발에 붉든 푸르든 색감 하나 쨍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냉면의 연대기에 이만한 장면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이어가고 싶다면 이런 풍경이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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