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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 [겨를]봄에 알게 되는 것
    봄에 알게 되는 것

    지난주에는 퇴근길에 차가 막혔다. 일 년에 한 번, 벚꽃이 만개할 때 겪는 일이다. 만경강의 벚꽃을 보려고 몰려든 이들이 차창을 열고 천천히 달렸다. 차를 세우고 내려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벚나무 아래 해사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이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나. 그 길에서 조급한 건 꽃잎뿐이었다. 왜 그리 빨리 떨어지는지…오늘 아침에는 한산해진 벚나무 길을 걸었다. 주말 비와 함께 인파는 물러났고, 연둣빛 잎을 틔우기 시작한 나무들은 동네 할머니들 차지가 됐다. 할머니들은 꽃잎을 반쯤 떨군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자주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셨다. 급히 갈 이유가 없으니까. 살다 보면 ‘천천히’ ‘가만히’ 같은 부사가 어울리는 시간이 오는 듯하다. 나는 그런 노년을 기다린다. 길에서 이웃 할머니를 만났다. 저만치 걸어오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멈춰 몸을 작게 웅크리셨다. 어디 불편하신가 여쭈었더니, 조용히 고갯짓으로 바닥을 가리키신다. 거기, 봄이 한 움큼 있다. ...

    9시간 전

  • ‘모두의 AI’와 딥소트 혁신

    기술은 정말 가치중립적일까? 랭던 위너는 ‘기술의 정치성’이라는 논문에서 의미심장한 사례를 소개했다. 1920년대 뉴욕 롱아일랜드의 해변으로 향하는 도로의 다리가 의도적으로 낮게 설계돼, 버스가 통과하지 못하게 만들어졌다. 그 결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민들은 해변에 갈 수 없게 됐고, 해변은 자동차를 소유한 부유층만의 공간이 됐다. 겉보기엔 단순한 건축 설계였지만, 실제로는 계층 간 차별을 구조화한 정치적 기술이었던 것이다.이는 기술이 겉으로는 중립적으로 보여도, 그 설계와 적용 과정에서 특정 가치를 반영하고 강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인공지능(AI) 기술도 마찬가지다. AI 알고리즘이 채용 과정에서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이 특정 정치적 의견을 확산시키는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이는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사회적 가치와 권력관계를 담는 그릇임을 시사한다.이런 맥락에서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의 ‘모두의 AI’ 정책은 시의적절하나 더 깊은 ...

    2025.04.16 20:02

  • [겨를]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왜들 그리 남의 나이를 궁금해하나 모르겠어.” 어머니께서 잔뜩 기분이 상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제 90대 중반을 지나 100세를 향해 가는 어머니는 어디를 가도 최고령자이고, 가는 곳마다 당신의 나이가 화제가 되는 것이 못마땅하다.조금만 친해지면 형님, 동생이고 처음 보는 이에게도 이모, 삼촌, 어머님, 아버님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정작 나이 확인은 복잡하다. 음력, 양력 생일이 다르다. 누구는 ‘빠른 ○○년’이라 하고 또 누구는 호적이 잘못됐다고 한다.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입학 시기를 정하고 만 나이 기준을 법으로 도입했지만, 나이에 따른 서열문화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다.적지 않은 관계에서 나이는 권력이다. 하지만 정작 초고령에 접어들면 나이 권력은 상실된다. 90대 초반의 어머니 친구는 동네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 그런데 자신의 나이가 많은 걸 알면 친구가 싫어할 것 같아 88세로 나이를 속였다고 한다. 나부터도 나이 많은 사람을 대하기가 어렵고...

    2025.04.09 21:30

  • [겨를]소득과 소비
    소득과 소비

    3년 후, 5년 후 미래를 내다보고 연구·개발(R&D) 관련 투자를 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평가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 생태계뿐 아니라 국제 정치 상황과 경제 전망까지 덩달아 울렁이고 있으니, 당장 다음주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이 안 되는 와중이다. 그래도 세상은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는 큰 전제를 깔고, 한편에서는 오늘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는 법이다.인공지능(AI) 기술이 바꾸어놓을 일의 미래 양상이 이전과는 퍽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소득의 원천과 소비의 대상이라는 잣대를 두고 생각해보고 있다. 기업에서 주어진 일을 기능적으로 해내며 소득을 얻던 사람들이, 플랫폼의 등장으로 부업을 하거나 주업을 전환해 소득의 원천을 확장한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기존 직장 내 나의 기능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지언정 기능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생태계가 굴러가고 있었다.근래 AI 적용의 흐름은,...

    2025.04.02 21:36

  • [겨를]강의 울음
    강의 울음

    겨울 끝에는 무리 지어 나는 새들과 함께 걸었다. V자를 그리며 비행하던 새들은 만경강 주위를 몇번씩 돌았다. 떠나기 전 비행 연습이자 집단 결속의 몸짓이라지만 사람의 눈에는 영락없는 작별 인사로 보였다. 며칠 전에는 무리에서 낙오된 세 마리의 새를 봤다. 그게 마지막이었을까. 이제 철새가 보이지 않는다.만경강은 철새들의 겨울 집이다. 겨울에는 사람보다 새가 많고, 사람보다 새가 더 크게 운다. 산책길에 반려인에게 “새가 운다”고 했더니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모국어, 프랑스어에서 새는 울지 않는다. 지저귀거나 노래하거나 짹짹거릴 뿐이다. “새가 운다는 표현은 너무 불길한 거 아니야?” 반려인이 물었다. 새의 울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울음에 담긴 슬픔과 그리움은 새의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밟고 사는 인간의 것일 테지만, 만경강의 새들은 정말 우는 것 같다. 일제의 간척 사업과 수로 개발로 물길을 잃었을 때, 홍수 피해를 본 농민들이 땅을 떠났을 때,...

    2025.03.26 21:04

  • [겨를]미래 혁신, 딥테크와 딥소트
    미래 혁신, 딥테크와 딥소트

    인류 진화와 인간 개체의 성장은 생존과 목표 달성을 위한 문제 해결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사물과 자연,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혁신을 만들어왔다.이러한 혁신은 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딥테크(Deep Tech) 혁신’이다. 사물과 물리적 세계, 자연에 대한 깊은 과학적 사유 결과물을 바탕으로 하는 혁신이다. 다른 하나는 ‘딥소트(Deep Thought) 혁신’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인문·사회과학적 사유 결과물을 바탕으로 하는 혁신이다.자연과학과 공학의 연구성과에 기반한 딥테크 혁신은 IT·바이오·에너지 분야에서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딥러닝, 딥시크, 딥리서치로 대변되는 인공지능(AI) 발달은 현재 우리 삶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그러나 이런 기술적 혁신만으로는 기후변화, 사회적 불평등, 세대 갈등과 같은 복합적이고 난해한 ‘고약한 문제들’(Wicked Problems)을 해...

    2025.03.19 21:23

  • [겨를]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어느 날 갑자기 여기저기서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게 무슨 일인가?블랙핑크 로제가 한국의 술자리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아파트’(APT.)가 국내외 음악 차트를 강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K팝 열풍을 타고 전 세계인들이 “아~파트 아파트” 노래를 부르고 있는 지금,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떤가?우리나라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아파트가 아닌 집에 사는 사람. 한국의 주거정책은 다음 세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 아파트에 살고 싶은 사람, 아파트를 사고 싶은 사람.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다.모두가 아파트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스스로 아파트를 떠난 사람들이 있으니, 나와 같은 공동체주택의 주민들이다. 나는 8년을 살았어도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나의 아파트”를 견딜 수 없어 아파트를 떠났다. 그렇게 공...

    2025.03.12 20:44

  • [겨를]분류되기를 거부할 때
    분류되기를 거부할 때

    갓 대학생이 된 어느 봄날이었다. 누군가 넌지시 “너는 우파야, 좌파야?”라 물어온 적이 있었다. 스무 살의 나는 “그런 경계는 이제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나요?”라며 넘어갔었다. 정확히 20년 전 이야기다. 그렇게 가르마 타기를 거부했던 것 치고, 이후의 나는 변수에 따라 비슷한 것을 묶고 나누는 기계학습 연구를 진행했고, 레이블러들이 데이터에 이름을 더 정교하게 붙일 수 있도록 만드는 도구 디자인에 대한 논문을 썼으며, 남들처럼 MBTI 신봉자가 됐다.사실 분류가 피해야만 하는, 해로운 행동인 것은 결코 아니다. 지식 피라미드, 일명 DIKW 모델에서도 그 첫 다리를 놓는 것이 분류였다. 1980년대에 소개된 이 모델은,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Data)가 맥락에 따라 분류되면서 정보(Information)가 되고, 정보가 분석을 거쳐 지식(Knowledge)이 되며, 여기에 통찰이 더해져 지혜(Wisdom)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단순한 관측값과 신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

    2025.03.05 20:57

  • [겨를]존재를 비추는 장소
    존재를 비추는 장소

    마을을 걷다 보면 오래된 이층 목조 주택이 눈에 띈다.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가문이 일제강점기에 춘포의 농지를 매입하며 지은 농가다. 시골집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그 집의 이국적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춘포의 또 다른 이름, 대장촌이 떠오른다. 큰 농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일본인 지주들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지우려 했지만, 지금도 동네 어르신들의 입에 붙은 건 춘포가 아니라 대장촌인 듯하다. 한 장소에 새겨진 역사는 언어에 오래 남는 법이니까. 내게도 그런 언어가 있다. 다라이, 땡깡, 요지, 단도리 같은 일본어. 할머니에게서 배운 말이다. 의식적으로 지웠으나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소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던 할머니는 한글을 제대로 쓸 줄 몰라 경조사 봉투에 이름과 메시지를 적어야 할 때면 나를 부르시곤 했다. 할머니의 말을 옮겨 적는 대가로 내가 받은 것은 과자와 이야기였는데, 사실 나는...

    2025.02.26 20:57

  • [겨를]다가온 AI 시뮬레이션 시대
    다가온 AI 시뮬레이션 시대

    지난 대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 명태균의 여론조사 조작 사건은 단순한 범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전통적 여론조사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기존 여론조사는 표본 선별 과정의 조작 가능성, 응답자들의 바람직한 답변 편향, 그리고 응답과 실제 행동의 괴리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여론조사가 중요한 의사결정 도구로 활용되는 현실에서 이런 취약성은 단순한 오류를 넘어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다.이러한 한계는 2024년 미국 대선에서도 드러났다. 주요 여론조사 기관들이 해리스의 우세를 점쳤으나 베팅 시장은 정반대의 신호를 보냈다. 영국의 베팅 플랫폼 ‘Betfair Exchange’에서는 1억2500만파운드가 트럼프에게 걸렸고, ‘Polymarket’에서는 한 투자자가 2800만달러를 트럼프에게 베팅해 8500만달러의 순이익을 거뒀다.이러한 상황에서 스탠퍼드대학 마이클 번스타인 교수와 박준성 연구원의 인공지능(AI) 기반 사회 시뮬...

    2025.02.19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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