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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 기사 150
  • [겨를]가장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
    가장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

    어릴 때 쓰던 책상 위에는 지구본이 있었다. 그 작은 구체는 내게 세계를 한 손에 쥘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줬다. 지구는 작고 둥그니까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게 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성인이 된 나는 여행자가 됐다. 유럽의 국경을 마음껏 넘었고, 낯선 세계로 떠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게 세계는 지구본만큼 작았고, 딱 내 보폭만큼 넓어 보였다. 내가 밟은 모든 땅은 여행자에게 호의적이었고, 나는 불편하거나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낯섦’을 즐겼다. 더 넓은 선택지, 더 먼 거리, 더 많은 나라.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얼마나 많이 점유하느냐로 측정되는 듯했다. 각 나라의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아가고, 기념품을 사면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낯섦’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넓이를 좇던 내 여행에 물음표를 던진 것은 우연히 TV에서 본 난민들이었다. 전쟁을 피해 바다 건너 유럽의 땅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배를 누군가 밀어내는 장면. 여자와...

    2025.12.10 20:01

  • [겨를]AI시대, ‘진짜뉴스’의 조건
    AI시대, ‘진짜뉴스’의 조건

    인공지능(AI)이 쓴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읽었을 것이다. AP통신은 10년 전부터 기업 실적 보고서 작성에 AI를 도입했고, 스포츠 경기 결과나 금융 정보 같은 단순 기사는 로봇 기자가 쓰는 경우가 흔해졌다.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우리는 이제 뉴스의 생산과 소비 방식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변곡점에 서 있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 “과연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AI 시대, 우리가 정의해야 할 ‘뉴스’란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AI는 지치지 않는 기자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번역하며, 단순 반복 업무를 처리하는 속도는 인간이 따라갈 수 없다. 기자가 단순 노동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탐사 보도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AI가 효율을 높여줄 수는 있어도, 사안의 맥락을 파악하고 인간의 시선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손길까지 대신하지는 못한...

    2025.12.03 21:57

  • [겨를]괜찮아요~
    괜찮아요~

    어느 휴일, 아내와 동네 산책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아내는 순두부찌개, 나는 황태콩나물국밥. 아내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고 잠시 후 종업원이 와서 내 메뉴가 주방에 잘못 들어갔다며 죄송하다고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좀 늦어도 괜찮다고 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기다리는 동안 아내의 밥을 한 숟가락씩 슬쩍슬쩍 훔치고 있는데, 갑자기 떡갈비를 내어 온다. “죄송해서요. 서비스로 드릴게요.” 덕분에 여유롭고 푸짐하게 밥을 먹고 계산하는데, 또 한 번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한다. 상황이 이 정도 되니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왜 이렇게까지 미안해해야 할까? 생각이 깊어진다.작은 실수에도 목소리가 높아지고, 사소한 불편에도 인터넷 후기와 별점이 칼날처럼 휘둘러지는 세상. 한 번의 실수에도 생존이 흔들리는 사람들. 바로 동네 식당 사장님과 종업원들, 하루하루 버티는 소상공인들이다. 치솟는 물가와 인건비에 배달앱 수수료까지 두껍게 얹힌다. 후기 하나가 장사를 뒤...

    2025.11.26 20:06

  • [겨를]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열다섯 살이 막 된 아들이 있는데요. 이 아이에게 무엇을 전공하고, 어떤 것을 배우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 나중에 어떤 일을 해도 좋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요?”인공지능(AI)과 관련한 포럼이나 대화마다 단골로 마주하는 질문 앞에서, 오늘도 만족스러운 답을 하지 못할 게 뻔했다. 대체 전 세계 어느 누가 그 답을 알겠나. 그래도 조금이라도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게 전문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 전공은 인간과 컴퓨터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의 시너지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간의 관찰을 엮어 설명을 풀어보았다.지난 몇년 동안, 각 분야 다양한 직업군에서 “AI 좀 쓴다”는 사람들을 만나왔다. 당신은 얼마나 AI 도구를 잘 쓰고 있는지,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는지, 앞으로 당신의 일의 형태는 어떻게 변할 것이며 그 직업은 계속 남아 있을지 같은 포괄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입에서 하나같이 나온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책임’이...

    2025.11.19 19:56

  • [겨를]계절의 언어
    계절의 언어

    새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기온의 변화일까, 옷차림일까. 어쩌면 스마트폰일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몇번씩 ‘패딩 점퍼 파격 세일’을 알리는 광고 문자가 온다. 스마트폰의 창을 열면 이미 한겨울이다. 내 방 창문보다 먼저 눈앞에 계절을 펼쳐놓는다.겨울의 입구다. 지갑을 열어야만 얻을 수 있는 계절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올빼미 같은 것.며칠 전 동네에 올빼미가 돌아왔다. 지난해에는 네 마리가 찾아와 함께 지냈는데, 올해는 한 마리가 먼저 온 모양이다. 옛 도정공장의 큰 나무에 매달린 그 새의 낮잠을 훔쳐보며 추운 계절이 다시 왔음을 실감한다. 돌아올 때를 정확히 알아차리는 올빼미의 시간 감각은 얼마나 정확한가. 밤의 길이로 계절을 재는 이 새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 호르몬의 분비 리듬이 변해 번식기나 이주 시기를 조절한다고 한다. 빛의 밀도와 길이, 온도 변화로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진 하루 끝에 올빼미를...

    2025.11.12 20:09

  • [겨를]AI가 만드는 6가지 가상경험 ②
    AI가 만드는 6가지 가상경험 ②

    직전 칼럼에서 필자는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내는 6가지 가상경험 중 ‘유사신빙적 물리 경험’ ‘인공적 물리 경험’ ‘유사신빙적 사회 경험’을 다루었다. 이번 글에서는 나머지 3가지 유형을 고찰하며 AI가 만들어내는 관계와 자아의 확장을 살펴보겠다.네 번째 유형은 AI 에이전트나 가상 캐릭터와 관계를 맺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인공적 사회 경험’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AI 동반자는 사용자의 정신건강에 긍정적 효과를 준다. 예컨대 장기간 AI와 꾸준히 대화한 사람들의 우울증 지수는 현저히 낮아졌다. 인간의 근원적 욕구인 ‘연결감’과 ‘소속감’이 서비스 형태로 구현된 셈이다. 이른바 ‘서비스로서의 애착’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완벽한 동반자는 현실 인간관계를 회피하게 만들 수 있다. 외로움을 치유하는 약이 될 수도, 더 깊은 고립으로 이끄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이 관계가 진짜인가?”보다 “이 관계를 통제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 목적은 무엇...

    2025.11.05 22:25

  • [겨를]어디서 죽을 것인가
    어디서 죽을 것인가

    노후 주거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어디서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임종. ‘사망하기 직전’ 혹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의미하며, 부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녀가 곁에서 지켜보는 상황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오늘날 의료와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임종 과정은 상상하기 힘들다. 의료 기술의 발전, 병원과 시설 중심의 돌봄체계, 공동체 약화, 시장 논리, 죽음 회피라는 다양한 요소가 결합한 결과다. 특히 의료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죽음조차 관리·치료·연명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임종 과정이 자연스러운 ‘삶의 마무리’가 아닌 ‘의료적 사건’이 된 것이다. 이제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분리되어 병원·요양시설 등 전문 공간에서 상품과 서비스로 다루어지고 있다.어린 시절 마주했던 할머니의 임종 장면이 떠오른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호흡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동네 의원 의사가 왕진을 와서, 임종이 다가왔으니 가족들을 부르라고 한다. 그렇게 자손들이...

    2025.10.29 20:20

  • [겨를]내 머릿속의 오케스트라
    내 머릿속의 오케스트라

    “우유 하나 사 와. 아, 달걀 있으면 여섯 개 사 와”라는 아내의 말을 들은 남편이, 달걀이 있는 슈퍼마켓에서 우유 여섯 통을 사 갔다는 우스개가 있다.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면, ‘만약 …하면’이라는 조건절을 많이 쓰는데, ‘달걀이 있으면’을 일종의 조건절로 받아들이며 생긴 어느 개발자의 경험담으로 구전돼온 얘기다. 다양하게 변주되기도 한다. 아이의 이유식 재료와 명절 선물, 생활 잡화를 몇가지 주문받고 깔끔하게 미션을 완수했다는 식의 경험담은 손쉽게 SNS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이런 사연을 은근히 즐기곤 했다. ‘우리, 개발 좀 아는 사람들끼리는 무척 공감하는’ 담론이라는 식의, 조금은 우쭐함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은 인공지능(AI)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즉 하나의 에이전트가 다른 에이전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보던 어느 날이었다. 하나의 큰 과업을 해내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작은 문제들은 매우...

    2025.10.22 21:17

  • [겨를]돌아온 사람
    돌아온 사람

    추석 연휴 내내 동네가 북적였다. 컴컴했던 집들이 불빛으로 환해지고, 적막하던 골목에는 늦은 밤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돌아왔다. 아무리 먼 곳에 터를 잡고 살아도 고향집에 온 사람들은 ‘돌아온’ 사람들이다.“저 왔어요.” 낯선 목소리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아파서 자리에 누웠다던 이웃 할머니가 골목 앞에 나와 있다. 노인의 얼굴이 아니라 아이를 마중 나온 젊은 엄마의 얼굴로. 중년의 남성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웃는다. ‘돌아온다’는 말에는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의 회귀도 담겨 있는 모양이다. 직선으로 흐르던 시간이 방향을 바꾼다.부모가 있는 집, 내가 자란 집 앞에 서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면 과거가 문을 열어줄 것만 같다. 아직 젊은 부모와 그들이 애지중지 아끼는 살림살이가 여전히 거기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다 문턱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부모는 왜 한없이 작아질까. 제자리에 ...

    2025.10.15 21:37

  • [겨를]AI가 만드는 6가지 가상경험
    AI가 만드는 6가지 가상경험

    2000년대 초 필자는 정보통신(IT) 기술이 만들어내는 가상경험을 경험 대상의 속성(유사신빙성·인공성)과 경험 영역(물리적·사회적·자아)의 조합으로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분류 체계는 향후 인공지능(AI)이 제공할 다양한 가상경험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현명하게 이용하도록 돕는 안내서가 될 수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먼저 세 가지 유형만 다루고, 다음 칼럼에서 나머지 세 유형을 이어 설명하고자 한다.첫 번째 가상경험 유형은 실제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이나 객체를 디지털 기술로 체험하는 ‘유사신빙적(Para-Authentic) 물리 경험’이다. 구글 어스로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보거나, 가상현실(VR)로 이사 갈 집을 미리 둘러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 이 기술은 현실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AI는 이 거울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예컨대 현재 싱가포르·서울 등 세계 여러 도시는 항공사진과 정밀 측량 등을 활용해 도시 전체를 ‘...

    2025.10.0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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