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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것을 겪지 않을 권리
명절이 다가온다. 메타인지를 총동원할 시기가 온다. 닷새 연휴 중 며칠을 가족과 함께하고 며칠은 나만의 휴가로 쓸 것인지, 무더운 날씨에 추석 선물은 무얼 준비해 어떻게 나를 것인지, 어떤 말은 덜 하고 덜 들을 수 있을지 등등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운전이다. 뉴스 채널들이 이전 데이터를 토대로 교통 정체 예측을 보도해주기는 하지만, 그때부턴 어쩐지 눈치싸움이 시작되는 것만 같다. “오후 4~5시 사이 귀경길이 가장 막힐 거라고 예측했으니 모두 이 시간에는 안 움직이겠지?”라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가 역시나 차량정체를 겪기도 하고, “밤 10시 이후 이동이 낫다”는 말을 금쪽같이 믿었다가 비슷한 뉴스를 본 인파와 함께 오랜 시간을 도로에서 보내기도 한다. 도로 위에서 하염없이 보내는 시간을 싫어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시절이 왔다고 해도 이 싫은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싫은 말을 듣는 것을 피하는 일은 더 어렵... -
대한사람 대한으로
수의사가 직업이니 별의별 개들을 다 만납니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는 개도 있었고, 돈을 주면 넙죽 인사부터 하는 개도 봤습니다. 그리 거창할 것 없더라도 개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지?’ 하며 놀라고, ‘얘는 천재 아닐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집 나비는,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너는 왜 이런 것도 몰라?’가 일상입니다. 하도 모르는 것이 많으니, 귀찮아서 일부러 모른 척하나, 의심이 일기도 합니다. 누구나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상식이라고 합니다. 일정 수준의 지식이나 교양도 상식이고, 공동체가 합의한 가치관도 상식입니다. 우리는 버스나 안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거리낌 없던 시절을 지나, 공공장소나 실내에서의 금연은 상식이 된 시대에 이르렀고, 교통사고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으뜸이던 시절을 지나, 사고 접수와 블랙박스가 상식이 된 덕에 대거리가 없어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경계는 흐리지만, 상식이라는... -
다정한 공동체의 성분
“언니, 내 이름은 청자예요. 푸를 청을 써요.” 하명희의 단편 <청자의 노래>에 등장하는 대사다. 작중 ‘청자’는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밤무대 가수, 노래방 도우미를 전전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청자의 아이가 새로 전학한 학교의 학부모들은 그런 청자를 따돌리며 말조차 섞지 않으려 한다. 가난한 청자와 ‘선’을 긋고 싶어한다. 한집에 사는 작중화자는 그런 청자를 집에 초대해 커피를 내어주며 다정한 말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 또한 본명이 무엇인지 선언을 한다. “내 이름은, 내 이름도 춘자야. 봄 춘 자를 써. 나도 내 이름이 싫었어. 숨기고 싶더라고.” 그러자 청자가 화답한다. “춘자래. 청자랑 춘자. 우리 둘을 합치면 청춘이네”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애로운 공동체, ‘청춘’의 연대가 탄생한다.위 소설은 하명희 소설집 <고요는 어디 있나요>(북치는소년 2019)에 수록된 작품이다. 위 작품에서도 확인할... -
마지막 집은 어디에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두려운 세상에서 과연 나의 ‘마지막 집’은 어디일까? 이 시대 적지 않은 노인들이 ‘집’이 아닌 요양시설에 머물고 계시며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고 있다.우리 사회가 고령자주거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마지막 집 또한 요양시설이거나 시설 입소조차도 쉽지 않을 수 있다. 그 미래가 원치 않는 모습이라면 아파트만 끝없이 지어 올리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 집에 신경 써야 한다.7월23일 정부는 ‘시니어 레지던스 활성화 방안’ 정책을 발표했다. 시니어 레지던스? 고리타분한 노인주택이 아니라 그럴듯한 신상품을 소개하는 느낌이다. 초고령사회를 맞아 고령자 주거의 선택지와 공급을 늘린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시니어 레지던스가 아파트 시장의 정체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부동산 개발사업을 일으키기 위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앞뒤 없이 고령자주택이 부족하니 규제를 확 풀어서 공급을 늘리겠다는 결정 이전에 물어야 할 질문이... -
대화를 늘릴 방책
여름 휴가철을 틈타 도무지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나라에 왔다. 오지랖 넓은 성격 덕에 이 나라에도 현지인 친구를 몇명 두고 있는데,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메신저로 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구실을 열심히 찾아봤다. 그러나 챗GPT를 비롯한 거대 언어모델 기반 서비스들 때문에 모든 핑곗거리를 놓치고 있다.AI 서비스가 나오기 전이었다면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했을 것이다. 현지 뉴스 사진을 찍어서 “이런 화면이 나오는데 무슨 뜻이야?”라고 물을 수도 있고, “내 이름을 너희 언어로 써 줄래?”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서 “이런 말을 들었는데 어떤 뉘앙스야?”라고 되물을 수도 있고, “왜 이 투어에서는 외국인을 우대해 준 것일까?” “근처에 온천이 많은데 어디가 나에게 제일 어울릴 것 같아?” 같은 물음을 속사포처럼 뱉을 수도 있었다. 이 모든 질의응답을 AI로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우선 용기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AI 도구 잘 써서 ... -
해브 어 나이스 드림
우리집 나비는 종종 꿈을 꿉니다. 혼자 짖기도 하고, 허공에 대고 허우적허우적 달리기도 합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와 고양이, 조류 혹은 일부 어류도 꿈을 꾼다고 합니다. 그들의 꿈은 행복한 색깔일까요? 아직도 우리는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삽니다만, 이미 120년 전 프로이트는 저서 <꿈의 해석>을 통해 미신에 기댄 해몽을 배척하고, 꿈을 과학적으로 탐구했습니다. 학창 시절, 너도나도 보길래, 저도 한번 읽어보았지만, 문장과 단어가 어려워 이해는 고사하고 읽어내기도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소양이나, 꿈의 재료, 꿈의 목적을 소원 혹은 욕구의 성취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어머니 꿈해몽도 영 틀린 말은 아니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편 이루고자 하는 꿈도 ‘꿈’이라고 부르지요? 아이들의 장래희망, 젊은이의 포부를 “꿈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소원의 성취라는 맥락에서 인류는 프로이트 이전부터 꿈의 본질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언어에 녹여냈기에 꿈은 두 가지 뜻을 가... -
아우슈비츠의 ‘월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잔혹한 낙원이었다. 어쩌면 나와 우리의 삶이란 약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위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였다. 극장을 나오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작가 장 아메리가 “가끔 히틀러가 사후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2023)는 스위트 홈을 추구하며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를 용인하려는 우리 안의 무의식을 통렬하게 꼬집는 영화였다. 여기, 여행엽서에 나올 법한 완벽한 집 한 채가 있다.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 부부가 사는 집이다. 이들 가족이 사는 집은 지상에 구현한 그야말로 완벽한 천국이다. 남편인 루돌프 회스가 말을 타고 출근하면, 아내 헤트비히는 아이들을 돌보고 온 집 안을 아름답게 가꾼다. 이들의 정원에서는 온갖 꽃과 나무 그리고 작물들이 무럭무럭 잘 자란다. 유대인 하녀들... -
잘 죽을 권리
의료, 요양, 돌봄, 상조.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 시대 ‘죽음’은 점점 더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어가고 있다. 살기도 힘들지만 죽기도 쉽지 않다. 잘 죽기는 더욱 어렵다. 무병장수 끝에 고통 없는 죽음, 9988234를 꿈꾸지만,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일인가. 현대의학의 눈에 노화란 없다. 살아 있는 한 치료하고 극복되어야 할 다양한 이름의 질병만이 있을 뿐. 우리의 노년에는 병명과 먹어야 할 약이 하나씩 더해진다. 누구에게나 임종의 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죽음을 의료의 패배로 인식하는 고약하고 오만한 의료시스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환자를 살리려 든다. 의사에게 환자를 살려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면 환자에게도 잘 죽을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임종 단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렵게 얻어낸 ‘잘 죽을 권리’의 시작이다. 내가 주 1회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대형병원 부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실 모습을 통해 다음 3가지... -
정확도에 민감해질 때
출근하던 아침, 스마트워치의 진동이 울렸다. “깨끗이 씻었어요”라는 메시지가 떴다. 팬데믹 시기에 추가된 기능인데, 20여초 손을 씻으면 이런 메시지가 뜨곤 한다. 그런데 서울 성수동 한복판에서 이런 메시지라니. 분명 매미 울음과 손의 흔들림을 ‘씻는 행위’로 판단한 기계의 실수임이 틀림없었다.이런 기계적 혼동쯤은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도리어 ‘여름철 곤충 소리가 물소리로도 들릴 수 있겠구나’라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기계의 오류를 활용해 소박하게 우리의 이득을 챙겨온 적도 있다. 휴대전화를 마구 흔들어 ‘1만보’를 걸은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고, 마우스를 툭툭 쳐서 잠들기 직전의 원격 근무 툴을 깨우기도 했으며, 이상한 광고를 눌러 보더라도 황급히 다른 콘텐츠들을 꾹꾹 눌러 ‘검색 세탁’을 하기도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막 세상의 빛을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 맥북 던짐 사건’을 탐색했던 것도 정확도의 틈을 노려 기계를 ... -
외로워도 슬퍼도
우리집 나비는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가족들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탓에, 분리불안이 심했습니다. 잠시라도 혼자 있는 날엔, 짖다가 울다가 급기야 토하고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무리를 지어 사는 갯과 동물에게 난생처음 강요된 외로움은 그렇게 가혹한 것이었나 봅니다. 제가 쓰는 원장실 책상에 알 수 없는 명함이 100장도 넘게 있어 정리 중입니다. 아는 사람이 참 많네요. 이 명함의 주인들에게는 저 또한 ‘아는 사람’일 겁니다. 옆 건물 카페 사장님도 아는 사람이고, 앞집 편의점 사장님도 아는 사람, 매일 점심을 때우는 백반집 이모님은 친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 편이 되어, 도와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명함책을 뒤져보고, 전화 연락처를 끝까지 내려보아도 눈에 반짝하고 들어오는 이름은 없습니다. 저도 분리불안, 외롭습니다. 금융위기가 세상을 덮쳐, 모두가 꿈도 희망도 없었던 시절, 눈을 감고 상상하면 모두 이뤄질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