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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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를]외로운 노인의 위험한 연대

    외로운 노인의 위험한 연대

    내가 바라는 노년의 모습은 ‘명랑한 동네 할아버지’다.무루 작가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호기심과 감수성을 잃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대 안에서 독립된 개인으로 나답게 살아가는 노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대다수 할아버지의 공통점은 웃음은커녕 얼굴에 표정이 없고 말이 없고 재미가 없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다.지난해 12월 일본의 노인주택과 요양시설을 돌아보고 왔다. 나는 남성 노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든 남성의 비율은 20~30% 정도로 여성 노인이 많다. 여전히 가부장제 문화가 살아 있는 한·중·일 동아시아의 공통점인지 몰라도 일본의 남성 노인 역시 별로 말이 없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던 서비스제공형고령자주택의 소장은 남성 거주자의 커뮤니티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본인이 나서서 모임을 만들었다. 무...
  • [겨를]고백을 쑥스러워할 수 있기를

    고백을 쑥스러워할 수 있기를

    한 해를 돌이켜보며, 그간 새겨둔 데이터들을 꺼내어 보았다. 1년 동안 쓴 글, SNS 포스팅, OTT 시청 기록, 찍어둔 책 사진들, 일정 수첩에 박힌 지난 약속들을 나열하고 보니 2024년도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연초에 호기롭게 세웠던 목표 가운데엔, 우선순위에서 밀려 은근슬쩍 소멸된 것들도 있었다. 인공지능 기술이 개인을 아주 뾰족하게 파헤쳐서 기어이 그 사람의 목표를 다 달성하도록 돕고 심지어 조종까지 하는 세상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일본어 가타카나 철자를 끝끝내 못 외울 것 같다.데이터에는 기억과 감정이 새겨져 있다. 지난해 1월, 명함 애플리케이션에 수십장 우르르 박힌 이름들에는, 1년간 이렇게까지나 깊어질 줄 꿈에도 몰랐던 사람들과의 첫 만남이 배어 있다. 업계에서 자주 보게 될 벤처캐피털 교육 과정 동기들이 묶인 날이었다. 3월18일에는 무척 만나보고 싶던, 눈이 정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창업자를 마주했었다. 분당의 한 건물 1층에서 만나 서로 동공을 살짝 ...
  • [겨를]오래전 그날

    오래전 그날

    10여년 전 “당신의 그리운 시절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얼른 한 대목 당당하게 꺼내 놓으려 했지만, 곰곰이 더듬어도 뒤져내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 겨우 찾아낸 것이 고작 하루, 대학 4학년 여름방학의 어느 날입니다. 개운히 눈을 뜨고, 하숙방 옥상에서 담배를 피워 물자, 바람에선 바삭 마른 빨래 내음이 나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습니다. 해야 할 일, 가야 할 곳이 없고, 근심도 걱정도 없으니, 속 끓일 터럭 하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하숙집 아주머니가 외판원에게 속아 들여놓은 시드니 셸던 전집을 읽다, 선선한 바람에 기분 좋은 낮잠을 잤습니다. 부족한 것도 필요한 것도 없는 하루였습니다. 애써 그날을 기억해 낸 후로 지금껏, 저는 때때로 눈을 감고 그 여름의 하늘을 떠올립니다. 잘 마른 수건의 햇볕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12월3일 밤, 계엄군들에게서는 새 아이폰 냄새가 났습니다. 전화기란 물건이 할부만 끝났다 하면 귀신같이 고장이 나는 탓에 2~3년...
  • [겨를]그들의 나라, 우리들의 나라

    그들의 나라, 우리들의 나라

    12월14일, 국회에서 윤석열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11일 만이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우리나라 주권자들의 저력과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확인해준 시간이었다. ‘국난 극복’이 체질이 된 대한민국 주권자들은 2차 비상계엄이 선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차분히 행동했다.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의 시위문화와도 달랐다. 대한민국 주권자들은 겨울강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저마다의 깃발을 만들었고, K팝과 민중가요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고, 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 메인 시위대가 진행하는 본행사 외에도 작은 민회(民會)를 연상시키는 공론장들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20세기 초 혁명가 옘마 골드만이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한 말이 참으로 실감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12·14 탄핵소추안 통과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버전업을 위한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우리는 독재자를 권좌에서 잠시 ‘직무정지...
  • [겨를]보통 이 정도 합니다

    보통 이 정도 합니다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다. 언젠가는 이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죽음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유족들은 슬퍼할 겨를 없이 당장 상(장례)을 치러야 한다. 이때부터 모든 주도권은 전문가(장례지도사)에게 넘어간다. 장례 절차와 의례, 장례식장 및 장사시설 이용, 빈소 설치와 조문 예절에 이르기까지 장례지도사는 일사천리로 안내한다. 상당 부분 이미 패키지화되어 있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뭐가 뭔지 잘 몰라 하는 질문에 장례지도사는 친절함에 전문가의 권위를 담아 답을 한다.“보통 이 정도 합니다.”장례지도사가 많이 하는 말. 보통 이 정도 합니다. 무엇이 ‘보통’이고 ‘이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모른 채 다들 이렇게 ‘보통, 이 정도’의 장례를 치른다. 국내 상조시장은 누적 선수금 10조원, 누적 가입자 10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연평균 10% 이상의 놀라운 성장세다. 이렇게 공급자 주도의 시장에서 정신없이 3일장을 치르고 나면 훌...
  • [겨를]덜 하기보다는 잘하고 싶어서

    덜 하기보다는 잘하고 싶어서

    전 세계 개발자와 창업가들이 시제품 정도의 애플리케이션을 올려 사용자의 반응을 확인하는 플랫폼이 있다. 생성형 AI 기술이 빠르게 확산된 지난 2년 동안 이 사이트를 문지방 닳듯 들여다보며 제품 타깃의 변화를 봤다. 데이터로 분석해보면 재밌는 게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1월까지의 데이터 6만여건을 모아 분석해봤다. 이 가운데 ‘오늘의 제품’으로 꼽히는 최소 요건인 1000건을 득표한 제품들을 뽑아보니 딱 300개가 나왔다. 시계열로 어떤 기능의 제품들이 더 관심받고 덜 출시됐는지 알고 싶었고, 맥락적으로 분류 참 잘하는 챗GPT와 함께 거칠게 데이터를 군집별로 쪼개봤다. 총 6개의 클러스터가 나왔다. 이 중 20개월 내내 높은 비중을 보였던 군집은 조직에서의 특정 업무를 빠르게 돕는 B2B 제품들이었다. 웹사이트를 생성하고 팀 협업을 하고 정보 관리를 하는 도구들이 여기에 들어간다. 아무래도 기업 생산성 측면에서 AX를 하려는 타깃을 노린 제품이 많았고,...
  • [겨를]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양심

    우리집 나비는 식구들 반기기에 꽤나 열심인 개입니다. 귀를 한껏 젖히고 현관까지 펄쩍펄쩍 뛰어나와야 보통인데, 그런 나비가 사람이 들어와도 딴청을 피우고, 불러도 못 들은 척 눈을 피하면, 역시나, 곧 들킬 사고를 저질러 놓았습니다. 제 잘못을 알고 마음 졸였나 봅니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별하는 도덕적 기준을 ‘양심’이라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양심을 일컬어 ‘마음의 삼각형’이라 했는데, 나쁜 짓 저지를 때 그 모서리에 찔린 마음이 아픈 것이라 믿었습니다. 우리말에도 ‘양심에 찔린다’는 표현이 있으니 그 죄책감과 수치심의 저릿한 통증은 시대불문, 국적불문. 나비조차 그러하니 종족도 불문입니다.정치가 실종되었다고들 합니다. 옛 정객들의 소통과 담판 같은 낭만까지는 욕심이라 치더라도,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고, 서로의 선의에 기대어, 양보와 배려를 통해 국익을 우선하고, 국민의 안위를 도모하는 정치는 실종되었습니다. 대신 ‘법대로 해보자’는 수준 이...
  • [겨를]지역에서 연결될 권리

    지역에서 연결될 권리

    수년 전부터 ‘동네지식인’을 자처했지만, 요즘 정작 동네를 비우는 경우가 잦다. 동네 술벗들로부터 “동네를 너무 자주 비우는 것 아니냐”며 힐난을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15년 전쯤 자발적 백수가 된 이래 직장인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잘 지켜온 것에 만족해하는 편이다. 올해 유독 자주 찾은 지역은 전남이었다. 전남문화재단 자율기획형 사업 책임심의위원을 맡아 해남, 담양, 곡성, 고흥 등지를 찾았다. 시인보다는 ‘전사’이고자 했던 김남주 시인(1945~1994) 30주기를 맞아 김남주기념사업회가 극단 토박이와 손잡고 상연한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 관극차 해남을 처음 방문했다. 곡성 한국실험예술정신이라는 단체가 옥과면 신흥마을에서 국내외 예술가들과 함께 옛 신흥상회를 꾸며 마을 갤러리를 만든 멋진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었다. 따뜻한 10월의 가을 한낮에 이루어진 오프닝 행사는 조촐한 마을 잔치가 되었다. 하지만 아츠뷰라는 단체가 신...
  • [겨를]‘다문화’라는 그 말

    ‘다문화’라는 그 말

    요즘 성남에 자주 간다. 성남. 흔히들 알고 있는 판교, 분당이 아니다. 남한산성 아래, 청계천 철거민의 이주로 시작된 도시. 광주대단지 사건의 아픈 역사,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로 기억되는 그곳이다.지난 9월부터 한 회사에서 파트타임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중장년 일자리 지원 차원에서 마련된 단기 일자리다. 내가 맡은 일은 은퇴전문인력 멘토와 청소년·청년 멘티 간 멘토링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멘토링 코디네이터다. 그 일로 성남에 간다. 성남의 한 다문화지원기관에서 멘토링을 신청한 것이다.태평역, 모란역 일대의 성남 구도심은 서민들의 소중한 주거지역이다. 소설에서 ‘대학 나온’ 권씨가 아홉 켤레의 구두를 남겨놓고 떠난 그곳에 지금은 많은 이주민과 그 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 빽빽한 저층주거지 골목은 ‘응답하라 19XX’ 시절의 느낌이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안에 내가 찾는 다문화센터가 있다. 그곳은 지역의 아동·청소년을 위한 쉼터이...
  • [겨를]뾰족한 성공 사례가 없어서

    뾰족한 성공 사례가 없어서

    몇주 뒤면 챗GPT가 세상에 나온 지 정확히 2주년이 된다. 2년 새 기술적 변화는 많았다. 대규모 언어모델(LLM)의 크기는 파라미터 수를 기준으로 3배 넘게 커졌고 연산량도 덩달아 늘었다. 패러다임 전환도 그새 있었다. 기존에는 학습을 통해 맥락에 맞는 결과물을 산출해내는 탐색적인 용도로서의 언어모델이 중점적으로 개발됐다. 그러나 9월에 출시된 챗GPT o1 모델은, 기존에 학습한 데이터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각을 해서 답을 해내는 추론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하지만 AI가 우리 일상의 어느 부분을 바꾸어 놓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여전히 얼리 어답터들의 생활만 바뀐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매달 2만~3만원씩 기꺼이 내며 AI 서비스들을 활용한다. 문서 작성부터 영상 편집, 발표 슬라이드 작성과 유튜브 요약까지 어느 한 구석 AI 기술을 안 넣는 곳이 없을 정도다. 빠른 생산성은 더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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