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축구만 문제가 아니다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겸 뉴콘텐츠팀장

멍한 밤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자는 가족까지 깨워서 함께 지켜본 경기였다. 황금세대가 총출동했으니 전반전이면 경기가 사실상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상대는 요르단이 아니라 마치 유럽의 어느 팀 같았다. 유효슈팅 0. 지난 7일 아시안컵 준결승전은 그렇게 끝났다. 허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해 뒤척였더니 날이 밝고 있었다. 이상했던 그날의 경기는 이제 의문이 하나씩 풀리고 있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더선은 손흥민과 이강인 간 다툼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설마 했지만, 곧 사실로 확인됐다. 이른바 ‘핑퐁사태’다.

어느 조직이나 갈등은 존재한다. 갈등은 조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단, 전제가 있다. 갈등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조직을 와해시키는 분열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요르단전 당시 이강인 선수가 의도적으로 손흥민 선수에게 패스를 하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진실은 경기장에 있었던 선수들만이 알 테지만, 이강인 선수의 손흥민 선수에 대한 패스가 극히 적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자중지란의 결과는 한국 축구의 추락이었다. 요르단 감독은 경기 직후 “한국은 그렇게까지 존경할 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능한 한국 사령탑은 그저 웃고 있었다.

결국 클린스만 감독이 경질됐지만, 이번 주말에도 온라인은 왁자지껄했다. 핑퐁사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면 특이한 게 있다. 단순한 의견개진을 넘어 몹시 감정이입이 된 경우가 많다. 소위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다. 핑퐁사태는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본, 혹은 겪고 있는 문제다. 성과를 내기 위해선 팀이 함께해야 한다는 선임세대와 자유로운 개인생활을 중시하는 후임세대 간 사고방식 차이는 곧잘 부딪친다. 조직의 허리, 또는 리더로서 부서를 이끌어야 하는 4050이라면 주장 손흥민에게 더 공감하고, 지시를 받아 실무를 이행하는 2030이라면 이강인에게 더 공감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대표팀에는 92라인, 96라인, 01라인 등이 존재했다. 국내파와 국외파 구분도 있다고 했다. 과거 축구팀을 사분오열시켰던 학연과 지연 대신 새로운 편가르기가 팀을 쪼개고 있었다는 얘기다. 사령탑은 ‘해줘축구’로 일관하며 갈등들을 방치했다.

그런 점에서 핑퐁사태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NS의 필터버블(인터넷이 사용자가 선호하는 부류의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심해지면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이 더 강해진 세상이다. 사회가 양극단으로 찢어지고 있는데 이를 조율할 리더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통합은 정치의 기본 역할이지만, 최고 통수권자의 입에서는 국민통합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됐다. 정치는 오히려 팬덤의 목말에 올라타 혐오정치를 부추긴다. 보수정부의 정책은 진보정부에서, 진보정부의 정책은 보수정부에서 ‘묻지마’ 지워진다. 문재인 정부 5년이 편향됐다며 이를 비판하고 정권을 잡은 윤석열 정부는 아직도 전 정부 지우기에 매달려 있다. 이런 식이라면 현 정부의 정책도 5년 후를 알 수 없다. 전 정권이 찔러주는 패스를 받을 생각도 없고, 패스를 이어줄 수도 없다는 얘기다. 연계 플레이가 전혀 되지 않았던 요르단전 한국 축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지난해 한국의 성장률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 뒤졌다. 합계출산율은 어느새 0.7명대로 떨어졌다. 2012년 당시 정부는 2021~2030년 잠재성장률을 평균 2.9%로 봤다. 2031~2040년에 가면 평균 1.9%로 떨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추정한 올해 한국 잠재성장률은 이미 2.0%로 내려왔다. 하락 속도가 예상보다 10년 이상 빠르다. 동남아 국가들에 한국은 이미 ‘그렇게까지 존경할 만한’ 나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만난 박재완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 경제가 (재임 시절인) 10년 전 했던 예측보다 더 나빠졌다”면서 “한국 사회가 갈등과 대립, 반목이 존중, 인내, 합의보다 앞서 있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67년 만의 우승 기회가 물거품 된 것은 여전히 쓰라리다. 하지만 요르단전 참패로 한국 축구의 문제점이 지금이라도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차라리 다행일 수 있다. 팀을 어떻게 재정비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한국 축구가 그런 자정능력이 있느냐 하는 점인데, 이 질문을 똑같이 한국 사회에 던져본다면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겸 뉴콘텐츠팀장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겸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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