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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 [정지아의 할매 열전]고상한 욕쟁이 할매
    고상한 욕쟁이 할매

    아랫마을 욕쟁이 할매는 남원 양반가 출신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왜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가난보다 양반 족보가 더 중요했겠지.남원떡이라 불린 할매는 시집온 뒤로 죽자고 고생만 했다. 재산이라고는 지픈(깊은) 논 - 지픈 논은 비가 조금만 와도 잠기기 일쑤였다 - 두 마지기에 산기슭의 밭뿐이었다. 자식은 줄줄이 일곱이나 낳았는데 어쩌자고 남편은 빨갱이가 되어 산으로 갔다. 여순사건 뒤 집에서 쫓겨난 할매는 좀 큰 자식들은 친정으로 보내고 막둥이만 들쳐업은 채 산에서 일 년을 보냈다. 다람쥐가 숨겨놓은 밤을 훔쳐먹으며 겨울을 났다던가.다행히 친정 오빠가 경찰이라 남편은 몸 성히 집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달 뿐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남편은 허구헌날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어느 가을, 남원떡이 밭에서 김을 매는데 소나기가 퍼부었다. 퍼뜩 그놈이 치울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한걸음에 달려왔으나 고추는 이미 물에 잠겨 있었다....

    2025.11.06 22:07

  • [정지아의 할매 열전]엉덩이로 살아낸 세상
    엉덩이로 살아낸 세상

    오래전 우리 윗마을에 앉은뱅이 아짐이 살았다. 할매가 되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오래다. 아짐이 언제 어떤 사연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아짐은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부터 앉은뱅이였다. 아짐의 남편은 좌익을 도운 죄로 짧은 감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아짐네 마루에는 늘 흙투성이 일복이 놓여 있었다. 앉은걸음으로 마루 끝에 당도한 아짐은 평상복 위에 두툼한 일바지를 껴입고는 두 팔에 힘을 주어 마당으로 내려앉았다. 두 팔과 엉덩이를 지렛대 삼아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끌고 밭에 당도한 아짐은 점심도 거른 채 죽어라 일만 했다. 엉덩이를 끌며 잔돌투성이 길을 오가고 흙밭에서 일하다 보니 바지 뒤가 노상 해졌다. 해진 곳에 얼마나 여러 번 새 천을 덧댔는지 일복을 입은 아짐의 엉덩이는 흑인 여성의 엉덩이처럼 거대했다.마을 한가운데 살았지만 아짐은 언제나 혼자였다. 집 근처 커다란 팽나...

    2025.10.09 20:54

  • [정지아의 할매 열전]베락 맞아 죽은 놈
    베락 맞아 죽은 놈

    백평할매 고향은 남원이다. 남원 어느 골 이름이 백평이었나 보다. 그래 백평떡이었는데 하필이면 푸둥푸둥 인심 좋게 생겼더랬다.백평할매 시댁은 난리통에 아작이 났다. 시어른 넷 중에 셋이 좌익이었는데 두 사람은 산에서 죽고, 자수한 한 사람은 어느 날 토벌대가 앞장을 서라고 했다. 한때는 동지였던 자들을 토벌대 끌고 제 발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 참담한 심정의 사람을 토벌대가 등 뒤에서 쏴 죽였다.장마철이었는데 시체 수습할 남자 하나가 마을에 없었단다. 백평할매는 옆집 아저씨와 한밤중 시신을 찾아 나섰다. 누군가 거적때기로 덮어놓았는데 손 한쪽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 손을 잡았는데 그만 살이 쑥 빠지고 말았다. 할매는 썩은 살이 미끄덩 벗겨지던 감각을 평생 잊지 못했다. 한때 좌익이었던 사람이라 번듯한 묘를 쓸 형편도 못 되어 오는 길에 산에 묻고 표시만 해놓았다. 할매는 그날 한밤중에 동행해주었던 동네 사람을 평생 은인으로 모셨다. 두고두고 그이를 존경해 올벼며 ...

    2025.09.11 20:20

  • [정지아의 할매 열전]가출 전문 재실 할매
    가출 전문 재실 할매

    재실 할매는 내 고향 반내골보다 더 깊은 산중, 집이라곤 고작 세 채뿐인 마을에 살았다. 읍내 술집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다는 남편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명절에나 잠깐 얼굴을 보였고 그마저도 차츰 횟수가 줄어 어느 순간부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첩과 멀리 대처로 나갔다는 소문만 돌았다. 첩에게 홀린 남편은 생활비도 주지 않는 눈치였다.재실 할매는 종일 산자락에 엎드려 돌을 골랐고, 틈틈이 온갖 나물을 뜯었다. 돈 되는 것이라면 돌배든 파리똥(보리수 열매)이든 머루든 다슬기든 뭐든 내다 팔았다. 할매에게는 아들 둘, 딸 셋, 자식 다섯은 물론이요, 남편의 부모까지 딸려 있었다. 아들이 그 모양인데도 상할매는 걸핏하면 며느리인 재실 할매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몸이 부서져라 집안 건사하는 며느리보다 부모마저 모른 체하는 아들이 우선인 모양이었다.상할매가 무슨 욕을 해도 묵묵히 일만 하던 재실 할매가 어느 날 처음으로 시어른에게...

    2025.08.14 21:27

  • [정지아의 할매 열전]작고 작은, 나의 째깐이 할매
    작고 작은, 나의 째깐이 할매

    오늘은 내 고향 마을에 뜨내기로 들어와 잠깐 살다 떠난 째깐이 할매 이야기다. 한 4~5년 살다 갔나?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빈 몸으로 들어와 빈 몸으로 떠났다. 째깐이 할매는 모든 게 다 작았다. 키도 작고 몸피도 작고 얼굴도 작고 눈코입도 작고, 말하기 좀 그렇지만 가슴도 작았다. 옆집 박센떡과 나란히 서 있으면 작은 가슴이 더 도드라졌다. 박센떡은 째깐이 할매처럼 자식이 넷인데도 가슴이 어찌나 풍성한지 늘 저고리가 벌어져 더러는 허연 젖무덤이 아슬아슬 볕 구경을 하기도 했더랬다. 가슴만 풍성한 게 아니라 몸 전체가 풍성했던 박센떡은 고된 일 따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고 뚝딱뚝딱 해치웠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박센도 힘깨나 쓰는 일꾼이라 그 집 살림은 하루가 다르게 윤택해졌다. 애들도 푸둥푸둥 살이 올랐다.째깐이 할매네 아이들은 다 엄마 닮아 째깐한 데다 비루먹은 개처럼 볼품이 없었다. 안 그래도 조그만데 송곳 하나 꽂을 데...

    2025.07.17 20:57

  • [정지아의 할매 열전]알고 보니 부처였던
    알고 보니 부처였던

    100살 엄마의 머릿속엔 100년의 기억이 뒤엉켜 있다 어느 순간 아무 기억이나 불쑥 솟구치는 모양이다.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물었다. “아이, 규갑이는 살았다냐 죽었다냐?”규갑이가 누군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게 누구냐고 되물었다.“규석이 동생이제.”그제야 기억이 났다. 엄마가 규갑이라 부르는, 전남편의 먼 피붙이를 나는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그냥 중학 시절의 집 주인아저씨다. 그 집에서의 기억이 모든 집을 통틀어 가장 비참했다. 그래서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주인집과 벽에 지붕을 얹어 간이로 지은 그 집엔 창문도, 화장실도 없었다. 방문을 열면 견고한 벽이 아니라 반투명 비닐로 겨우 바람만 가린 부엌이었다. 그 무렵 나는 장염을 앓았고, 주인집의 현관문은 밤 9시면 잠겼다. 시도 때도 없이 배가 아팠던 나는 별수 없이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급한 불을 꺼야 했다. 부엌에서 뒷일을 처리해야 하는 서글픔보다 더 서...

    2025.06.19 20:56

  • [정지아의 할매 열전]그늘에서 그늘로
    그늘에서 그늘로

    오래된 부고를 들었다. 더 오래전에 까맣게 잊은 사람의 부고였다. 그이, 곽센떡은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의 식모였다. 나에게 몰래 먹을 것을 주려다 주인에게 들켜 노상 두들겨 맞던 영자 언니가 무슨 일이었던지 식모살이를 그만뒀다. 무슨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아무도 그 집 식모로 오려 하지 않았다. 부잣집 딸로 고이 자란 주인 마나님이 일꾼들까지 십수명 밥해대는 게 쉬웠으랴. 보다 못한 엄마가 곽센떡을 추천했다. 인생 첫 노동에 지친 주인 마나님이 어린아이까지 딸린 곽센떡을 마지못해 허락했다.몇살이나 되었을까, 서너 살은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아이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 닮아 눈이 커다란 아이는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제 엄마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 있었다. 곽센떡은 아들을 치맛자락에 매단 채 밥을 짓고 청소를 했다. 치맛자락을 놓으면 제 엄마가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모양이었다. 죽자고 따라붙는 아이 때문에 주인아줌마...

    2025.05.22 20:49

  • [정지아의 할매 열전]세상 쿨한 요즘 할매
    세상 쿨한 요즘 할매

    지난가을 나의 친애하는 떡집언니-나에게는 언니요, 남에게는 할매다-가 웬일로 점심을 사겠노라 연락을 했다. 비싼 떡갈비를 얻어먹고 헤어지려는데 언니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언니의 팔순이었다. 언니는 팔순을 맞아 자식과 친척, 성당 사람들, 친구들 몇 팀에 식사를 대접했단다. 작은 선물과 함께.“나이 들어봉게 곁에 사램 있는 것이 젤로 좋데. 먼저 안 가불고 나랑 놀아주제, 밥 묵어주제, 월매나 고마운가. 하도 고마와서 나가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여. 긍게 말 안 했다 서운해 말소이.”이렇게나 쿨한 떡집언니는 1945년생, 해방둥이다. 여순 항쟁 직후 빨치산의 짐을 날라줬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외삼촌이 한날한시에 세상을 등졌다. 자식 넷을 떠안게 된 어머니는 광의면 여맹위원장이었다. 당연히 어머니도 잡혀들어갔다. 어느 날 유치장에서 임신한 사람은 나오라고 하더란다. 임신한 게 아니었으나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손을 들었다. 기지 덕분에 어머니는 ...

    2025.04.24 20:26

  • [정지아의 할매 열전]놉은 한 고랑, 아짐은 두 고랑
    놉은 한 고랑, 아짐은 두 고랑

    초등학생 시절, 나는 경애 언니가 제일 부러웠다. 예쁘장하게 생겨서도, 광주 고등학교에 다녀서도 아니었다. 동네서 양동떡으로 불리던 언니 엄마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었던지 그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사춘기 접어든 언니들 이야기 듣느라 날 새는 줄도 몰랐을 테지. 해가 훤히 솟은 뒤에야 눈을 떴는데 다들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사이를 기어다니는 굽은 등이 보였다. 양동떡이었다. 양동떡은 혹여 누가 깰세라 조심조심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양동떡이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아가. 왜 폴쎄 일나부렀냐. 더 자제. 밤새 노니라 곤했을 것인디…”우리 엄마는 잔소리 대마왕이었다. 책이 비뚤게 꽂혀 있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놨다, 반도 안 쓴 종이를 버렸다, 뻗친 머리를 물로 다독이지도 않는다, 엄마의 잔소리는 종류도 다양했다. 청소하는데 가만히 누워 있거나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날밤을 새웠다가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들을...

    2025.03.27 20:55

  • [정지아의 할매 열전]이토록 젊은 할매
    이토록 젊은 할매

    나의 할매들은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내가 언니라 부르던 이들이 어느 순간 동네 할매가 되었다. 하기야 내가 할매 나이다. 일찍 결혼한 친구 중에는 손주를 두어 진짜 할매가 된 사람도 있다. 세월은 이렇게나 빠르다.오늘의 할매는 젊다. 순전히 내 기준으로. 나보다 열 살쯤 위려나? 그런데 십오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이가 할매인 줄 알았다. 구십 도로 굽은 허리 탓이었다. 그이는 동네에 새로 이사 온 내가 싹싹하게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구한 유모차를 보행기 대신 밀고 집과 논밭만 부지런히 오갔다. 동네 마실도 다니지 않았다. 체구도 자그만 양반이 보릿고개 있던 시절의 소처럼 잠시도 쉴 틈 없이 일만 했다. 일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하도 경이로워 언젠가 걸음을 멈추고 오래도록 지켜본 적이 있다. 고추밭의 풀을 매는 그이의 동작이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부드럽고 ...

    2025.02.2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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