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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되지 못한 할매
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 남자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잘생기진 않았던 모양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히지 않았던 걸 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여학생들 앞에서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교문 옆에 서 있었다. 내 운동화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번쩍 고개를 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속절없이 환한 미소가 기이해서 그 장면이 각인되었을 것이다.“못 알아보겄냐? 나는 단박에 알겄는디. 외삼촌을 쏙 빼닮았다이.”아버지를 외삼촌이라고 부른다면 필시 고모의 아들일 터였다. 내가 아는 고모는 셋, 그 자손들 중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문득 할머니가 말끝마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죽은 고모가 기억났다. 나는 그 고모를 아주 어려서 딱 한 번 보았다. 대여섯 무렵, 여느 때처럼 할머니 모시고 살던 작은집에 놀러 갔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만 나면 작은집으로 달려갔다. 몇살 터울 나지 않는 애들이 셋이나 있어 작은... -
넘의 묏등(묘)이라도
시인 류근은 잘생겼다. 잘생긴 주제에 심지어 동안이다. 뱃살도 없다. 뿐인가. 돈도 많다. 그런 주제에 시인답게 외로움을 탄다. 전화만 하면 외롭단다. 질투에 눈먼 나는 매번 냉정하게 쏘아붙인다.“우리 치타(나의 사랑스러운 똥개)도 외로워. 꺼져!”시인만 외로운 게 아니다. 나의 서울 친구들은 전화만 하면 하소연이다. 서울 것들은 늘 외롭고 뭔가가 부족하고 뭔가가 억울하다. 이상도 하지. 가진 것 없는 시골 할매들은 하소연을 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지난 세대인데도 그렇다.구례 한 할매는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말을 걸자 할매는 아이고, 나 까짓거이 먼 할 말이 있가니요, 부끄럼을 타며 고개를 돌렸다. 슬며시 두유 한 팩에 빨대를 꽂아 건넸다. 다 마신 두유에서 뽁뽁 소리가 날 무렵 할매는 물었다.“월매나 들을라요?”고향살이 십여년, 나도 이제 눈치가 늘었다. 얼마나 들으려냐는 할매의 말은 그러니까... -
날쌘돌이 큰어매
어느 봄날의 풍경 하나. 아마 어린 날의 기억인 것 같은데 내가 어디에서 이 풍경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큰집의 넓은 뜰 안쪽에만 봄볕이 가득하다. 아마 이른 아침인 모양이다. 반내골은 앞뒤 산이 가팔라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전형적인 산골이었다. 암탉 한 마리가 샛노란 새끼 10여마리를 거느린 채 종종걸음으로 어둔 그늘을 벗어나 봄볕 쪽으로 이동한다. 신기하기도 하지. 닭은 부리며 발이며 참으로 못생겼는데 병아리들은 몇달 뒤의 역변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여쁘다. 암탉은 햇볕 좋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제 조금 자라 엄마 품을 벗어난 병아리들은 엄마 몸에 기댄 채 자울자울 잠을 청한다. 거기서 머지않은 펌프 옆, 큰엄마가 볏짚 몇 가닥에 양잿물을 묻혀 타구(唾具)를 닦고 있다. 여느 때처럼 큰엄마는 눈·코·입이 오종종한 작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속사포처럼 혼잣말을 내뱉는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지 않는데 중간중간 썩어빠질, 염병 같은 욕설이 들린다. 큰엄마... -
우리 동네 미친 할매
내 고향 마을엔 미친년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시절엔 동네마다 미친년이 한 명씩 있었다. 신기하게 미친놈은 잘 없었다. 여성이 몇 곱절은 더 힘들었던 시절이라 그랬을 테지 짐작한다. 미친년이라 표현하는 것을 부디 양해하시길. 야만의 시대를 옹호하려 함이 아니니까.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폭로하기 위함이니까.우리 동네 미친 할매에게는 택호가 없었다. 첩이었던 복이 어매처럼 자식의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다. 자식이 셋이나 있었는데도. 이름이든 뭐든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몇 군데 전화를 해봤다.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었다는 것 외에 자식의 이름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향에 내내 살지도 않았던 내가 그이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신기해했다.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첩보다도 종보다도 더 낮은 존재였는데. 아니,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닌 존재였는데.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던 할매는 지금 생각해보니 내 부모 또래였지 싶... -
복이와 복이 어매
어느 여름밤이었다. 등나무 덩굴 우거진 교정에 우뚝 버티고 선 복이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두어 해 전만 해도 덩치가 비슷했는데 복이는 그새 훌쩍 자라 소년이 되어 있었다. 어두웠지만 나를 노려보는 날 선 눈빛의 기운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깡패들하고나 어울리고, 자알하는 짓이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그러면 안 되지!”복이 엄마는 삐뚤이 할매가 녹동을 떠도는 사이 할매의 자리를 차지한 첩이었다. 첩이라 그랬는지 복이 엄마는 택호도 없어 복이 어매라 불렸다. 본처 자식들처럼 복이라는 돌림자로 이름을 지었지만 복이 첩의 자식이라는 것을 온 동네가 다 알았다. 복이는 제 엄마를 닮아 순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갈 때도 복이는 우는 여자애를 다독이던 순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깡패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듣고 방학 때 고향에 다니러 온 내가 오지랖 넓게 복이를 불러낸 것이었다... -
삐뚤이 할매
작년 가을, 여행기 청탁 때문에 고흥에 갔다. 늦가을인데도 들풀은 새파랬고, 햇볕이 따가웠다. 녹동이란 표지판을 보고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삐뚤이 할매. 입이 홱 돌아갔다고 삐뚤이 할매였다. 젊어서는 구례서 내로라하는 미인이었다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할매는 이미 삐뚤이인 데다 늙어 미(美)를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입 돌아간 할매였을 뿐.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내가 삐뚤이 할매를 잊지 못한 것은 언젠가 누구에겐가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할매는 꿈에도 기다리던 아들을 낳고 입이 돌아갔다. 입만 돌아간 게 아니다. 눈썹과 머리가 다 빠지고 살이 짓물렀단다. 다들 문둥병이라고 했다. 문둥이가 흔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야멸차게 갓난아이를 떼내고 할매를 쫓아냈다. 할매가 갈 곳은, 아니 할매를 받아줄 곳은 소록도뿐이었다. 고속도로도 없고 버스도 흔치 않던 시절, 할매는 병든 몸으로 걷고 또 걸어 소록도로 갔다. 문둥병인 줄 알았으니 사람의 눈을 피해 걸었을 게다.... -
할매가 된 엄마
내가 아는 최고령의 할매는 엄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내 엄마도 할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엄마는 할매가 아니고 그냥 엄마였으니까.내 엄마는 1926년생, 올해 98세다. 구례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우리 엄마가 그 세대 중 고생으로는 상위 0.1%에 들 거라 확신했다. 1948년 겨울부터 1954년 봄까지 지리산에서, 체포된 이후 7년간 감옥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경험하지 않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마흔이 다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 가난과 산에서 얻은 위장병이 천형처럼 찰싹 들러붙은 엄마의 삶은 내내 고달팠다. 노년에는 고된 노동으로 척추협착증까지 얻었다. 구례 내려와 알았다. 시골 할매치고 엄마보다 고달프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 시대의 누구나 엄마만 한, 때로는 엄마보다 더한 삶의 무게를 견뎌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엄마가 아픈 추억을 들먹일 때마다 나는 야무지게 엄마 말을 뚝 잘랐다.알고 보니 ... -
운조루 종부 할매
구례에는 영조 52년에 지어진 고택 운조루가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뒤주로 유명한 집이다. 운조루의 주인 유씨 가문은 1년 소출의 20퍼센트인 쌀 서른여섯 가마니를 이 뒤주에 넣어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가져가도록 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유씨 가문의 종부, 이길순 할매다.나는 이 할매를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처음 만났다. 전국의 명문가를 찾아다니며 그 집만의 특별한 요리를 소개하는 프로였다. 멋진 고택에 어울리는 멋진 요리가 줄줄이 나왔다.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도 품격 있는 집안에서는 저렇게 손 많이 가고 귀한 음식을 해먹었구나, 어쩐지 배알이 꼴리는 것도 같았다. 구례 운조루라는 자막이 뜨더니 허리 질끈 묶은 일복 차림의 할매가 촬영팀을 끌고 밭으로 향했다. 할매는 볏짚을 걷어내고 괭이로 언 땅을 파헤치더니 무릎 꿇은 채 땅속 깊이 손을 넣었다. 할매는 그날, 유씨 가문의 별식이라며 겨울 무에 돋아난 연둣빛 싹을 잘라 데치고 무쳤다. 다... -
죽도 않고 늙어가는
유난히 비가 많은 겨울이었다. 그래도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고, 매화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렸다. 매화만 보면 나는 한동떡이 생각난다. 한동떡은 한센떡, 그러니까 훗날 장센떡이 된 이의 시어머니였다. 왜 한동떡인지는 잘 모른다. 아마 시집오기 전 살던 동네가 한동이었을 테지.같은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았지만 나는 한동떡을 자주 보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동떡은 주로 논밭, 아니면 산에 있었고,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집 밖 걸음을 잘 하지 않았다. 예전에 대보름날 밤이면 동네 논에서 달집을 태우곤 했다. 동네 사람 다 모인 흥겨운 자리에 종 출신인 한센 내외와 음전하기로 소문난 한동떡, 몸 약한 우리 엄마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무동 태운 채 아버지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달집 주변을 뛰었다. 아버지의 걸음이 빚어낸 리듬은 흥겨웠고, 높이 솟은 보름달은 어쩐지 처연했다. 음전해서, 몸이 아파서, 종의 자손이라서 이 흥겨운 ... -
한센떡, 장센떡
어린 나는 늘 한센네가 궁금했다. 동네 사람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집, 동네서 유일하게 장을 담그지 않는 집, 장판 대신 가마니를 깔고 사는 집, 커다란 똥개와 함께 먹고 자는 집. 한센은 대대로 우리 집안 종이었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담장 너머 신작로까지 굵은 가지를 뻗친 채 주렁주렁 익어가는 그 집의 양자두 맛이 제일 궁금했다. 우리 동네에 양자두라곤 한센집의 딱 두 그루뿐이었다. 조선 자두보다 두 배는 크고 새빨간 양자두는 어쩐지 손대면 안 되는 금단의 물건 같기도 했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양자두가 탐나서 홀린 듯 바라본 적도 있었다. 우연히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한센과 눈이 마주쳤다. 한센은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한센떡도 그랬다. 내 부모 연배쯤 되었을 그들은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머리를 조아리고 살금살금 걸었다. 계급이 사라진 지 오래건만 그들은 여전히 조선시대를 살고 있는 듯했다. 한센은 말없이 가장 크고 잘 익은 자두 세 개를 따서 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