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더 나은 여성연대를 위한 걸음

한의진 | 대학생(영어영문학 전공)

어떤 글들은 쉽게 쓰이지 않는다. 확실한 신념이 있고, 함께하는 이들 사이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 논란, 남성 혐오 사냥, 정치인들의 페미사이드가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며, 숨겨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논리와 근거로 무장하며 여성 혐오와 차별에 관해 이야기해도, “너 페미야?”라는 질문에 여성의 주장은 무력해진다.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가치 있는 일이다. 침묵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의진 | 대학생(영어영문학 전공)

한의진 | 대학생(영어영문학 전공)

‘노란 벽지’의 저자 샬롯 퍼킨스 길먼은 19세기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였다. 그는 작품에서 여성연대와 그토록 바라왔던 가부장제의 전복을 암시하기도 했다. 길먼은 출산 이후 산후우울증을 겪으며 여성의 고통에 대한 의학계와 주변의 현실을 직시했다. 이후 그는 남편과 이혼하고,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작품 중 노란 벽지는 이러한 경험을 담은 단편 소설로, 강렬한 묘사와 흡입력으로 독자들을 몰입시킨다.

‘노란 벽지’는 한 부부가 교외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성은 의사인 남편에게 산후우울증과 히스테리 증상을 진단받는다. 남편은 여성의 지적인 활동을 제한하고 절대적 안정만을 강요하며 ‘휴식 치료’(rest cure) 요법을 사용한다. 넓은 저택에서 여성은 노란 벽지가 붙어 있는 방에서 지내게 된다. 여성은 남편의 감시와 가스라이팅에도 불구하고 몰래 글쓰기와 공상을 하는데, 그에게 이 벽지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그는 벽지 안에 여성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벽지 안의 여성을 동일시한다. 그는 벽지 속의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벽지를 마구 떼어내고, 자신의 광기에 잠식된다. 그런 모습에 남편은 충격으로 쓰러지는데, 여성은 쓰러진 남편을 넘어서며 바깥세상에 자유로워진, 참된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소설 속 주인공은 광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벽지 속 수많은 여성과 연대하며 가부장제를 전복하는 한 걸음을 내디딘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불완전함을 안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여성은 남성과 비교해 우울증의 대표 원인으로 지목되는 세로토닌의 고갈이 더 쉽게 일어난다. 세로토닌은 신경전달물질로, 부족해질 경우 우울증이 발생할 수 있다.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받고 생활하는 남성과 달리, 생존권부터 지켜야 하는 여성이 받는 스트레스는 안전의 욕구 불충족에 의해 발생한다. 이는 남성에 비해 스트레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보여준다.

여성 우울증의 원인은 모두 다르지만, 여성연대 부재와 남성 중심의 의학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남성의 우울이 사회문화적으로 설명되는 것에 반해 여성의 우울은 배경을 삭제하고 성호르몬으로만 분석된다. 또한 여성연대를 비하하거나 거부하는 사회에서 동료 없이 우울감을 견뎌내는 것은 어렵다.

우울감을 해소하고 성취로 이어나가기 위한 연대는 중요하다. 가부장제의 전복을 위해서는 개인의 힘이 아니라, ‘노란 벽지’의 주인공처럼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목소리를 키우고 발언권을 얻어야 한다. 사회가 정한 ‘정상적인 여성’의 범주 안에 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비정상성을 인정하고 연대함으로써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맨발로 안개 낀 산을 오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다니는 산길은, 어느새 새로운 길이 되어 평평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남들이 다져둔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의 용기 있는 걸음이 후대의 여성들에게 힘이 된 것처럼, 우리의 연대가 우리에게만 그치지 않고 더 크고 당당한 미래의 여성들에게도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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