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협소한 법 해석에 좌절된 56년 만의 ‘혀 절단 사건’ 재심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처벌받은 최말자씨(75)가 56년 만에 청구한 재심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는 18일 “청구인이 제시한 증거들이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로운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어 재심이유가 없다”며 최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결정문 말미에 1000자가량의 의견을 덧붙여 “오늘날과 같이 성별 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가치로 실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청구인을 감옥에 보내고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씨의 청구 취지는 받아들이지만 법적인 한계로 재심을 기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56년 만의 미투’로 세간의 큰 관심을 모으며 법원 판결에 눈길이 쏠렸다. 1964년 만 18세였던 최씨는 노모씨(당시 21세)가 성폭행하려 하자 이를 피하려 그의 혀를 깨물었다. 노씨는 최씨를 상해죄로 고소했고, 검찰은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최씨를 구속했다. 그리고 법원에서 중상해죄가 인정돼 최씨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노씨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만 적용돼 최씨보다 가벼운 형을 받았다. 당시 법원은 노씨에게 길을 안내한 최씨의 행동이 성폭력을 시도하게 된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검찰은 수사과정에서도 “피고인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 “결혼할 생각은 없는가” 등 2차 가해를 가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법 적용이다.

최씨는 사건발생 56년이 되는 지난해 5월 미투 운동에 용기를 내 여성단체들과 공동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날 잘못된 법적 처리를 바로잡아달라는 최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원판결에 오류가 없다고 판단했다.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결정이 못내 안타깝다.

지난 9일 검찰은 성폭행하려는 남성에게 저항하다 혀를 절단한 사건에서 가해자는 구속 기소한 반면, 여성 피해자는 정당방위를 인정해 불기소했다. 재심 청구에서 법률을 엄격히 적용해야 하는 법원의 처지를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번 결정은 법률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방위에 대한 국내의 대표적 사건에서 진전된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은 유감스럽다. 최씨는 항고장을 제출하기로 했다. 가해자로 뒤바뀐 56년 삶의 억울함을 밝히겠다는 최씨의 용기는 반드시 응답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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