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도쿄의 ‘戰雲’

<송충식 논설위원>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가르쳐 주세요.”

독일 패망을 목전에 두고 총살당한 레지스탕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의 ‘역사를 위한 변명’ 첫머리다. 동북아에 몰아치는 ‘역사전쟁’의 광풍을 지켜보면서 문득 ‘변명’의 이 유명한 서두가 떠오른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역사의 존재이유는 과연 무엇이며, 미래의 주역인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촉발된 동북아 3국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는 민족감정 대결로 치닫고 있다. 중국의 반일(反日) 운동은 1919년 5·4운동의 재판 가능성이 제기될 만큼 확산일로에 있다. 일본은 당혹해하면서도 ‘우리가 피해자’라며 고압적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그 바람에 정작 불길을 댕긴 한국은 뒷전으로 밀려난 듯 묘한 입장이다.

-동북아3국의 민족주의 갈등-

민족주의가 21세기 초 동북아의 최대 갈등요인으로 대두하고 있다. 혹자는 제국주의와 저항 민족주의가 충돌한 19세기말~20세기초를 연상하며 ‘역사의 반복’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100년 전과 지금의 동북아 정치지형은 크게 다르다.

우선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넘보기 어려운 ‘국력’을 갖췄을 뿐아니라 경제·문화적 ‘상호의존’도 심화된 상태다. 또 한가지는 국가를 이끄는 정치세력과 시민사회의 주류가 ‘과거’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는 전후세대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미래지향적이지만 ‘과거회귀’에 대해서도 그다지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잃어버린 10년’의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의 공허감을 ‘과거의 회귀’ ‘자학사관 탈피’로 달래주고 있는 것이 우경화 일본의 현주소다.

중국은 근세 이래 청·일(淸日)전쟁, 난징학살, 중·일(中日)전쟁 등으로 반(半)식민상태의 고초를 겪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반일운동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그 폭발성은 중국 지도부도 우려하는 바다. ‘경제대국’의 자신감, ‘과거의 치욕’을 만회하려는 중화민족의 열망, 톈안먼 사태 이후 억눌린 민중의 의사표현 욕구 등 복합적 요인이 ‘애국주의’ 형태로 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역시 월드컵 이후 고양된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은 대통령까지 ‘할 말 하겠다’고 나설 만큼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한·중·일 3국은 저마다 이제야말로 국제사회와 국민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받겠다고 벼르는 형국이다.

‘역사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일본의 오판(誤判)이다. ‘가해자’ ‘패전국’의 열등감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앞선 나머지 이웃 나라의 변화된 사정을 체감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근세이전만 해도 조공(朝貢) 체제하에 주변국을 거느렸던 ‘제국’이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 대신 중화 민족주의에 입각한 거대한 역사재편을 감행하고 있다. 고구려인은 물론 칭기즈 칸까지 중국인화하는 것이 오늘날 그들의 역사인식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동북아 민족주의의 장래를 냉정히 생각해볼 때다. 민족주의의 강화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게임’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필요도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우리 나름의 ‘열린 민족주의’를 모색하며 동북아 시민사회의 연대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자국사 중심 배타적 사고 극복-

‘민족주의’란 양면성을 갖는 개념이다. ‘집단주의’로 자기의 약점을 은폐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열풍이 각국의 정치적 성숙과 시민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면 동북아의 미래는 암담하다. 빈부격차, 계층갈등, 이념갈등 등 내부의 모든 갈등요소도 이 민족주의 해일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동북아 3국이 자국사(自國史) 중심의 편협한 시야에서 벗어나 평화공존과 상호이해를 위한 열린 민족주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시민사회가 압력을 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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