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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갑자기 별나라에서 왔나
4시간 뒤 나온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이 없었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4·10 총선 결과를 모르고 있나라는 의구심이 들 뻔했다. 총선 엿새 뒤 발표된 윤 대통령의 12분짜리 공개 입장 표명은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상투적 표현을 빼면 이렇게 요약된다. ‘국정 방향은 옳았다. 최선도 다했다. 그러나 국민들이 변화를 느끼지 못한 건 내 책임이다.’ 여당이 총선에서 이겼더라면 겸손함을 보여줬을, 괜찮은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여당은 처참하게 졌다. 역대 대통령처럼, 자포자기 심정으로 “역사는 나를 평가해줄 것”이라는 임기 말 ‘역사와의 대화’ 증상이 시작됐다고 보일 순 있겠다.윤 대통령은 야당에 과반 의석을 내준 첫 대통령으로 정치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 오욕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납작 엎드려 살려달라고 해도 시민들의 성난 마음이 풀릴까 말까 한데, 자기 마음을 몰라줘 억울하다는 투다. 국민의 염장을 지르는 그의 말에 절박함은 읽히지 않았다. 총선 이튿날 대통... -
어제도 오늘도,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국민이다
연말 예비후보자 등록, 지난달 22일 후보 등록 이후 길게는 4개월, 공식 운동 13일의 총선 레이스가 끝났다. 유권자들은 그동안 출퇴근길에서, 시장에서, 공공장소에서 후보와 운동원들의 수많은 인사와 악수, 명함을 받기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 한번만 일할 기회를 달라, 반성하겠다, 회초리를 들어달라, 정권을, 야당을 심판해달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어쩌면 큰절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엎드려 절 받기, 4년 중 반짝 주인 노릇이다. 이제 확성기는 꺼졌다. 거리의 후보들도 이젠 예전의 일상으로, 다시 만나기 힘든 정치인들로 돌아갈 것이다. 제22대 총선 성적표가 발표된 오늘, 4월11일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자,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공포된 날이다. 105년 전 오늘 공포된 임시헌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이다. 전제왕권국가에서 민주공화국으로의 획기적인 정부체제... -
한은 돌봄 보고서가 말하지 않는 것
한국은행이 지난달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 보고서를 공개했다. 돌봄 인력 부족과 비용 부담에 대처하기 위해 이 일을 이주노동자에게 맡기고 임금을 낮추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경제학자인 한은 총재가 힘을 실어준 이 보고서는 노인·육아 돌봄을 모두 다루는데, 핵심은 노인 돌봄에 있다. 육아 돌봄은 상대적으로 인력 부족이 덜 심각하고 가정과 사회, 국가가 어떻게든 감당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노인 돌봄은 어느 주체도 흔쾌히 떠맡지 않으려는 현실이 보고서에 녹아 있다.앞으로 점점 더 돌봄 인력이 모자랄 것이라는 통계 전망에 전문가들도 수긍하는 것 같다. 게다가 한국은 노인 빈곤율이 40.4%로 매우 높다. 현 상태를 방치하면 피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사회가 직면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하지만 한은의 처방은 실망스럽다. 저자들은 개별 가구와 이주노동자의 사적 계약을 통해 최저임금 적용을 우회하거나, 돌봄을 고용허가... -
‘바보’ 박용진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멤버다. 2011년 범야권 대통합 물결에 몸을 실었다. 혈혈단신으로 진보신당을 떠나 민주당원이 됐다. 민노당 후보로 두 번 총선에서 낙선한 박용진은 민주당 간판을 달고 20·21대 국회의원이 됐다. 20대 국회에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4조원대 차명계좌 문제를 제기해 당국이 과세하도록 하는 등 재벌 저격수로 불렸다. 비리 유치원 명단을 공개했다. 국회를 통과한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의 별칭은 ‘박용진 3법’이었다. 법안에 의원 이름 붙는 거, 흔치 않다. 21대 총선 서울 득표율 1위는 그냥 된 게 아니었다.박용진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민주당의 97세대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에겐 계파와 세력이 없었다. 친문재인·친이낙연·친이재명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늘 비주류, 이질적인 존재였다. 관계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발언도 소신껏 했다. 여기저기서 펀치가 날아왔다. 여당 시절 조... -
‘총선용 의료대란’, 결자가 해지하라
이번엔 의사다. 대통령의 칼끝이 이제 의사들을 향하고 있다. 사교육, R&D에 이어 의사까지. 자칭 ‘반카르텔 정부’의 칼바람은 거침이 없다. 현 정부의 장기인 압수수색과 출국금지, 행정처분, 고발 등 법적 조치들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의사 증원 발표와 전공의들의 잇단 사직으로 촉발된 의료대란 3주째.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들의 잇단 재계약 포기, 의대 교수들의 사직 움직임 등으로 진짜 의료대란은 지금부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달 6일, 갑자기 튀어나온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방안 발표가 현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의료계와 정부의 강 대 강 대치 속에 치료와 수술 지연에 따른 유산, 사망 등 극단적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보건위기나 전쟁 상황도 아닌데,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난데없는 의료대란에 시민들은 황당할 뿐이다. 꼭 이 시점에, 이런 방식의 속도전에 나서야 하나? 정부·여당 입장에서는 꼭 이래야만 했던 것 같다... -
숫자 너머 사람을 보라
통계청의 ‘2023년 연간 산업활동 동향’을 보면 지난해 소매판매액지수는 전년 대비 1.4% 감소했다. 내구재(0.2%)는 소폭 늘었지만 음식료품 등 비내구재(-1.8%)나 의복 같은 준내구재(-2.6%) 판매는 급감했다. 지난해 개인회생을 신청한 자영업자는 전년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었다. 개인사업자의 저축은행 대출 연체율은 2022년 4분기 3.31%에서 지난해 3분기 7.49%로 올랐다.정부와 금융당국이 발표하는 숫자는 추상적이다. 그 자체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숫자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봐야 한다. 통상 소매판매액은 매년 증가한다. 이것이 전년도보다 감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자영업자들이 대거 시쳇말로 ‘폭망’했다는 의미다.필자가 사는 서울 서대문구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식육점이 얼마 전 폐업했다. 식육점 맞은편에 있는 무한리필 고깃집도 불이 꺼졌다. 코로나19 사태 전엔 와이셔츠 등 남성 의류를 팔던 가게였다. 그 뒤로 횟집... -
손흥민의 ‘캡틴 리더십’
기적은 세 번 연속 일어나지 않았다. 참담한 완패였다. 한국 축구가 7일 요르단에 0-2로 패해 아시안컵 4강에서 떨어졌다. 골키퍼 조현우의 선방이 없었다면 3골쯤 더 내줬을 판이었다. 유효슈팅 ‘0개’ 기록이 말하듯 변변한 득점 기회를 단 한 번도 만들지 못했으니 밤잠 설치며 경기를 지켜본 축구 팬들이 분통을 터뜨릴 만했다.허탈한 마음인데도 팬들은 주장 손흥민의 소감을 기다렸다. 그의 간절했던 노력을 익히 알고 있어서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 나온 그는 큰 한숨을 내쉰 뒤 “팀을 위해 희생해준 동료들이 고맙다. 많은 응원 해주셔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기대했던 모습을 못 보여드려 국민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귀에 박히는 말을 보탰다. “내가 많이 부족했다. 나를 질책하기 바란다. 동료 선수들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손흥민은 남 탓을 하거나 핑계대지 않았다. 실패의 책임을 모두 제 탓으로 돌리고 동료들을 감쌌다. 연장전 2번 포함해 총 6... -
너무나 비과학적인 ‘R&D 예산 난장판’
새해 과학계에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후폭풍의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각 대학과 연구소에는 20%, 50%, 90% 등 일괄 예산 삭감 공문이 줄지어 도착하고 있다. 정부 약속만 믿고 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중소기업 4000여곳에 비상이 걸렸다는 뉴스가 나오고 출연연구기관 통폐합 추진이라는 흉흉한 얘기가 돈다. 70억원 예산이 없어 미국이 제안한 유인 달 탐사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의 한국 큐브 위성 탑재를 거절했다는 뉴스도 심란함을 더한다. 연구비가 깎여 일자리를 잃거나 심각한 수준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과학자들(특히 박사후 연구원, 비정규직 연구원 등)은 최악의 명절을 맞게 됐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다른 진로를 모색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2024년, 한국 사회는 국가부도 상황이었던 IMF 외환위기 때도 없었던, 33년 만의 첫 R&D 예산 삭감이라는 역사적인 해를 지나는 중이다.“정부 지출 대비 R&D 예산 5% 유지”는 2022년 출범 ... -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싫다’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젊은 여성들은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죄와 벌)라는 구절을 소환하며 김수영을 여성혐오 시인의 첫 줄에 세웠다. 반면 2013년 무렵 ‘안녕들 하십니까’ 릴레이 대자보가 나붙던 시절엔 언론자유를 다룬 그의 시(김일성 만세)를 패러디한 글이 쏟아졌다.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4·19 혁명과 반동을 겪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포로수용소에 2년이나 갇혔던 자신을 친공 포로도, 반공 포로도 아닌 민간 억류인이라 했던 것처럼. 적당히 뭉개지 않고 평생을 시대의 이분법과 싸운 현재진행형의 시인 김수영은 그래서 가장 정치적인 시인으로 꼽힌다. 화룡점정은 1964년 발표한 ‘거대한 뿌리’다.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이후 혼란과 불안이 난무한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근대화로 가는 산뜻한 출발을 위해 내치고 없애야 할 목록을 만들었고 이를 반동으로... -
전두환의 교육개혁
조직에서 성과를 내는 방법의 하나는 상관과의 협력이다. 상관의 관심사를 파악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보고서를 적절한 시점에 들이미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재자 전두환의 영향력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은 일군의 교육학자와 관료가 아닐까 싶다.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로 주권을 찬탈했지만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불안했다.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민의 환심을 사려면 뭐든 해야 했다. 당시에도 학부모들은 자녀 과외비 때문에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과외만 잡아라, 그러면 대통령도 시켜준다”는 게 민심이었다. 군인들은 무지막지했다. 전 국민 과외금지를 추진하기로 했다. 고교 수준을 넘어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모든 대학을 평준화하는 방안까지 구상했다. 교육개혁을 꿈꾸는 학자와 관료에겐 기회였다.1980년 5월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출범했다. 국보위는 입법·사법·행정부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기구였다. 반대하는 야당도, 시비를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