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범도 장군을 뵙고 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을 뵙고 왔다. 지난달 말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주최한 ‘홍범도 장군과 함께 걷다: 중앙아시아 역사 기행’은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노년의 발자취와 고려 동포들의 강제이주 현장을 따라 걸으며 배우고 느낀 여정이었다. 뜻밖이었다. 한 맺힌 슬픈 기행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큰 힘을 얻고 돌아왔다. 우리 선조들의 뜨거운 삶의 의지와 피땀 어린 불굴의 노력, 조국 독립에의 염원 등을 확인한 기회였다.1937년 스탈린은 당시 소련의 극동지방인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집단 이주시켰다. 만주사변의 후폭풍 속에 연해주의 한인들이 일본인과 구분이 안 돼 첩자로 활동할 수 있다는 기막힌 이유에서였다. 17만1700여명이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이송됐다. 30~40일간 6000~7000㎞를 이동하는 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생활했을지 그 비참함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기차를 타던 중 1만여명이... -
대통령의 자격, ‘미미미미’ 대 ‘유유유유’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 민주당과 공화당은 대규모 전당대회를 열어 자당 대선 후보를 공식 지명한다. 전당대회는 대체로 나흘간 진행된다. 찬조 연설자들이 분위기를 달구고, 사흘째 부통령 후보 연설에 이어, 마지막날 대통령 후보가 수락연설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는 지난 19~22일(현지시간) 시카고에서 열렸는데, 셋째날 무대에 오른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연설에 눈이 갔다.클린턴은 “다음에 도널드 트럼프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거짓말이 아니라 나(I)를 몇번 말하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무대에 오르기 전 ‘미(me·나), 미, 미, 미’라고 노래 부르며 시작하는 테너 가수 같다”고 했다.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해선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면 매일 ‘유(you·당신), 유, 유, 유’로 시작할 것”이라고 대비시켰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트럼프와 “모든 미국인이 꿈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줄” 해리스 중 누가 대통령의 자... -
‘한·미·일 동맹’의 허약한 기반
파리 올림픽과 사도광산 뉴스에 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사건이 있다. 지난달 28일 도쿄에서 한국·미국·일본 국방장관이 ‘한·미·일 3자 안보협력 프레임워크 협력 각서’에 서명한 것이다. 3국 국방장관이 일본에서 모인 게 역사상 처음이고 한국 국방장관의 방일은 2009년 이후 처음이다. 3국은 “한반도, 인도·태평양, 그리고 그 너머”에서 “안보협력을 제도화”하기로 했다. 1년 전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실행 계획이다. 한국 측 서명자 신원식 장관(이후 국가안보실장이 됐다)은 “3국이 표준작전절차(SOP) 합의에도 거의 이른 상태”라고 말했다. SOP는 효율적 작전 수행을 위한 단계별 지침이다. 이로써 한국군이 대만해협,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의 분쟁에 끌려들어갈 구체적 근거가 마련됐다. 사실상 ‘한·미·일 군사동맹’의 완성이다. 중요한 문서임에도 정부는 국회 동의를 받기는커녕 원문 제공도 하지 않았다.1년6개월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속전속결 처리된 데... -
한동훈의 돌이킬 수 없는 길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당권→대선 후보→대권’이란 3단계 대선 프로젝트의 첫 관문을 통과했다. ‘한딸’로 불리는 팬덤도 생겼다. 특히 용산과 친윤의 배신자 프레임 공격을 뚫고 득표율 63%란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의미는 크다. 당원과 보수 지지층에서도 윤석열 대통령과 한 대표는 분리됐다. 하지만 대권가도가 장밋빛 전망은 아니다.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를 상대하러 가기 전에, 그의 앞에 서 있는 윤 대통령을 넘어야 한다.한 대표의 전당대회 메시지를 압축하면 ‘국민 눈높이’다. “배신하지 않을 대상은 대한민국과 국민”이라는 말도 강렬했다. 윤 대통령으로 향하는 채 상병 특검법 찬성, 수평적 당정관계는 이를 상징하는 약속이었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돌지 않았는데도 정권 말기적 현상을 보이는 윤 대통령과의 차별화는 불가피했을 것이다.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이 충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현직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을 만들 순 없어도 대통령이 안 되게 ... -
정답을 비켜가는 저출생 대책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 다 정리된 얘기들이 다시 나오는데… 1990년대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요.” 한 유아교육·보육 전문가의 말이다. 지난달 19일 정부의 ‘인구 국가비상사태’ 선언 이후 한 달간 나온 저출생 관련 정책들을 보며 든 내 심정 역시 그랬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서비스가 서울시에서 시범운영된다. 서울시는 다음달 6일까지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서비스 이용 신청을 받아, 9월부터 6개월간 전일제(8시간), 시간제(4시간·6시간)로 서비스를 시행한다. 만 24~38세의 필리핀 국적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전문취업비자(E-9)를 통해 들어오는데 100명 규모 시범사업으로 시작해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시간당 1만3700원으로 하루 8시간 기준 월 238만원가량이 든다. 고용노동부는 내년 상반기 중 전국에 1200명까지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인 유학생에게도 가사돌봄 활동을 허용할 방침이다. 지난달 27일엔 교육부가 어린이집·유치... -
바이든을 날린다고 한들
‘바이든-날리면’ 논란이 좀 이상하게 현실화됐다고 해야 할까. 뉴욕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가 사설 등을 통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민주당 대선 후보 사퇴를 요구했다. TV토론에서 바이든이 보인 노쇠함을 이유로 들었다. 민주당 내 사퇴 요구가 이어졌지만 바이든은 거부했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사건으로 두 사람이 대비되며 바이든 사퇴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더 많은 사람의 열망을 담아내는 데 정치인의 나이와 건강은 중요하다. 트럼프가 사기꾼, 선동가인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영미권 주류 언론의 사퇴 요구에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런 요구가 정말 민의를 대변하는 것일까. 그게 좋은 언론의 역할일까.두 매체가 지난 수십년간 앞장서 설파한 가치가 트럼프 현상을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을 성찰하지 않고, 단지 좀 더 젊은 후보로 트럼프 집권을 막겠다는 정치공학의 한계를 짚고 싶다.2016년 이후 트럼프 현상은 최근 유럽의 극우정당 약진과... -
김용원·이충상은 어떻게 인권위원이 됐나
국가인권위원회에 두 명의 별종이 있다.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이다. 이들의 언행은 기이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지경이다. 두 사람 때문에 인권위에선 연일 난장이 벌어지고 있다.김 위원은 군인권보호관을 겸직한다. 군인권보호관은 상습적 가혹 행위로 사망한 윤승주 일병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윤 일병 유족들이 재조사해달라고 낸 진정을 각하하고, 항의하는 유족들을 고소했다. 지난해 8월에는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건을 조사한 박정훈 전 수사단장이 국방부의 압력에 긴급구제 요청을 했지만, 일방적으로 기각했다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됐다. 김 위원이 기각 결정 보름 전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과 통화한 사실도 밝혀졌다. 김 위원은 인권위 회의 석상에서 송두환 인권위원장에 “버릇없다”고 하고, 인권단체를 “인권 장사치”라 폄훼했다. 고위 공직자의 품위, 인권위원의 품격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이 위원의 혐오발언도 다 나열하려면 숨이 차다. 그는 “기저귀를 차고 ... -
불통과 불신, ‘윤석열식 의료개혁’의 끝은?
의사들의 대규모 휴진에 정부는 업무개시명령, 면허 정지, 구상권 청구 검토 등 또다시 강수를 빼들었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추가 휴진을 예고하자 정부는 의협 해체까지 거론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 규모 발표(2월6일) 이후, 전공의들의 집단사직(2월19일)으로 촉발된 소위 ‘의료대란’ 사태가 만 4개월을 지나고 있다. 극한 대치가 이어지면서, 환자와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불신, 불통, 절망, 분노… 지켜보는 시민들도 함께 ‘집단 울화병’을 앓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암담함이다.이 모든 사태는 느닷없는 정부의 ‘2000명’ 증원 밀어붙이기에서 시작됐다. 정부는 향후 5년간 2000명씩 의대 정원(현재 정원 3058명)을 늘려 1만명을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은 총선 직전까지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조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 번 시사했다. 그러나 총선 이후 정부는 2025학년도 의대... -
힘에 의한 평화, 그 힘은 누가 낼까
얼마 전 육군 신병교육대에서 훈련병이 수류탄 사고로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20대 때 악몽이 떠올랐다. 훈련소에서 처음 수류탄 안전핀을 뽑으며 느꼈던 극도의 긴장감과 불길한 상상 말이다. 수류탄은 적절한 시점과 장소에 투척하지 않으면 내 주변에서 터지거나 상대방이 집어서 다시 던질 수 있는 무기이다. 근접전에서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하고 던진다는 점에서, 어쩌면 ‘인간적인’ 무기라고 할 수도 있다.각종 ‘무인’ 첨단무기가 전시되는 시대에 이 재래식 무기를 쓸 일이 있을까. 도도한 탈냉전 분위기 속에 군 생활을 한 나는 거의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질문에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와 중동, 그리고 오물 풍선을 뒤집어쓴 우리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한반도가 또다시 전쟁 위기를 맞고 있다. 언젠가부터 남쪽에 보수정부가 서면 꼭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놀랍지 않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른 점이 있다. 유난히 많은 장병의 죽음 속에 맞는 위기라는 점... -
윤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 이후
4·10 총선 참패 후 윤석열 대통령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2년간 왔던 길과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많은 이들이 전자로 가면 망할 거라고 했고, 후자로 가면 살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그 갈림길에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이 놓여 있었다. 윤 대통령은 특검법을 거부했다. 선택은 전자였다. 국민 열에 일곱은 특검을 받으라고 했지만, 가차 없이 배반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어쩌면 예견됐던 일이다. 대선 슬로건 ‘공정과 상식’을 버리고 불통·독선·무도함으로 일관한 ‘윤석열스러운’ 결정이었다. 대통령실은 특검법이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법리’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역대 특검 사례에 견줘도 그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건 차치하고도, 국민들은 헌법 정신을 따지자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헌법 11조)를 떠올린다. ‘특검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라는 단순한 비유에 더 공감한다. 생때같은 젊은 장병의 순직 사건을 대하는 일은 이미 ‘법치’가 아닌 ‘정치’의 영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