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신호

신동호 논설위원

어제 새누리당의 어떤 위원회가 대통령기록관이라는 데를 방문했다. 좀 특별한 위원회가 되게 특별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원회 이름부터가 특별하지 않은가. 기사마다 ‘진상조사특위’라고만 써놔서 무슨 진상을 특별히 조사한다는 건지, 왜 그렇게 쓰고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민주당 정부 영토주권 포기 등 대북게이트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라는 긴 이름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새누리당 특위의 대통령기록관 방문 목적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의혹과 관련한 자료 요구라고 했다. 참으로 별난 정치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대통령지정기록물’(이하 지정기록물)에 접근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특위가 대통령기록관에 가서 확인하고자 한 핵심 정보는 지정기록물로 추정되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기록의 존재 여부였다. ‘추정되는’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지정기록물 목록도 지정기록물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경향의 눈]“절대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신호

뭔가 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지정기록물에 대해서는 상당수 식자층, 심지어 정치권과 공직사회조차 예외가 아닌 느낌이다. 지정기록물제도란 퇴임하는 대통령이 재임 중의 기록에 대해 15년 또는 30년 이내의 기간 동안 열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사초나 실록, 현대적으로는 미국의 접근제한기록에 비유할 수 있다. 지정기록물 열람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 경우, 관할 고등법원장이 영장을 발부한 경우, 대통령기록관 직원이 업무상 필요해 관장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강력하게 제한하는 이 제도의 도입 취지는 무엇보다 대통령 기록의 보호에 있다. 대통령 기록은 그 성격상 매우 파급력이 크고 민감한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도 인간인 이상 그런 기록은 아예 만들지 않거나 만들었더라도 그것을 남기지 않으려는 유혹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구구한 설명보다 대통령기록관에 남아 있는 역대 대통령 기록 현황을 보면 된다. 5년 재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약 825만건의 기록을 이관한 데 비해 그 이전 55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이 남긴 기록은 약 33만건에 불과하다. 실제로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대통령기록법)이 제정되기 이전 대통령 기록의 유출과 파기가 극심했던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지정기록물제도는 대통령 기록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게 함으로써 중요한 국가기록이 생산되고 남겨지도록 하는 데 최우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오해는 이런 기본적인 부분, 즉 입법 취지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데서 비롯되는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이 비밀기록의 한 단계 위인 지정기록물을 만들어 누구도 확인할 수 없게끔 조치를 취했으며 34만건에 이르는 지정기록물에 대해서는 2023년까지 목록도 못 본다는 식의 비판이 그렇다. 심지어 국가기록물을 30년 동안이나 볼 수 없도록 한 대통령기록법을 국민의 알 권리 보장 차원에서라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이런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기록학계에서는 알 권리를 제한하는 듯한 ‘지정기록물’ 대신 ‘보호기록물’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다는 논의가 오가는 실정이다.

‘기록대통령’을 자임한 노 전 대통령은 “기록하지 못할 일은 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런 자신감은 민감한 기록의 경우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보호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지정기록물 취지가 훼손되면 이런 믿음은 정반대로 바뀔 수밖에 없다. “떳떳하지 못한 일은 기록으로 남기지 마라.”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나 사후에 당하는 곤욕의 상당수는 자신이 애써 남긴 기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정부 들어 대통령기록제도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지정기록물이 두 차례나 열려 그 취지가 훼손된 지 오래다. 쌀 직불금 파문 때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동의로 국회가, 청와대 기록유출 사건 때는 법원의 영장에 의해 검찰이 각각 열어보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스스로 공개하겠다고 했으나 국회가 거부했다. 1978년 같은 제도를 도입한 미국 의회가 이런 입법 취지를 존중해 이제까지 한번도 열람 결의를 하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봉인은 한번 풀리면 효력을 잃고 만다. 봉인의 의미는 기록을 남기라는 것이다. 이를 뜯으려는 것은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신호다. 아니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미 두 차례 봉인을 해제한 것도 모자라 새누리당 특위가 국정원에도 있다는 남북 정상 대화록을 굳이 대통령기록관에 가서 확인하고자 한 것은 정치적 시위라고 치더라도 너무나 참담하고 섬뜩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지난 8월부터 이관을 준비 중인 이명박 대통령 기록에 자꾸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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