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청산 실패가 부른 역사 비틀기

김종훈 사회부장

가슴을 ‘쾅쾅’ 때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비트는 일들이다.

한국현대사학회 권희영 회장 등 몇몇 회원들이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학사)가 교육부의 검정심의를 통과, 최종합격 심사만을 남겨놓고 있다. 수정 과정을 거치면 책은 오는 8월 세상에 공개된다. 문제는 이 교과서의 내용이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책의 내용 일부가 드러나고 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집필진으로 참여한 이명희 공주대 교수(역사교육학과)는 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침을 열며]역사 청산 실패가 부른 역사 비틀기

“인촌 김성수 이외에도 김활란이라든가 백낙준 선생이라든가 이런 분들은 잘 아시다시피 당시 이화여전이라든가 연희전문학교의 책임자로 계셨습니다. 그 당시에 학교를 운영한다고 하는 것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이화여전이라든가 연희전문과 달리 숭실전문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교육을 포기하고 학교 문을 닫았었죠. 이화여전이나 연희전문은 학교를 지키는 대신, 일제의 침략전쟁에 일부 협력했습니다.(중략) 그 당시에 그러니까 선택의 하나였다라고 하는 거죠.”

김현정 앵커가 “단순히 신사참배에 동참한 정도가 아니라 황국신민임을 영광스러워하자는 글을 쓰기도 했다”고 하자, 그는 “일제침략하에서, 총독 치하에서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이 일정 부분…(중략)”하고 말을 흐렸다. 이 교수의 설명은 ‘친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친일파라도 공과 과 모두 기술해야 한다’로 요약된다. 친일 행위에 대해 일정 부분 한국 사회가 인정해야 한다고 읽힌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이번 고교 역사교과서에 실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2011년 역사 교과서 개정 과정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가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을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 교수를 포함해 몇몇 학자들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왜곡된 역사 교과서의 출판을 주도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를 설명할 현상들이 이어서 터졌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의 출현이 그 중 하나다. 일베 사이트의 일일 평균 게시물 조회수는 129만회에 이른다. 이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다문화 정책을 비난한다. 정치적으로는 ‘우익’을 흉내 낸다. 이들이 최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모욕하는 글과 사진 등을 잇따라 올렸다. 태극기로 감싼 5·18 희생자들의 관이 놓여 있는 사진을 올려놓고 ‘홍어(호남사람 비하) 택배상자’로 비유하는가 하면,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옹호하는 글들을 다수 올렸다.

또 하나 눈여겨볼 현상은 이런 역사왜곡 흐름에 일부 언론 매체가 가세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계열의 종합편성채널 TV조선과 동아일보 계열 채널A는 ‘5·18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했다.

이들은 왜 뒤틀리고, 삐뚤어진 역사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느라, 대학 시절 읽었던 책 한 권을 다시 꺼내 읽었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카는 역사를 ‘사실’ 그 자체로 설명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역사는 똑같은 사실이라도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카는 “역사는 과거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역사가가 ‘현재’에 발을 디디고 서서 해석하고 재구성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카의 말 속에 해답이 숨어 있다. 과거 사실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려는 역사가가 디디고 있는 ‘현재’, 즉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민주화 10년이 지나갔다. 이후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까지 보수정부 10년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화 10년 동안 숨죽이던 수구·우파세력들이 보수 집권이라는 환경 변화에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10~30대 초반의 일베 회원들이 5·18 민주화운동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일부 종편채널이 다소 황당한 ‘5·18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한 것, 일부 역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지 시대가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고 주장하는 것 등은 이런 ‘현재’의 변화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물이다.

이는 역사청산 실패에서 오는 반동(反動)이다. 일제 식민지기에 친일·부일한 세력 척결에 실패했고, 군부 독재에 대한 평가와 단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역공인 것이다. 또 한국의 역사교육 과정과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방증들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누군가는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화가 나고 두렵다. 가슴이 ‘쾅쾅’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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