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빠진 ‘문화융성’ 과제

이대영 | 중앙대 공연영상창작학부 교수

문화융성위원회가 지난 25일 청와대에서 문화가 있는 삶을 위한 문화융성 8대 정책과제를 발표했다. 들여다보니 정책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다. 다만 핵심 알맹이가 빠져 있어 몇 가지 고언을 드리고자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주창한 것이 ‘시대교체’였다. 선거가 끝나고 많은 언론이 ‘시대교체의 열망이 정권교체의 열망을 이겼다’고 썼다.

시대교체는 과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제도와 관습으로는 이미 인터넷(IT)으로 하나가 되어버린 지구촌 시대를 능동적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왔다. 과거 방식의 그릇된 정치문화, 관료문화, 기업문화, 노사문화, 복지문화, 법치문화, 교육문화 등 해묵은 관습에 의한 ‘나쁜 제도와 문화’를 바꾸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 키워드가 창조경제, 정부3.0, 자유학기제, 4대악 척결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새 정부의 국정과제로서 ‘문화융성’에는 시대교체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시론]핵심 빠진 ‘문화융성’ 과제

인간의 삶을 시대별로 요약해 보자. 농경시대에는 외부와의 접촉과 왕래가 많지 않았다. 마을별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 신화, 그에 따른 오래된 제의와 풍습이 대부분이었다. 15세기 중반 활자가 발명되어 책을 통해 다른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타 문화를 유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인류 문화는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천연 시계가 아닌, 인공시계와 인공조명에 의해 노동시간이 규정되고, 땅과 나무와 짐승으로부터 얻었던 1차 생산물 대신에 산업기계에 의해 생산된 2차 공산품이 교역물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세기의 도시는 메트로폴리탄으로 변모하며 과밀하게 사람을 끌어 모은다. 젊은이를 떠나보낸 시골은 가끔씩 유입되는 세련된 도시문화를 겪으면서 자신들의 삶과 문화가 마치 열등한 것으로 느끼며 자괴감에 빠진다. 이 무렵 증기선과 기차는 부지런히 교환할 상품과 사람을 실어 나른다. 교역이 활발해지자 무역회사와 이를 뒷받침하는 은행과 증권이 들어서고 지식근로자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른바 20세기의 삶이다. 특히 20세기 초엽에 등장한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전파 미디어 혁명은 사람들의 생각과 관습을 획일적으로 대중화하고 물질화한다. 도시로 몰려 온 디아스포라 이방인들은 문화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며 컴퓨터와 사이버 세상에 함몰된다.

한국의 경우, 구한말에서부터 식민지 시대 그리고 해방과 분단시대를 거치며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의 꿈을 이루었지만, 그에 걸맞은 제도와 문화가 뒤따르지 않아 정신이 피폐해졌다. 이념적 편견과 갈등이 극심해 말도 섞지 않고 함께 밥도 먹지 않는다.

이러한 전 지구촌의 시대적 혼돈 및 국민통합의 기저 속에서 바로 ‘문화융성’이라는 국정과제가 탄생했고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21세기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헤치고 나갈, 우리 민족의 ‘문화나침반’ 혹은 ‘문화거울’을 축조하는 위대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이는 곧 판을 바꾸는 작업이다. 시스템을 교체하는 작업이다. 인간의 본능인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 무엇,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찾고 누리고 나누어야 할 문화적 그 무엇을 창조해내는 작업이 바로 문화융성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대부분 정책과제가 시대교체의 함의가 빠진 채, 문화예술에만 관련되어 있으니 조금 답답하다. 예컨대 인문학 진흥이 이 시대만의 새로운 화두인가? 시스템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리 투자해도 인문학은 진흥되지 않는다.

모두가 도시로 향하는데 지역문화 진흥이 말처럼 그리 쉬운가? 또한 지금처럼 찢겨진 이념 구도에서 ‘문화영향평가제’가 환경영향평가제처럼 또 다른 국민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가? 이번 문화융성위원회에서 발표된 내용은 문화부가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것만을 집대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작된 일이다. 정부에 딱 한 가지만 당부한다. 지금 제안된 정책의 스토리텔링을 잘 연구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우선 기초체력을 강화하는 것에서부터 집중하기를 권한다. 아무리 급하다고 외투 위에 속옷을 걸칠 수는 없지 않은가. 해당 실·국과 해당 분야 예술장르 관계자들도 필요에 따라 양보의 미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시대교체의 의미가 담긴 문화융성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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