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재집권

이윤주 기자

노동운동·파시즘 결합 ‘페론주의’ 주인공

‘페론주의’의 주인공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핵심 인물이다. 공업화로 경제성장을 이루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증대시켰다는 긍정적 평가와 지나친 대중영합주의로 천문학적 외채와 물가상승을 불러와 결국 아르헨티나를 ‘병자’로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 등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고,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망명 1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정치적 거물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1895년 태어난 페론은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당당한 외모와 유려한 말솜씨, 타고난 정치감각으로 군대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1943년 군부 쿠데타에 참여함으로써 정계에 진출했다. 이듬해 군사정권에서 육군장관 겸 노동장관을 맡은 뒤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으로 노동자들의 인기를 독점했다. 반대 세력으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고 체포되었으나 오히려 대중의 지지는 더 높아졌다. 그는 이 여세를 몰아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에비타’라는 애칭의 아내 에바에 대한 전국민적 사랑은 페론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작용했다.

[어제의 오늘]1973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재집권

페론은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언론·보도의 자유를 강제하고, 외국자본의 배제와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1949년 헌법을 개정해 재선에 성공했다. 경제적으로는 공업화를 추진했으며 도시 노동자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성별 임금차별도 크게 줄었다. 엄청난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부의 재분배로 중산층을 두껍게 하는 데 힘을 썼다. 페론주의는 노동운동과 파시즘이 결합된 ‘국가사회주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페론은 1952년 아내 에바가 사망한 이후 기운을 잃었다.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해 교회와 불화를 빚었고, 경제 상황까지 나빠지자 군부로부터도 버림받았다. 1955년 교회 억압을 계기로 가톨릭교도와 군부의 지지를 잃게 됐고 결국 9월 군사혁명이 일어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망명 중에도 그의 노동자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식지 않았다. 좌우 갈등과 정치폭력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대중은 다시 페론을 찾았다. 1973년 9월23일,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두 번째로 당선됐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망명 중 만난 부인 이사벨 페론은 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고령의 후안은 건강이 악화되어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사벨이 대행할 때가 많았다. 결국 후안 페론은 1974년 사망하고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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