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죄·배상, 우리는 일본처럼 하면 안돼

서의동 선임기자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 19년째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가 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재단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br />구수정은 베트남 전쟁을 “우리 사회가 전쟁과 폭력을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가 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재단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구수정은 베트남 전쟁을 “우리 사회가 전쟁과 폭력을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중국에 오래 거주해온 생면부지의 사업가가 지난해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구수정(51)을 찾아와 후원금 5만달러를 내놓고 갔다. 신문을 보다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처음 접하고 받은 충격이 커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 지난 5일에는 ‘부족하나마 용서받고자 하는 곳에 쓰여지기를 바란다’는 손편지가 재단 사무실로 배달됐다. 충북에 사는 발신인은 기초생활수급자인 2급 장애인.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형편인데도 매달 3만원 후원을 약정했다.

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구수정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려온 지 19년째가 되지만 여전히 처음 듣는다는 이들이 많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던지고, 동시에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다”고 했다. 구수정은 베트남 유학 시절인 1999년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처음 한국에 알렸고, 이후 전개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해왔다. 지금은 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 주교)의 출범준비로 바쁘다. 구수정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국제사회에서 언제든 다뤄질 수 있는 전쟁범죄이자 반인륜·반인도적 사안”이라며 “다음 정부가 우선 진상규명에 나선 뒤 사죄·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 ‘어디서 저리 많은 눈물이 나왔을까’

- 재단 출범식은 언제 할 계획인가.

“설립인가는 2월에 받았고 출범식은 9월에 열기로 했다. 오는 26일 종전 기자회견 겸 베트남 피에타상 제막식을 제주 강정에서 가질 계획이다. 베트남의 아픔과 제주의 아픔이 만나는 의미가 있다.”

한베평화재단은 1999년부터 이어온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지속가능한 평화운동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 지난해 학살 50주기 위령제에는 한국인들도 참가했던데.

“참가자들이 사전지식이 있었을 텐데도 ‘어디에 저리 많은 눈물들이 있었나’ 싶게 눈물바람으로 다닌다. 주민들이 성토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주니 더 북받치고 미안해한다.”

2006년 빈딘성 빈안의 위령제에서 구수정이 겪은 일화다. “주민들이 100명쯤 모일 줄 알았는데 수천명이 모였다. 사람이 많으니 웅성대기도 하고 조무래기들이 떠들기도 하다가 생존자 연설이 시작되니 일시에 고요해지더라. 참상을 회상하는 연설이 끝나자 참가자들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한국군 규탄 구호를 외치더라. 진료사업을 하던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회원 60명가량이 현장에 있었는데 군중들이 그쪽으로 다가가는 걸 보고 아찔했다. ‘사고다’ 싶었는데 웬걸? 주민들이 한국인들을 안아주더라. ‘이야기 듣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 이건 형식이야. 우린 해마다 해온 거야. 괜찮아’ 이러는 거다.”

■ ‘학살 시민법정’ 내년쯤 개최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되던 것은 1965년 10~11월, 학살은 이듬해인 1966년 초부터 시작됐다. 한국군이 부대터를 잡고 부근 마을주민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노인, 엄마, 아이 가릴 것 없이 도륙했다. 한국군이 가는 곳곳에서 강간, 영아살해, 시신훼손, 방화와 암매장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후 30년간 한국 사회에선 봉인된 학살의 기억을 다시 불러낸 ‘영매’가 구수정이다.

“1999년에 처음으로 카인호아, 푸옌, 빈딘, 꽝아이, 꽝남성 등 피해 마을들을 45일간 조사하러 다녔다. 마을마다 수백명이 몰려와 ‘카이, 카이(진술)!’ 하며 손을 든다. 학살 이후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니 오죽 하고픈 말이 많았을까. 하루에 3개 마을씩 돌며 이야기를 ‘받아내다’ 보니 아파서 더 이상 못 듣겠더라. 그러다 ‘베트남 국민시인’인 탄타오를 만났는데 ‘양국 간에 증오가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당신과 나의 몫이다’라고 하더라. 그가 만약 ‘당신의 몫’이라고만 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다.”

- 그 사람들은 왜 그럴 수 있는 건가.

“1945년에 해방됐다가 곧바로 30년 전쟁이 벌어졌고, 중월전쟁, 캄보디아 전쟁이 이어졌다. 전쟁이 가까운 현실이니 빨리 잊어야 살 수 있었던 거다. 조사하러 가서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얼마나 아프셨어요?’ 하면 상냥하게 대해준다. 고구마, 과일을 갖고 와 먹여주기도 한다. ‘피해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 한국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다고 보나.

“미군이 1968년에 109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밀라이학살’의 경우 현장사진들이 공개됐는데도 당시 미국 내 여론조사에선 ‘못 믿겠다’는 응답이 대다수였다. 반면 내가 첫 르포를 썼을 때는 사진도 없었고, 오로지 피해자들 증언이었는데도 사람들이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더라. 제주 4·3,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1980년 광주학살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도 이렇게 죽였는데 밖에선 오죽했을까’ 싶은 거다. 첫 보도가 나가고 며칠간 격려메일이 하루 1000통씩 쏟아졌다.”

- 참전군인들로부터 피소당했는데 어떻게 됐나.

“최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구성된 변호인단이 법적인 해결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우선 2000년 열린 ‘도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과 유사한 시민법정을 2018년 봄에 개최한 뒤 국가배상소송에 나설 거다. ‘베트남학살배상특별법’도 검토 중이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은 2015년 말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졸속 타결되면서 다시 힘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일본처럼 하면 안된다, 정의롭게 풀고 가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 과거사의 ‘뚜껑’ 언제든 열릴 수 있다

지난해 경남지역 중학생들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관한 수업을 들은 뒤 미안함을 담아 만든 것이다. 한베평화재단은 이 엽서 내용을 베트남 현지에 전했다. 강윤중 기자

지난해 경남지역 중학생들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관한 수업을 들은 뒤 미안함을 담아 만든 것이다. 한베평화재단은 이 엽서 내용을 베트남 현지에 전했다. 강윤중 기자

베트남 학살 문제를 외면한 채 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기대하는 건 모순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1년 한·베 정상회담에서 에둘러 사과했을 뿐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사과·배상은 없었다. 베트남 학살 50주기인 지난해 현지 곳곳에서 위령제가 크게 열렸고 국영 VTV가 다큐멘터리 <마지막 자장가>와 <미안해요 베트남>을 지난해와 올해 3월 방영했다. 지난 2월 빈안학살 51주기 위령제에서 생존자 응우옌떤런은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 물질적·정신적 배상’을 요구했다.

- 다큐멘터리는 어떤 내용들인가.

“<마지막 자장가>는 1966년 빈호아 마을의 생존자 도안응이아와 동갑내기인 나의 엇갈린 운명을 그렸다. 도안응이아는 김서경·김운성 부부가 만든 ‘베트남 피에타상’의 모티브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학살로 온 가족을 잃었다. 엄마가 갓난아기인 그를 끌어안은 채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 위로 시신들이 겹쳐지는 바람에 살아났지만 눈에 핏물과 탄약가루가 들어가 실명했다. 총에 맞아 엉덩이가 날아가고, 온몸이 총상과 파편투성이였지만 기적적으로 치유됐다. 10살에 처음 걷기 시작했는데 그날 마을 잔치가 열렸다. <미안해요 베트남>은 학살을 다루되 한국 시민들의 사죄운동을 바닥에 깔고 있다. 운동이 베트남에서 반한감정이 불거지지 않는 역할을 한 거다.”

- 베트남 정부는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는 기조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바뀌고 있는 건가.

“번역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다. ‘과거를 닫는다’는 베트남어로 ‘켑 라이 꾸아크’인데 ‘켑(khep)’은 잠시 옆집 마실 갈 때 사립문을 슬쩍 걸쳐둔다는 뜻이다. 완전히 닫은 게 아니라 언제든 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구수정은 꽝남성의 한 초등학교 5학년 도덕수업 자료를 보여줬다. 학살 현장학습 과제의 질문은 ‘학살이 있던 방공호는 몇 곳인가’ ‘학살 피해자 중 0~6세, 60세 이상은 각각 몇 명인가’ 같은 것들이다. “중·고교 역사시간에서도 학살을 배운다. 잊을 수도, 모를 수도 없다.”

- 우리는 민주화 이후에야 과거사의 봉인이 풀렸는데 베트남은 좀 다른 것 같다.

“제주 4·3 피해자는 수십년을 숨죽이고 살았지만 이분들은 그런 세월은 없었다. ‘하미 비문 사건’도 있긴 하지만.”

1968년 135명이 학살당한 하미 마을에 한국 참전단체가 돈을 대 2001년 위령비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학살 정황이 묘사된 비문을 한국 정부가 문제 삼아 결국 비문을 봉인한 것이 ‘하미 비문 사건’이다. “당시 주민들이 ‘너희들이 몰려와 우리 다 죽인 게 1차 학살, 불도저로 시신 밀어버린 게 2차 학살인데 비문까지 없애라고 하는 건 정신까지 말살하는 3차 학살 아니냐’고 하더라. 결국 비문 위에 대리석 한 장을 얹으면서 ‘이 대리석을 나중에 한국 친구들이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비문은 17년째 닫힌 채로 있다. 학살이 과거사가 아니라 ‘오래된 현재’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 일본에서는 한국군의 학살피해 규모를 1만~3만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000년 제주 인권학술대회 발표를 위해 여러 자료를 종합한다는 단서를 붙여 ‘80건 9000명’을 제시했다. 나중에 단서는 사라지고 숫자만 남았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학살이 숱하다. 학살이 이뤄진 5개성 중 우선 꽝남성에 대해서 학살목록을 만들고 있는데 이미 2000년 발표된 것의 2배가 넘는다.”

- 국제사회에서는 일찌감치 학살이 알려져 있었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거나, 모른 척해온 건가.

“145명이 학살된 꽝남성 투이보 마을에 ‘준코학교’가 있다. 1993년 피스보트 일원으로 마을을 방문한 일본 대학생 다카하시 준코가 학교건립 모금운동을 하다 교통사고로 숨지자 부모가 딸의 뜻을 이어 지은 학교다. 430명이 학살된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에도 피스보트가 일본 정부의 자금을 끌어와 학교를 지었다. 이 마을에는 이미 1980년대에 영국인 작가가 학살을 조사해 422명의 명단을 작성했고, 그 후로 독일 NGO가 주민들에게 의족과 의수를 지원했다.”

- 공습도 아닌데 빈안에서 1004명이나 학살된 것은 유례가 드물다. 왜 이토록 잔인했던 걸까.

“주민들을 빨갱이로 봤던 거다. 제주 4·3, 한국전쟁 과정에서 자국민도 예사롭게 죽였는데 타국민, 더구나 빨갱이를 학살하는 것은 쉬운 일이거든. 우리 안에 내면화된 폭력의 기제가 타국민을 향해 너무 쉽게 발현된 거다.”

■ 베트남전, 폭력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야

지난 19년의 소감을 묻자 구수정은 “사고치는 건 한순간인데 그걸 감당하는 세월은 길더라”며 웃었다. “베트남 유학 1세대였고, 진출한 기업들과 일하며 돈도 잘 벌었지만 학살 문제를 제기한 이후 한동안 전기·수도가 끊길 정도로 어려웠다.”

- 참전군인들도 어떤 의미에선 피해자인 셈이다.

“일본의 평화운동가 오다 마코토 선생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게 아니라,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참전군인들은 분명 국가권력의 피해자다. 그런데 학살 가담 사실을 고백했다가도 번복하곤 한다. 우리 사회가 양심고백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탓일 것 같다. 전쟁에 대한 인식이 얕다보니 여전히 그분들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거다.”

- ‘월남특수’가 경제도약의 발판이었다는 식으로 참전을 미화하기 때문일까.

“파병이 과연 ‘신의 선물’이었을까. 최대 수혜국은 일본이었고, 단 25명을 파병한 대만의 월남특수도 우리와 별 차이 없다는 분석도 있다. 한일협정도 비슷한 시기에 체결돼 개발자금을 받았다. 파병만이 ‘마중물’은 아니었다.”

- 학살당한 이들이 베트콩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베트콩과 유격대는 물론이고 마을 부녀회장까지 ‘열사’로 추존돼 ‘열사 1명 있으면 가난을 면한다’고 할 정도로 가족이 지원받는다. 그래서 베트콩과 학살피해자는 확연히 구분돼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너무 많이 학살당했다. 380명이 학살된 빈안의 고자이 마을 위령비에는 ‘보자인’(무명)이란 표기가 50명이 넘는다. 이름도 채 못 지은 갓난아기들이다. 갓난아기가 베트콩인가. 설사 베트콩이라도 이렇게 죽여도 되나.”

- 다음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의혹’이란 꼬리표가 달려 있다. 우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공식 인정·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

구수정은 베트남 전쟁을 전쟁과 폭력을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분단이 우리를 할퀴었던, 그래서 내면에 곪은 채로 있지만 끄집어내기 어려웠던 것들을 이 전쟁을 통해 성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고 평화로 향하는 출발점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전화: 02-229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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