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개념을 둘러싼 북·미의 용어 전쟁 30년...'한반도비핵화'가 뜻하는 것은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한반도 비핵화인가 북한 비핵화인가’

비핵화의 정의(定義)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비롯한 바이든 행정부 인사들은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19일 한·미 2+2(외교·국방) 장관회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블링컨 장관을 옆에 두고 “한반도 비핵화가 올바른 표현”이라고 말해 논란에 불을 붙였다.

비핵화의 대상과 정의에 대한 논쟁의 시발점은 북핵 문제가 처음 불거진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유엔 문서 등에 사용하는 공식적인 표현은 ‘한반도 비핵화’다. 북한과의 각종 공식 합의 문서에 그렇게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원래 미국이 북한과의 모든 합의문에서 넣고 싶었던 표현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였다. 하지만 북한은 이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과 합의를 이루기 위해 서로에게 유리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외교적으로 타협한 결과다.

미국과 한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은 곧 북한 비핵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한반도 비핵화라고 쓰고 북한 비핵화라고 읽는’ 것이다. 남측에는 핵무기가 없고 미국의 핵무기도 한반도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한반도에 남은 핵무기는 북한의 핵무기 외에는 없다. 따라서 북한만 핵을 폐기하면 한반도 비핵화는 완성된다는 의미다. 또한 한국은 지금 핵을 보유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도 갖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한반도 비핵화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1991년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서 말하는 비핵화의 정의를 따른 것이다.

반면 북한이 생각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는 다르다. 한반도 비핵화에는 ‘미국의 핵위협 제거’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력(핵우산) 제공이나 미국의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등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과거 미국과의 합의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고집한 이유는 핵우산 철폐와 더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까지 주장할 수 있는 명분과 근거를 남겨두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볼 수 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방한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외교·국방 장관회의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의용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방한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외교·국방 장관회의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반도 비핵화의 탄생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처음 나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다. 1991년 노태우 정부는 미국의 전술핵이 한반도에서 철수했으므로 남한 땅에는 더 이상 핵이 없다는 ‘핵부재 선언’을 했다. 북한의 핵포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선제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이에 기초해 남북은 그해 12월 5개항으로 이뤄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남북은 이 합의에서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우리나라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남과 북은 핵무기 실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을 하지 않고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합의가 이뤄진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은 물론 한국의 핵개발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합의를 적극 지지했다.

남북 간에 이뤄진 합의이므로 이 문서에 등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한반도 내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로 한정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한·미가 “한반도 비핵화는 곧 북한 비핵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북·미 합의에 처음 등장한 비핵화 표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북핵 위기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북한과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물인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비핵화된 한반도(nuclear-free Korean peninsula)의 평화와 안전을 이루기 위해’라는 표현이 담겼다. 당시 정부는 비공식 번역에서 ‘nuclear-free Korean peninsula’를 ‘비핵화된 한반도’라고 했지만, 실제 의미는 ‘핵없는 한반도’에 가깝다. 핵무기뿐 아니라 핵위협도 없어져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유리한 표현이었다.

당시 미국도 이 표현에 담긴 북한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북핵 문제는 지금처럼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당시 북한은 핵물질 생산을 의심받고 있었지만 초보적인 핵기폭장치를 만들 능력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단계라고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머지 않아 북한 자체가 붕괴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미국에게 당장 급한 것은 북한의 NPT 탈퇴를 막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9·19 공동성명

제네바 기본합의가 깨지고 2차 북핵위기가 발발한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2003년부터 북핵 6자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한·미·일은 ‘북한 비핵화’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북한의 거센 반발과 북한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는 중국·러시아 때문에 매우 힘든 협상을 했다. 결국 2년 이상의 협상 끝에 2005년 만들어진 9·19 공동성명에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검증가능한 한반도 비핵화(verifiabl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a peaceful manner)’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이 문장 뒤에는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NPT에 복귀할 것,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공격 의사가 없음을 다시 확인한다는 것,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준수하고 이행한다는 것,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을 인정한다는 것 등의 설명이 주렁주렁 붙어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부연설명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여전히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지는 못했다. 6자의 공동성명에 들어간 표현인 만큼 한반도 비핵화는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됐다. 한·미·일이 모인 자리에서는 ‘북한 비핵화’라고 거리낌없이 말했지만, 북한이나 중국 등이 관여하는 대화나 문서에서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두가지 용어가 혼용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지만 북·미가 당장 이 용어의 해석을 두고 정면충돌하지는 않았다.

2005년 4차 6자회담 이후 채택된 9.19 공동성명에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명시됐다. (노란색 하이라이트 부분) 한반도 비핵화란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빨간색 밑줄) 등이라며 비교적 상세하게 개념을 서술했지만,  북미가 서로 달리 해석할 여지까지는 없애지 못했다.

2005년 4차 6자회담 이후 채택된 9.19 공동성명에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명시됐다. (노란색 하이라이트 부분) 한반도 비핵화란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빨간색 밑줄) 등이라며 비교적 상세하게 개념을 서술했지만, 북미가 서로 달리 해석할 여지까지는 없애지 못했다.

■남북한 동시사찰 주장 빌미된 한반도 비핵화

북한의 핵을 폐기하기 위한 협상은 계속됐지만 6자회담은 결국 2008년 좌초하고 말았다. 5년 동안 위기와 타협을 반복하며 그런대로 전진하는 듯했던 6자회담이 결국 깨지게 된 빌미를 제공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였다.

6자는 9·19 공동성명에 이어 2007년 2·13 합의를 만들어냈다.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초기조치들에 대한 합의다. 이 합의에 따라 북한은 핵신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북한이 제출한 핵신고서를 검증하는 것이었다. 2008년 7월 검증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6자회담에서 북한의 수석대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자신들의 핵시설만을 검증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남북한 동시사찰론’를 들고 나왔다.

북한이 남측의 미군기지까지 포함하는 동시사찰을 주장한 근거는 9·19 공동성명에 나오는 ‘검증가능한 한반도 비핵화’였다. 한반도 비핵화를 약속했으므로 한반도 전체가 검증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동시사찰 주장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결국 6자회담은 검증의정서 채택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그해 12월 회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핵없는 한반도’ 명시한 4·27 판문점 선언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을 내놨다. 4·27 판문점 선언 3조 4항에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는 문장이 나온다.

‘핵무기 없는 한반도’라는 표현은 의미 전달이 명료하다. ‘한반도 비핵화’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다. ‘핵없는 한반도’는 더욱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매우 모호한 표현이다. 특히 북한 외무성 영문 홈페이지에 실린 판문점 선언 영문 버전은 ‘핵없는 한반도’를 ‘turning the Korean peninsula into a nuclear-free zone’으로 번역하고 있다. 남북 정상이 한반도를 ‘비핵지대화’하기로 약속했다는 주장이다.

한반도 비핵지대화는 한반도에 핵무기는 물론 핵전력 전개가 있어서도 안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도 철폐 대상이라는 주장할 수 있고, 미국 핵전력의 보호를 받는 주한미군도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는 비록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비공식 번역 문서이긴 하지만 북한이 비핵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가 잘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 북한이 2016년 7월 정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핵화 5대 조건’을 제시한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남한 내 미군 기지의 핵무기 공개 △남한 내 모든 핵무기와 핵기지 철폐 및 검증 △미국의 핵전력 한반도 전개 금지 약속 △북한에 대한 핵위협 중단 및 핵 불사용 확약 △한반도에서 핵 사용권을 가진 미군의 철수 등이다.

이 ‘비핵화 5대 조건’은 북한이 4·27 판문점 선언 영문번역에서 말한 ‘한반도 비핵지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는 설명인 셈이다.

■‘한반도 비핵화’ 재확인한 싱가포르 합의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2018년 5월 북·미 싱가포르 합의는 정치적으로 보여주기식 성과에 급급했던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과욕에 따른 부실 합의였다. 싱가포르 합의에는 비핵화와 관련해 “2018년 4월 27일 발표된 판문점 선언의 의의를 재확인하며, 북한은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r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하였다”고 명시돼 있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북한이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활용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못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날짜를 먼저 정한 뒤에 합의 내용을 협상하는 ‘외교적 상식’에 어긋나는 방법을 취했다. 합의문안 협상을 맡은 실무진은 시간에 쫓겨 불리한 처지에서 북한과 싸워야 했다. 결국 회담 개최 전날 미국 실무진은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한반도 비핵화보다 더 분명한 의미를 담은 문안을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당시 정상회담을 절실히 원했던 쪽은 북한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치밀하게 일을 진행했다면 비핵화의 정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입장에 가깝게 명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지금도 미국 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비핵화 개념에 ‘핵위협’ 포함시킨 9·19 남북공동선언

싱가포르 합의 이후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대화를 되살리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평양을 방문했다. 이때 남북정상이 서명한 9·19 공동선언문에는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는 문장이 들어갔다. 4·27 판문점 선언보다 더 구체적으로 북한의 의도가 반영된 표현이다. 미국이 참여하지 않은 남북 간의 합의이긴 하지만, 북한은 9·19 남북공동선언으로 비핵화의 개념 속에 핵위협 제거가 들어 있음을 명시한 합의문서를 갖게 됐다.

북한은 이 표현을 북·미 합의에도 넣으려 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2개월 앞둔 그해 12월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논평을 통해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그릇된 인식’을 거론했다. 북한은 이 논평에서 “조선반도 비핵화란 우리의 핵억제력을 없애는 것이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라고 주장했다. 또한 “6·12 조·미 공동성명(싱가포르 합의)에는 분명 ‘조선반도 비핵화’라고 명시돼 있지 ‘북 비핵화’라는 문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며 “미국은 조선반도 비핵화를 ‘북 비핵화’로 어물쩍 간판을 바꿔놓음으로써 세인의 시각에 착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 논평은 의도는 분명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핵위협 제거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약속해야 한다고 미국을 압박한 것이다.

2018년 남북 정상이 합의한 9.19 평양공동선언을 보도한 경향신문 2018년 9월20일자 보도.

2018년 남북 정상이 합의한 9.19 평양공동선언을 보도한 경향신문 2018년 9월20일자 보도.

■하노이에서 비핵화 ‘엔드 스테이트(최종상태)’ 들고 나온 미국

미국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의 ‘엔드 스테이트’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논의하기 전에 비핵화된 한반도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규정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합의에 담지 못했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가 아니며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북한의 입장과는 정면충돌하는 요구였다. 결국 비핵화 개념에 대한 입장 차이는 하노이에 맞은 역사적인 기회가 물거품이 되게 만든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이후 북한의 주장은 더욱 강경해졌다. 그해 10월 스웨덴 스톡홀름에 열린 북·미 실무접촉이 소득없이 끝난 뒤 북한 협상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성명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는 미국의 핵위협 제거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다시 주장했다. 그는 “조선반도 핵 문제를 탄생시키고 그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는 미국의 위협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먼저 핵 억제력을 포기해야 생존권과 발전권이 보장된다는 주장은 말 앞에 수레를 놓아야 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진실의 순간’에 직면한 북·미

북핵위기가 시작된 이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무산시킨 핵심 원인이었다. ‘하노이 노딜’ 이후 북·미 간 쟁점도 결국 비핵화의 개념 정리로 좁혀지고 있다. 향후 북핵 문제를 놓고 벌어질 북·미 간 줄다리기의 핵심은 ‘한반도 비핵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외교적 합의를 위해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으로 미봉해버린 북핵 문제의 본질적 난제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진실의 순간’을 더 이상 피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블링컨 장관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 인사들이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한 비핵화’라는 말을 부쩍 자주 사용하는 것을 예사롭게 볼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한반도 비핵화를 버리고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은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합의를 어기고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정부로서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북한 비핵화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계속 주장할 수 밖에 없다.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핵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는 로버트 갈루치 특사(왼쪽)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핵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는 로버트 갈루치 특사(왼쪽)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

그럼에도 정의용 장관이 한·미 2+2 장관회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 비핵화 보다)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표현이 더 올바른 표현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논란을 부르기 충분했다. 한반도 비핵화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써왔던 용어라는 점을 말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올바르다’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 외교장관의 입장에서는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을 사용해왔으며, 그 안에는 북한의 핵을 폐기하는 것이 1차적 목표라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었을 것이다.

정 장관은 지난 25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 공동발표에서도 “2018년 9월 남북 정상간 합의한 대로 한반도의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는 우리 노력에 계속 함께 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9·19 남북공동선언에 들어있는 문구를 되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라는 말을 북한이 어떻게 활용하는지 분명해진 마당에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은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적절치 않은 발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한국의 외교 수장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잇달아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을 동맹 간 공조 강화를 강조하고 있는 미국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한·미 2+2 장관회의 공동성명에서 “한·미 간 완전히 조율된 대북정책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는 대목에 신뢰를 부여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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