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환경·평화 지키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녹색 깃발을 들다

장영은

페트라 켈리

환경운동가이자 반전 평화운동가였던 페트라 켈리(1947~1992)는 진보정당의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독일 녹색당 창당의 깃발을 들었다.

환경운동가이자 반전 평화운동가였던 페트라 켈리(1947~1992)는 진보정당의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독일 녹색당 창당의 깃발을 들었다.

빌리 브란트에 감화 받고 입당한
독일 사민당의 교조화에 실망
대안정치연대 ‘녹색당’ 창설 주도

“좀 더 민주적인 방법으로 가는 수밖에,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는 기존 정당이나 의회 그리고 사법부를 반드시 해체시켜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고, 거기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자는 뜻도 정녕 아니다. (…) 비폭력과 창조적인 방법을 통해, 환경운동과 평화운동 그리고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정당반대당, 즉 녹색당 운동을 통해 생명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1972년, 25세의 페트라 켈리는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한다. 그녀는 소련 영향 아래에 있었던 공산주의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으며 동방정책을 펼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정치적 행보를 눈여겨보았다. 빌리 브란트는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한다. 그는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어렵게 살아남아 폴란드의 총리가 된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빌리 브란트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페트라 켈리는 빌리 브란트와 같은 정치인이 이끄는 사민당이라면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72년 당시 페트라 켈리는 ‘시민주도 환경보호 전국연합(BBU)’에서 “산성비 문제, 숲의 황폐화, 핵발전소 건설” 등의 문제를 공론화하며 환경운동가이자 반전 평화운동가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1947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페트라 켈리는 전후(戰後)의 상흔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집을 나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한 아버지로 인해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미군 중령과 재혼하면서, 페트라 켈리는 1959년부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1966년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그녀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내면의 열망을 확인한다. 졸업 후, 유럽 통합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페트라 켈리는 암스테르담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한편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행정사무관이 되었다.

그러나 자꾸만 독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페트라 켈리는 독일에서 시민운동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로 결정한다. 현실 정치에 점차 가까이 다가서면서 그녀는 빌리 브란트에게 큰 감화를 받았고,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처럼 사민당에서 자신의 미래를 모색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민당 내부는 교조적인 분위기였다. 시민운동의 열망을 조금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류 정치인들이 “별 볼일 없는 단체”라고 얕보았던 시민운동 단체는 1972년 1000개에 육박했다. 30만명 이상의 활동가들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를 외쳤다. 페트라 켈리는 백가쟁명의 시대를 반겼다. 주류 정당에서 “새로운 정치”가 불가능하다면,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페트라 켈리는 서독 전역의 시민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시민주도 환경보호 전국연합’의 대표로 1979년 3월 대안정치연대인 ‘녹색당’ 창설 모임에 참가한다. “우리는 기존의 정당 시스템 내에서는 평화롭고 생태친화적인 미래에 대한 관심사를 드러낼 수 없었던 일부 계층의 욕구를 평화운동과 녹색당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표출할 것이다.” 그녀는 1979년 사민당을 탈당하고, 녹색정치연합의 대표로 유럽의회 출마를 준비한다. 결별의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능력, 새로운 출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야말로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임을 고려할 때, 페트라 켈리는 그녀 자신의 표현처럼 “직관적이고 집요한” 정치인이 분명했다. “유럽을 핵 추방지역으로 만들자”는 선거 구호에 영국, 프랑스, 벨기에의 녹색당과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환경운동 단체들이 뜻을 함께하기로 한다.

‘정당반대당’이라는 개념을 선취
환경·평화가 생존 문제임을 호소
1983년 총선에서 26명 의회 진출

[여성, 정치를 하다](18)환경·평화 지키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녹색 깃발을 들다
1983년 3월 녹색당 당선자들과 함께 의회로 향하는 페트라 켈리(위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같은 해 9월 서독 미군기지 저지 시위에 참석한 페트라 켈리.

1983년 3월 녹색당 당선자들과 함께 의회로 향하는 페트라 켈리(위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같은 해 9월 서독 미군기지 저지 시위에 참석한 페트라 켈리.

하지만, 선거운동은 전쟁에 가까웠다. 페트라 켈리는 자신의 열악한 상황을 주위에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보통 정당들이 주선하는 선거운동 사단은 물론 작은 조직조차 없이 혼자서 선거운동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저를 아끼는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약 90만표를 획득했다. 득표율 3.2%에 그쳐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페트라 켈리는 선거를 치르면서 진보정당의 의회 입성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 6000명이던 녹색정치연합 회원 수는 선거 직후 1만6000명이 되었다. 페트라 켈리는 1979년 10월 치르게 될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페트라 켈리의 예상처럼 녹색당 후보들은 브레멘 지방의회 선거에서 4석을 확보한다.

1980년 1월12일, 녹색당은 창립총회를 열었다. 정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휴식을 취할 시간은 없었다. 당장 연방의회 선거가 아홉 달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비폭력 노선, 풀뿌리민주주의, 생태주의, 사회적 책임”이 녹색당의 정강(政綱)이었지만, 페트라 켈리는 대중에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정치 철학은 선거에서 이긴 후에 전달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녹색당이라는 신생 정당을 어떻게 소개해야 좋을지 그녀는 숙고했다. 그녀는 “정당반대당”이라는 개념을 선취했다. “우리는 더 이상 기성 정당들에 희망을 걸 수 없다. 또한 더 이상은 의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의지할 수도 없다. 시스템은 무너졌다. 우리는 의회 내부와 외부의 새로운 힘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힘의 한 부분은 기성 정당에 대한 반대를 표방하는 녹색당을 통해 대변된다.” 새로운 정치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녹색당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페트라 켈리는 “정당반대당”인 녹색당은 반대만 하는 정당이 아니라 “최고의 것은 모두 흡수”하는 정당임을 강조하며, 지지 세력을 넓혀갔다. “우리는 입구가 차단되지 않은 진정한 대의적 정당 시스템을 추구한다. 이 시점에서 사회의 약자들과 노인들, 장애인, 여성, 청소년, 실업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정당, 기성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의 탄생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페트라 켈리는 당원들에게 정치를 시작한 이유를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녹색당의 ‘평화선언문’ 초안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그녀는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팽창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강조했다. “우리는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파괴와 공격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보아왔다. 녹색당은 결코 그 어떤 완성된 이데올로기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자만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어떤 일도 강요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경계할 것이다.”

환경과 평화가 생존 문제임을 호소하는 페트라 켈리의 연설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세대는, 우리가 과연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류의 화합을 꾀하는 첫 세대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1982년부터 녹색당의 대중적 지지도는 확연하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1983년 총선에서 녹색당은 5.6%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연방의회에 26명의 녹색당 후보들이 진출한다. 페트라 켈리는 의정 활동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일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황별로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었어요.”

실력과 진정성 입증의 부담감 속
녹색당의 내분에 대중도 등 돌려
당을 떠난 뒤 반핵·반전 저술 작업

하지만, “정당반대당”을 추구했던 녹색당이 권력을 획득한 후부터 과연 어떤 정치를 펼칠지 대중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진보정당의 실력과 진정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녹색당을 압박했다. 녹색당의 공약들이 녹색당을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었다. 녹색당 회의의 모든 내용을 언론과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했던 ‘원칙’이 당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의정 활동이 처음이다 보니 우왕좌왕 헤매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꼴이었다. 확신도 없으면서 모두들 자기가 잘났다고 고집만 부려대고 있었다.” 페트라 켈리는 깊이 좌절했다.

페트라 켈리는 무엇보다 권력 부패 방지를 위해 의원 임기 4년을 2년씩 나누어 맡기로 결정한 당규가 “정치적으로 재앙을 초래할 뿐 아니라 먼저 뽑힌 의원이나 승계받는 의원 모두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많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민주주의가 제도, 의지, 이상 어느 하나만으로도 또 그 모든 것을 다 결합시킨다 해도 단숨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정작 녹색당 안에서 그녀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1985년 1월 녹색당 의원들에게 “제가 의회에 남아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1985년 3월 녹색당 당원들은 “약속대로” 그녀에게 자리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페트라 켈리가 의원직에서 물러나지 않자, 창당 주역이었던 그녀는 동료들로부터 적폐로 몰리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녹색당이 내분으로 진흙탕 싸움에 빠지자, 대중도 차갑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45세에 비극적 죽음을 맞았지만
진보정당의 씨를 뿌리고 키우는 데
혼신을 다한 삶은 헛되지 않아

1990년, 서독의 녹색당은 득표율 4.9%로 의회에서 쫓겨나게 된다. 페트라 켈리는 의원직은 물론 녹색당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녀는 사람이 권력을 획득해 이룰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해왔지만, 현실 정치에서 권력이 사람을 길들이게 되는 과정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불안이 엄습했다. 우울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페트라 켈리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녹색당의 미래를 비관하지 않았다. “실패의 근본적 원인이 정치적 문제보다 인간적 미성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치 또한 사람의 일입니다”라고 당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자신은 반핵·반전을 주제로 저술작업에 매달렸다. 그녀의 재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1992년 10월 45세의 페트라 켈리는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게르트 바스티안과 동반자살을 선택했다는 경찰의 발표를 그녀의 지인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비극적인 죽음이 결코 페트라 켈리의 생애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녹색당이 자라고 힘을 키우는 일에 혼신을 다해 모든 정열을 바쳤다.” 독일 녹색당은 현재 20% 안팎의 지지율을 유지하며, 2021년 9월 총선에서 제1야당을 목표로 뛰고 있다. 페트라 켈리의 삶은 조금도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진보정당이 새로운 정치를 펼치는 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18)환경·평화 지키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녹색 깃발을 들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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