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둘러싼 의혹…한국 외교의 미래는

김찬호 기자

아들 논란뿐 아니라 정책 실패 되풀이 우려도


지난 4월 20일 박진 외교부 장관 후보자(오른쪽)가 한국을 방문한 성김 미국 대북 특별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박진 의원실 제공

지난 4월 20일 박진 외교부 장관 후보자(오른쪽)가 한국을 방문한 성김 미국 대북 특별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박진 의원실 제공

“청와대가 모든 걸 결정하면서 실무 부서의 역할이 애매해졌다.” 지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만난 당시 윤석열 캠프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청와대가 대북관계를 중심으로 외교정책을 결정하면서 주변국과의 관계 설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다. 외교부 본연의 기능을 되살려 한미관계를 포함한 주변국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게 당시 윤석열 후보와 캠프의 공통 인식이었다.

5월 출범을 앞둔 윤석열 정부는 약속을 잊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윤 당선인은 첫 외교부 장관으로 4선 의원이자 속칭 ‘미국통’으로 알려진 박진 국민의힘 의원을 지명했다. 일반적으로 현직 의원의 장관 임명은 해당 부처에 힘을 싣는 의도로 해석된다. 또 박 후보자에게는 ‘한미관계 강화’, ‘북한의 도발 억제’, ‘경제안보 대비’ 등의 임무가 주어졌다. 차기 정부가 국정운영 목표로 밝힌 내용 대부분이 신임 외교부 장관의 업무가 된 셈이다.

박 후보자의 등장으로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은 보다 명확해졌다. 하지만 박 후보자가 한국 외교의 방향타를 틀어쥐고 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서울대, 60대, 남자로 구성된 이른바 ‘서육남’ 장관인사의 대표사례가 박 후보자다.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까지 제기되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서육남’ 장관의 대표주자

박 후보자는 1956년 서울 종로 출생이다. 윤 당선인과는 서울대 법대 선후배 사이다. 학부 재학 중이던 1977년 외무고시(11회)에 합격했다. 외무사무관으로 일한 경력은 4개월 남짓이다. 1978년 3월 서울대 법대 석사 진학을 선택했고, 학위를 받은 뒤 해군장교로 입대했다. 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친 박 후보자가 선택한 건 유학이었다. 1985년 미국 하버드대 정책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94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미국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박 후보자가 한국으로 복귀한 시점은 1993년이다. 영국 뉴캐슬대에서 정치학 교수 생활을 하던 중 김영삼 정부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영어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특히 1993년 방한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조깅 회담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정치는 2002년 16대 국회 재보궐선거로 입문했다. 종로에서 출마해 당선됐는데 17~18대 총선에서도 내리 당선됐다.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잠시 정계와 멀어졌지만 21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강남구을로 옮겨 4선에 성공했다. 오랜 의정활동에서 활약한 분야 역시 외교영역이다.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 한영협회, 한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윤 당선인은 박 후보자를 소개하며 “2008년에는 한미의원외교협회 단장을 지내며 조 바이든 당시 미 상원외교위원장(현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가질 정도로 대미외교 전략통으로 인정받고 있다”며 “외교현장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우리 외교를 정상화하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연대를 다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로 거듭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후보자는 외교관, 교수, 미국 변호사, 정치인 등의 삶을 넘나들었다. 경력을 빼곡히 채운 서울대, 고시, 법조인 관련 내용은 그가 한국사회에서 성공의 척도로 인정받는 길을 걸어왔음을 잘 보여준다. 심지어 이런 행보가 만드는 문제들에서도 예외가 없다. 우선 김앤장 법률사무소 경력이 인증서처럼 따라붙었다.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 전인 2000년 8월부터 2001년 5월까지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일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치를 위해 희생하겠다”며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에도 2013년 8월부터 2016년 1월까지 두 번째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을 지냈다. 그가 고문을 그만둔 건 20대 총선을 3개월여 앞둔 시점이었다. 종로에서 재기를 노렸지만 당시 오세훈 후보(현 서울시장)와의 공천 경쟁에서 밀리며 출마가 무산됐다.

아들 문제 역시 어김이 없다. 박 후보자의 미국 유학 시절인 1983년에 태어난 아들 박씨는 서울외국인학교를 다니다 카이스트에 재외국민 전형으로 2002년 9월 입학했다. 박씨는 2002년 7월 미국 국적을 포기했는데 같은해 8월 박 후보자는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박씨는 악성종양에 의한 질병으로 병역면제 처분(6급)을 받았다. 지금은 토론토에 거주하며 카이스트 동문이 해외에 차린 도박사이트 운영업체의 관리자를 맡고 있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

박진 둘러싼 의혹…한국 외교의 미래는

■그때 그 인물, 그때 그 정책

장관 후보자에게 살펴봐야 할 건 법적·도덕적 논란만이 아니다. 청문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아도 임명을 강행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볼 때 정책변화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박 후보자는 지난 4월 18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정책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첫 발언이 ‘북한 문제’인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반도 문제에 ‘외교부’가 전면에 나서는 건 기존 체제의 변화를 의미한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 양자관계 개선을 바탕으로 주변국의 협조를 이끌어내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외교부’가 주도하는 대북정책은 해당 기조의 전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윤 당선인부터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연계를 통해 북한의 도발에 대한 억제와 압박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박 후보자 역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며 “윤석열 정부는 북한에 대해 상식이 통하는 균형 있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힘을 실었다.

문제는 해당 변화가 검증된 성공방식이거나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아니라는 점이다. 박 후보자부터 새로운 인물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일하며 담당했던 첫 임무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담 통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여년 전의 일이다. 정책적 변화 역시 이미 실패한 방식의 되풀이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나온다. 박 후보자는 이명박 정부 인수위의 외교통일안보분과 간사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인수위가 내세운 건 ‘성숙한 세계국가를 위한 실용 외교 및 안보 정책’이었다. 이는 ‘비핵·개방 3000’이다.

박 후보자는 “지금의 유화정책만으로는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을 막을 수 없다”고 정책변화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경험, 실패했던 정책만으로 북핵 능력이 고도화된 현 상황에 맞설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가 따라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분명 변화는 변화인데 그 방향이 미래가 아닌 과거로의 변화”라며 “지난 5년간 미국과 멀어졌기 때문에 다음 5년은 미국과 밀착하겠다는 것 외에 유의미한 변화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Today`s HOT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폭격 맞은 라파
해리슨 튤립 축제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