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쓸데없는(것처럼 보이는) 데 돈 쓰는 곳, 인간 지성의 프런티어

이종필 교수

‘김범수 이론물리연구소’는 어떤가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과학은 태동할 때부터
“그게 밥 먹여 주냐?”는 핀잔을
무릅쓴 후원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최근 김범수 카카오 회장이 자기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해서 화제이다. 그가 보유한 카카오 주식이 약 10조원을 웃돈다고 하니 최소 5조원 이상 천문학적인 액수를 기부하는 셈이다. 얼마지 않아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의장도 자기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서약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도 기부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대미문의 일이다보니 염치 불고하고 그 용처에 대해 욕심 가득한 상상도 하게 된다. 단 몇 퍼센트라도 부디 기초과학 분야를 한번 돌아봐주기 바란다.

과학은 근대에 태동할 때부터 후원자들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6세기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덴마크의 튀코 브라헤는 20년 넘는 세월 동안 밤하늘을 관측해 당대 최고 수준의 방대한 관측자료를 남겼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조수였던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운동의 3법칙을 발견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훗날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브라헤가 오랜 세월 방대하고도 질 좋은 천문 관측자료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덴마크 왕 프레데릭 2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2세는 브라헤에게 벤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섬을 하나 하사했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했다. 브라헤는 1576년 그 섬에 우라니보르크라는 천문대를 세웠다.

그러나 프레데릭 2세가 죽자 상황이 바뀌었다. 후임 크리스티안 4세는 브라헤에 대한 지원을 대폭 삭감했다. 이후 브라헤는 덴마크를 떠나 프라하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로 임명되었다. 프라하에서 브라헤는 자신의 자료를 분석해줄 수학자인 케플러를 만났다. 불행히도 브라헤는 케플러와 만난 지 불과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케플러가 브라헤의 뒤를 이어 황실 수학자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덕분에 케플러는 8년에 걸친 연구 끝에 행성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케플러와 동시대를 살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유럽 2000년을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혁파하고 망원경을 통한 관측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적 천체관을 붕괴시킨 근대과학의 아버지이다. 갈릴레이는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을 지배했던, 르네상스의 열렬한 후원자로도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갈릴레이는 1610년 초 목성의 네 위성을 자신의 망원경으로 발견하고는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메디치의 별을 헌사받은 코시모 2세는 이에 흡족해하며 갈릴레이를 메디치 가문의 궁정 철학자로 임명했다. 갈릴레이는 물론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였지만 어쨌든 메디치 가문의 궁정 철학자라는 직책이 영향력을 더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갈릴레이의 여러 발견들과 주장을 로마의 실력자들도 쉬 물리치지 못했다.

현대과학이 출현한 20세기에도 유력자들의 후원은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의 사업가인 존 후커는 윌슨산 천문대에 설치된 100인치 망원경을 위해 거액을 지불했다. 1917년 완성된 이 ‘후커 망원경’은 20세기 가장 유명한 망원경으로서 안드로메다가 외계은하임을 밝혀 1920년대의 이른바 ‘대논쟁’을 종식시켰고 외계은하가 멀어지는 양상인 허블의 법칙을 발견해 우주가 팽창함을 보였으며 암흑물질의 증거도 확인했다.

미국 뉴저지의 남매 사업가인 루이스 뱀버거와 캐럴라인 뱀버거 풀드는 1930년 500만달러를 기부해 고등연구소(ISA) 설립을 도왔다. 고등연구소의 수학부 초대 교수 중 한 명은 아인슈타인이었다. 그 이후로도 전 세계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이 고등연구소를 거쳐 갔다. 지금은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는 에드워드 위튼이 재직 중이다.

블랙베리의 창업자 마이크 라자리디스는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1999년 캐나다에 페리미터 이론물리연구소(1억달러)를, 2002년에는 양자컴퓨팅 연구소를 설립했다. 러시아 출신 억만장자 유리 밀러는 2015년 외계지적생명체를 탐색하는 ‘브레이크스루 이니셔티브 프로젝트’에 수억달러를 기부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작년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일 때 한국 정부와 백신 및 치료제 개발에 협력하기로 했고 국내 업체에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5조원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과학 설비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강입자충돌기(LHC) 건설에 약 10조원이 투입되었다. 2012년 LHC는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 입자를 발견해 20세기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실험적으로 완성했다. 2009년 우주로 발사돼 빅뱅의 화석이라 불리는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한 플랑크 위성은 약 1조원 프로젝트였다. 아인슈타인이 그 존재를 예측한 지 꼭 100년 만인 2016년 중력파를 발견한 미국 레이저간섭중력파관측소(LIGO)에도 약 1조원이 투입되었다. 일본의 입자검출장치인 Belle에는 각종 관련 설비 건설과 유지비 등을 다해서 10년 동안 약 7000억원이 들어갔다. Belle에서 발견한 주요 성과들 덕분에 기반 이론을 처음 제시한 일본의 고바야시와 마스카와는 2008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5조원의 ‘김범수 기금’이면 LHC의 절반, 또는 플랑크 위성이나 LIGO 5대, 또는 Belle 7대를 건설·유지할 수 있다.

갈릴레이 시절은 과학이라는 말도 없던 때라 전문직업인으로서의 과학자도 존재하지 않아 절대권력의 후원은 근대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에는 국가가 후원자 역할을 대신했으나 여전히 한계는 있다. 대형망원경이나 입자가속기처럼 이른바 ‘빅 사이언스(big science)’가 필요한 부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한 기초과학의 프런티어 영역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특별히 보호하지 않으면 곧 멸종될 북극곰과도 비슷한 처지이다.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13)쓸데없는(것처럼 보이는) 데 돈 쓰는 곳, 인간 지성의 프런티어

자본주의 논리에서 벗어나 지성의 경계를 확정짓고,
거기서 한발을 더 내디디는 데에 과학의 가치가 있다

김범수 의장의 통 큰 기부 약속이
과학, 그중에서도 ‘가장 비경제적인’ 영역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현대의 가장 중요한 후견인인 정부도 과학을 대할 때는 자본주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한국 정부는 대대로 기초과학에조차 ‘기부’나 ‘후원’보다는 ‘투자’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즉, 지금 세금을 100원 투입해 내년에 110원 회수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진정한 후원은 100원을 그냥 비용으로 소모하는 것이다. 혈세를 들여 반달가슴곰을 보호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득 때문이 아니다. 생물종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 환경의 건강함과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지금은 정보로서의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전 과정이 디지털 중심으로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기이다. 지식의 프런티어를 얼마나 더 사수하고 있느냐, 누가 인간 인식의 최전선의 경계를 넘어 한발이라도 더 나가느냐가 미래 생존을 좌우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20~21세기의 빅 사이언스에 들어가는 돈이 한국 경제 규모에 비해 그리 무리한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5조원이면 사실 천문학적인 액수이지만 그래도 한국의 한 성공한 사업가가 기부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기초과학에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국가경제가 망하지 않는다. 단 5년 동안 4대강에 22조원을 내다버리고도 나라가 멀쩡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나라다. 여기에 기업가들이 동참한다면 다른 과학 선진국들이 부럽지 않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재용 입자가속기센터, 최태원 우주망원경이 속속 등장한다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이해와 상상력이 급속히 증대될 것이다. 그 결과로 해당 개인이나 기업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브랜드 가치도 올라가지 않을까?

사실 부자들의 선한 의지만 믿고 손을 벌리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부를 중심으로 한 공적 시스템이 잘 작동해야 안전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과학을 바라보는 정부의 관점과 철학이 과학자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1조5000억원이 투입돼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사업이라는 중이온가속기 사업에 정부와 각종 위원회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바람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현장 과학자들의 호소가 들린다. 교육부에서는 현장에 당장 투입될 인재를 키운다며 대학에 구조조정을 강제하고 있다. 그 결과 기초과학 관련 학과들은 말 그대로 망하기 직전이다. 돈 되는 분야는 정부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대학과 기업의 자율에 맡기면 된다. 정부가 할 일은 정부가 굳이 나서지 않으면 멸종되는 분야를 보호하는 것이다. 정부조차 외면한다면 부자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기초과학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그게 밥 먹여주냐?”는 핀잔을 듣게 마련이다. 수백년 동안 지역을 불문하고 똑같은 질문을 받아온 과학자들이 이 질문에 대해 마련한 모범답안이 여럿 있다. 전기와 트랜지스터, 핵무기, GPS 그리고 최근의 양자통신이나 양자컴퓨터도 그 사례들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밥 먹여줄까? ‘모나리자’는 직접 밥을 먹여주는 능력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예술적 능력의 한 극한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가치를 갖고 있다. 그 가치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돈을 벌어주는 기술이 아니다. 인간 지성의 경계를 확정짓고 거기서 다시 한발을 내디디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 과학이 밥 먹여주느냐는 질문은 2007년 세상에 등장한 아이폰이라는 기계의 가치를 그 가격이나 판매대수로만 따지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아이폰은 모바일 혁명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래서 나는 ‘김범수 인공지능연구소’나 ‘김범수 바이오테크’보다 ‘김범수 이론물리연구소’가 생겼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론물리연구소는 가장 돈벌이와 거리가 먼, 가장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등연구소 초대 소장인 플렉스너의 말을 빌리자면 “쓸데없는 지식의 유용함”이랄까, 바로 그곳이 인간 지성의 프런티어이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13)쓸데없는(것처럼 보이는) 데 돈 쓰는 곳, 인간 지성의 프런티어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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