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놀라게 한 ‘수프 깡통’…편견에 가리면 “이게 예술이냐”

박주용 교수

(29) 미래에 눈을 감은 자의 이야기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정원에서 올려다본 장미 조형물과 건물에 비친 뉴욕의 하늘. MoMA는 1929년 설립되어 현대미술의 전시와 발전에 세계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현대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주용 교수 제공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정원에서 올려다본 장미 조형물과 건물에 비친 뉴욕의 하늘. MoMA는 1929년 설립되어 현대미술의 전시와 발전에 세계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현대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주용 교수 제공

새로움을 찾는 ‘창의성’에 눈감으면 ‘고정관념=진리’가 되어 낡은 사고와 질서가 공고해진다
로이 릭턴스타인의 ‘쾅!’이나 앤디 워홀의 캠블 수프 통·소변기를 엎어놓은 뒤샹의 ‘창작’이 예술이 되는 건
‘모나리자’ 같은 고전적 아름다움과 전통적 예술 가치를 해체하고 존재의 제약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워홀, 편하게 산다”며 작품 가치를 의심했던 나, 팝 아트라는 현대미술에 반하고도 150년 ‘변화의 총체’를 부정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갈망한다. 때로는 새로움이 가져다줄 색다른 느낌을 즐기기도 하지만, 내일이 오늘과 언제나 100% 다르기만 하다면 한순간도 예외 없이 길을 잃어버린 과객처럼 피로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하게 생겨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든지 ‘역사는 반복된다’는 표현을 곧잘 쓴다.

그런데 이 표현들이 글자 그대로 사실일 수는 없다. 글자 그대로 역사는 반복되고 세상은 언제나 똑같다면 우리는 백년 전과 똑같이 살고 있고, 백년 뒤의 후손도 우리와 똑같이 살고 있을 것인데,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역사는 반복된다’보다 조금 더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을 종종 접하게 되는데, 바로 “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but it rhymes” 즉 “역사는 반복되진 않지만 각운은 맞는다”이다. 통상적으로는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이 남긴 말로 알려져 있는데, 영어권의 시와 노랫말에서는 각운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국 출신 포크가수 캣 스티븐스(1948~)의 ‘Morning Has Broken’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Sweet the rain’s new fall, sunlit from Heaven
Like the first dewfall on the first grass
Praise for the sweetness of the wet garden
Sprung in completeness where His feet pass
(달콤한 새 비는 천국에서 비추고
처음 자란 잔디에 내린 첫 이슬처럼
촉촉이 젖은 들판의 달콤함을 찬양하자
그님의 발길 닿는 곳에 완전하게 자라난)

Heaven은 garden과, grass는 pass와 각각 각운이 맞게 된다. 뜻은 다르지만 공통된 각운이라는 연결성은 남아 있다. 트웨인은 역사의 흐름이 여러 시대를 통해 비슷비슷한 모습을 띠기는 하지만 똑같이 반복되진 않으므로 언제든 우리를 놀라게 할 잠재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세상사에 있는 이러한 미묘한 연계성을 무시한 채 ‘역사는 반복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위험한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첫째,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인간의 창의성(creativity)에 눈을 감고, 또 그것을 자연이 뜻하지 않게 도와주는 ‘행운의 우연성’(serendipity)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둘째, 새로움을 위한 인간의 의지가 꺾이면 ‘고정관념=진리’가 되어 낡은 사고와 질서가 공고해진다.

명색이 인간의 창의성을 고민하고 미래를 논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필자조차 이러한 굳어버린 인식과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최근 한 동료와 ‘현대 미술의 가치’를 주제로 대화하며 깨닫게 된 사실이다.

■현대미술을 이해한다는 것

필자가 대학생 시절, 한 미술관 벽면을 가득 채운 로이 릭턴스타인(1923~1997)의 ‘쾅!(WHAAM!)’을 보자 눈과 마음을 ‘팝 아트(Pop Art)’라는 현대미술에 빼앗겨버렸다. 그 순간 느껴지는 기분 좋은 자극이 바로 미술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팝 아트’는 1950년대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태동하여 만화, 광고, 일상의 물건처럼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적 상품의 이미지들로부터 그 맥락을 지운 뒤 여럿을 결합함으로써 현실을 풍자한 작품들을 일컫는다. 가판대 잡지에 실릴 만한 만화를 거대한 벽에 채워넣은 릭턴스타인이나 미국의 대량 가공 식품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캠블 수프 통으로 상징되는 앤디 워홀(1928~1987)의 작품들은 1980년대 이후 소비의 시대에 아니메를 보며 자라난 필자를 매혹시켰고, 이로부터 몇 년 뒤 현대미술과 예술영화 신(scene)의 중심인 뉴욕 현대미술관(MoMA·Museum of Modern Art)을 방문하여 보낸 시간은 황홀경 그 자체였다.

20세기 팝아트의 전설인 앤디 워홀의 작품 ‘캠블 수프 통조림’.

20세기 팝아트의 전설인 앤디 워홀의 작품 ‘캠블 수프 통조림’.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좋아하던 팝 아트가 나로 하여금 현대미술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갖게 한 일이 발생했다. 몇 년 뒤 대학원생으로 다니던 대학교 미술관에 앤디 워홀 특별 전시가 있다고 해서 들렀는데, 거기에서 캠블 수프 통 실물에 앤디 워홀이 친필 사인을 해놓은 것을 보았다. 유리로 만들어진 케이스 안에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히 전시된 그것은 앤디 워홀의 사인을 빼고는 영락없는 캠블 수프 통이었다. 아니면 정말 그와 똑같은 것이었거나. 함께 갔던 연구실 후배와 나는 이런 말을 주고받은 기억이 난다.

“편하게 잘 사네.”(“He’s got it easy, huh?”)

왜 갑자기 나는 김이 빠져버렸을까? 이미지의 변형, 실제 실크스크린 인쇄, 눈을 끌도록 하는 미술관 벽 설치 같은 노력은 있어야 미술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에게는 손을 놀려 사인만 하는 걸로 ‘창작’을 끝낸 워홀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던 것 같다.

내가 던진 저런 질문은 사실 현대미술이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듣고 있긴 한다. “이런 건 우리 애도 그리겠다” “너무 멀리 간 거 아니야?”, 짧게는 “이게 뭐야?”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들이 수백억원의 돈을 받으며 팔려나갈 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소문에 몇 초라도 제대로 보려면 몇 시간씩 긴 줄에서 기다려야 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고전적이고 얌전한 아름다움을 그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19~20세기에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전통적인 예술의 가치가 해체되던 것은 미술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음악도 비슷한 일을 겪어왔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1882~1971)가 1913년 파리에서 불협화음과 새로운 박동으로 가득 찬 발레 <봄의 제전>을 초연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일(신성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파괴한 길거리에서 시위까지 했다고 한다. 이것이 미술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이것이 음악인가?를 물었던 것이다)을 현대음악의 시작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기존 미감의 파괴와 전통에 대한 도발을 특징으로 하며 발전하던 20세기 현대음악사 또한 1969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1928~2007)이라는 독일 작곡가의 음악 때문에 벌어진 ‘프레스코(Fresco)’ 스캔들과 같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기괴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슈토크하우젠의 지시문을 본 연주자들은 “알았다. 잘리기 싫어서 연주한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였는데, 다섯 시간으로 예정됐던 연주에서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듣기가 쉽지만은 않은 기괴한 소리로 가득 찬 음악 공연에서는 한 노인 여성이 무대 위로 올라가 연주자들을 지팡이로 내려치며 “그만 좀 하라고!” 역성을 냈다는 소리도 들리던 것이 이 시기이다.

‘아이들이 마구 그려댄 것 같아서’ 미술 같지 않은 미술이, ‘조화로운 멜로디가 하나도 없어서’ 음악 같지 않은 음악이 큰 인기를 끄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다음의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 이런 것에 돈과 시간을 들이는 사람들이 잘못됐다.
2. 이런 것의 가치를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 못 따라가고 있다.

“이 사람 편하게 산다” “우리 애도 그리겠다” “너무 멀리 간 것 아닌가?”라는 질문은 1번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고, 나도 앤디 워홀의 서명을 본 이후 그 인식을 갖고 살았던 것이다.

■눈감은 자의 위험성

그러한 나의 인식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아까의 그 동료분과의 대화였다. 오랜만에 늦은 시간에 술과 음식을 즐기며 예술, 과학, 그리고 그것들의 가치에 대해 중구난방 이야기하는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의 요지는 ‘예술의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려고 힘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기억난다. 나의 가치관대로만, 나의 방식대로만 이해하려다가 그 가치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교롭게도 그다음날 <네 눈엔 뭐가 보이는 거냐?(What are you looking at?)>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185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 미술사를 풀어놓은 대중서인데, 그 표지가 바로 앤디 워홀의 캠블 토마토 수프 통이니 이 순간 이처럼 나에게 맞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럽을 문화, 정신적으로 지배했던 기독교회나 돈 많은 귀족들에게 주문을 받아 그려주는 것이 미술이던 시기를 벗어나 지금의 모습을 갖춰가는 역사를 훑어 읽던 중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토마토 수프 통에 서명을 한 앤디 워홀이나 기성품인 소변기를 엎어놓은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창작’이 예술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려운 물리적 행동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동이 갖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들이 미술이 된 것은 ‘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다른 배관들과 맞추어 튼튼하게 설치해야 한다’는 규칙을 지킬 때만 존재의 의미가 있었던 소변기를 그러한 제약에서 해방시켜버린 것, 단순한 통조림 광고 사진에서 시작한 이미지를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설치하는 미술품으로 승화시켰다가 다시 실물로 돌아가버린 일의 ‘예술적 의미’가 그것들을 예술로 만든다는 말이었다.

만약에 이것이 정답이라면(아니 ‘유일한 정답’은 아니라고 해도 여러 가지 정답 가운데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편하게 산다”는 현대미술에 대한 편견으로 나 스스로를 정답으로부터 가리고 지난 150년 동안 사람들이 이룩해온 변화의 총체를 부정해버리고 있던 것이다.

다음번엔 이와 같은 선입견이 문명이나 사회 발전을 어떻게 가로막을 수 있는지 계속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세상을 놀라게 한 ‘수프 깡통’…편견에 가리면 “이게 예술이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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