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없던 ‘병의 뿌리’를 찾아…속절없던 ‘죽음’을 뿌리치다

김응빈 교수

(47) 탄저병과 코흐원칙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긴 장마 뒤 이어진 무더위에 설상가상으로 농가에 병충해 비상이 걸렸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들려온다. 특히 복숭아와 고추 등에 퍼지고 있는 탄저병 피해가 심각하다고 한다. 탄저는 숯처럼 검은(炭·숯 탄) 부스럼(疽·등창 저)이라는 뜻이다. 몇몇 곰팡이가 일으키는 탄저병에 걸린 작물의 잎과 열매에는 병명대로 검은색 점무늬가 나타난다. 동물에게도 탄저병이 생기는데, 이 경우에는 세균이 병원체다. 일반적으로 그냥 탄저병이라 하면 동물 탄저병으로 통한다.

탄저병은 주로 초식 동물에게 발생하지만,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인수공통감염병’이다. 현재 알려진 감염병 가운데 족히 70% 정도가 인수공통감염 미생물에 의한 것이다. 이런 미생물은 동물, 주로 가축에서 사람으로 넘어왔다. 인류 최초의 탄저병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과 함께 가축화가 가장 먼저 진행된 지역이다.

역사에 기록된 탄저병

출애굽기에 나오는 가축 역병도 탄저병의 사례로 보지만 근거는 미약
위구르 제국을 멸망의 길로 밀어 넣은 것도 탄저균으로 추정된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다섯 번째인 ‘가축이 죽는 역병’ 또는 기원전 700년 무렵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시작하며 서술한 ‘아폴론의 역병’을 탄저병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근거가 미약하다. 고대 기록 가운데 탄저병으로 짐작되는 가장 구체적인 서술은 기원전 70~기원전 19년에 살았던 로마의 시인 마로(Publius Vergilius Maro)가 남긴 농경시 정도다.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그곳에서 무서운 역병이 일어나 따뜻한 초가을에 양 떼를 차례로 쓰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동물을 죽였다. 그 죽음마저도 쉽지 않았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열이 동물의 핏줄을 타고 퍼져 살을 오그라들게 했다.”

서양의 경우 탄저병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아닌 확실한 임상 기록은 1752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보다 무려 300여년이나 앞선 기록이 우리나라에 있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명으로 정인지, 김종서 등이 편찬하기 시작해 문종 원년(1451년)에 완성한 <고려사>를 보면 “충렬왕 5년(1279년) 12월 경상도에서 우역(牛疫)이 돌았는데 병든 소를 잡은 사람이 불에 덴 것처럼 손의 살이 벗겨져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에서 도축자로 탄저병이 전염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 정확히 언제부터 탄저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에 기록된 시기가 심상치 않다. 1259년, 고려 고종은 30년에 걸친 고려-몽골 전쟁을 강화(講和)로 마무리 지으면서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자 몽골은 고려 국왕이 직접 찾아와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태자(훗날 원종)를 대신 보내는 나름의 묘책으로 응했다. 그런데 태자 일행이 몽골로 가던 중 몽케 칸(Khan·몽골에서 군주를 이르던 말)이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했다. 큰형 몽케가 급사하자, 몽골에서는 칭기즈 칸의 손자들 사이에 칸의 자리를 두고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몽케의 네 아들은 모두 너무 어려서 왕권 다툼 상대가 되지 못했고, 몽케의 세 동생 가운데 나이가 가장 위인 쿠빌라이와 막내 아리크부카가 치열하게 맞섰다. 세간에서는 수도 카라코룸에 있는 아리크부카의 승리를 점쳤다. 그런데 고려 태자는 이런 대세론을 거스르는 판단을 내리고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쿠빌라이는 30년 동안 공격하고도 끝내 정복하지 못한 고려의 태자가 방문하자 이를 하늘이 자신에게 칸의 자리를 허락하는 징표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1260년 고려 제24대 왕위에 오른 원종은 쿠빌라이 칸과의 인맥을 사돈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일련의 사실에 관한 역사적 해석은 역사가에게 맡긴다. 다만, 역사적 사실은 1279년 탄저병 발병 이전에 원나라 관료와 군대가 고려 땅에 대거 들어왔음을 입증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탄저병은 744년 돌궐 제국을 무너뜨리고 한때 당나라까지 겁박했던 위구르 제국을 840년 멸망의 길로 밀어 넣은 주된 원인으로 추정된다. 이는 몽골 초원에 탄저균이 오래전부터 산재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곳에 살던 몽골인이 기마 부대와 함께 수많은 우마를 가지고 고려로 밀려왔다. 그 결과, 환경이 다른 먼 타국에서 한꺼번에 유입된 동물과 토종 가축 사이에 의도치 않은 만남의 장이 펼쳐졌다. 만약 이방 동물에 탄저균이 묻어 왔다면, 이들이 새로운 숙주로 옮아가는 건 시간문제였을 터이다.

탄저병 원인 규명

탄저병과 특정 세균의 인과관계를 처음 밝힌 독일인 의사 코흐는
미생물 콜로니를 얻을 수 있는 쉽고 편리한 방법을 고안해냈고
결핵·콜레라 원인균까지 색출, 현대 미생물학의 토대를 완성했다

사람이 탄저병에 걸리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감염된 동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피부나 호흡기를 통해 걸리거나 감염된 동물 고기를 익히지 않고 날로 먹어서 걸린다. 이에 따라 탄저병은 감염 경로별로 피부 탄저병, 호흡기 탄저병, 위장관 탄저병으로 구분한다. 탄저균이 피부에 감염되면 가려우면서 부스럼과 물집 따위가 생긴다. 며칠 지나면 감염 부위에 고름이 생기면서 검게 변한다. 탄저병에 석탄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스라키스(anthrakis)’에서 유래한 ‘안스락스(anthrax)’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발병 초기에 폐렴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호흡기 탄저병은 세 가지 탄저병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위장관 탄저병은 발열과 복통을 동반한다.

탄저병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로베르트 코흐. 로베르트코흐연구소

탄저병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로베르트 코흐. 로베르트코흐연구소

탄저병이 특정 세균에 의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처음으로 밝혀낸 인물은 독일 의사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다.

1866년 의대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결혼을 하고 시골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코흐는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승리의 기쁨을 안고 돌아온 그는 작은 도시 볼슈타인(현재 폴란드 영토)에 정착했다. 그 무렵 볼슈타인 지역에는 탄저병이 만연해 있었다. 4년에 걸쳐 인명피해만 528명이었고, 가축 5만6000마리가 죽어 나갔다.

코흐는 실험 동물을 동원해 단계적으로 탄저병의 원인 규명에 착수했다. 우선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피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막대 모양(탄저균) 입자가 건강한 동물의 피에는 없고 병에 걸린 동물의 것에만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특정 입자의 존재는 그 병으로 인한 결과일 수도 있으므로, 그것이 탄저병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탄저병에 걸려 죽은 동물의 피를 뽑아서 건강한 실험 동물에게 주사했다. 결국 그 동물은 탄저병으로 죽었다. 여기까지는 앞선 사실을 검증한 수준이고, 코흐의 비범함은 이제부터 빛을 발한다.

죽은 실험용 쥐를 부검한 결과, 혈액뿐만 아니라 림프샘과 지라(비장)에서도 문제의 막대 모양 입자가 발견되었다. 감염된 지라에서 뽑은 피를 두 번째 실험용 쥐에게 주입했더니 같은 결과가 나왔다. 피 한 방울에 있던 소수의 막대 모양 입자가 동물의 몸속에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코흐는 이런 접종을 반복하면서 막대 모양 입자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관찰했다. 그것은 길이가 다양했고, 긴 막대 모양은 중간에 칼집이 난 것처럼 보이는 게 많았다. 마치 분리되려는 듯했다. 이를 보고 코흐는 막대 모양 입자가 살아 있는 세균(박테리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1876년 코흐가 발표한 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코흐가 해결해야 할 다음 과제는 문제의 미생물을 분리해서 키워내는 ‘순수배양’이었다.

보통 순수배양은 ‘콜로니(colony)’ 확보로 시작한다. 여기서 콜로니는 미생물 세포 1개가 세포분열을 거듭해 모인 미생물 무리를 가리키는 생물학 용어다. 미생물 세포 1개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지만, 이들의 수가 어느 정도 많아지면 무리를 맨눈으로도 볼 수 있다. 코흐는 미생물 콜로니를 얻을 수 있는 쉽고 편리한 방법을 고안했다(우무와 ‘퓨어 컬처’, 경향신문 2021년 7월9일자 14면 참조).

이제 표적 미생물을 손쉽게 배양할 수 있게 된 코흐는 결핵(1882), 콜레라(1883) 원인균을 연이어 색출했고, 감염병의 인과관계를 확증할 수 있는 네 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코흐원칙(Koch’s postulate)’이라고 부르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⑴ 특정 감염병에 걸린 개체에는 특정 미생물이 있다. ⑵ 문제의 미생물을 인공배지에서 순수배양할 수 있다. ⑶ 순수배양한 표적 미생물을 건강한 실험 동물에게 감염시키면 같은 감염병이 유발된다. ⑷ 감염된 개체에서 분리한 문제의 미생물이 처음에 발견한 미생물과 같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미생물학의 기틀 완성한 개척자

감염병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의 기준이 되는 코흐원칙 덕분에 이후 수많은 감염병 원인균이 속속 확인되었다. 이렇게 미생물학의 기틀을 다진 코흐는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지금도 코흐가 개발한 순수배양 기술은 전 세계 미생물학 실험실에서 그대로 사용하며, 코흐원칙 역시 여전히 역학조사에서 중요한 길잡이다.

기술과 지식이 진보하면서 몇 가지가 수정, 보완되기는 했다. 순수배양에서는 유리 접시와 금속 루프가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으로 바뀌었고, 코흐원칙에는 몇 가지 예외가 생겼다. 예를 들어 병원성 미생물이 자라는 조건은 아주 까다롭다. 바이러스를 비롯한 절대기생성 병원체는 숙주세포 내에서만 증식하기 때문에 인공배지에서 키울 수 없다.

1939년 개봉된 영화 <로버트 코흐, 죽음의 퇴치자>는 그를 시골 의사에서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이후 뛰어난 연구 성과를 거두어 마침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는 국민 영웅으로 그려낸다.

탄저병과 결핵 등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의 원인 병원체를 규명해서 치료의 길을 연 공로를 생각하면 ‘죽음의 퇴치자’라는 별칭은 코흐에게 잘 어울린다. 안타까운 점은 프랑스의 파스퇴르와 함께 현대 미생물학의 토대를 완성하고 감염병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닦은 이 위대한 학자의 이야기가 나치의 프로파간다 소재로 쓰였다는 것이다.

김응빈 교수

[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 볼 수 없던 ‘병의 뿌리’를 찾아…속절없던 ‘죽음’을 뿌리치다

1998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입학처장과 생명시스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지은 책으로 <미생물과의 마이크로 인터뷰> <술, 질병, 전쟁: 미생물이 만든 역사> <온통 미생물 세상입니다> <생명과학, 바이오테크로 날개 달다> <미생물에게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나는 미생물과 산다> 등이 있다. 또한 유튜브 채널 ‘김응빈의 응생물학’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파트너 채널 ‘김응빈의 생물 수다’를 운영 중이다. 유튜브 채널 링크: https://www.youtube.com/@kimyesbio/featured. 네이버 채널 링크: https://contents.premium.naver.com/biotalkkim/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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