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의 쓸모…미안하다 몰라봐서

(46) 미생물을 보는 시각의 변천

19세기 중반까지 인류에게 미생물은 ‘박멸의 대상’
1895년 베이제린크 “미생물 연구, 생명현상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
학자들, ‘가장 다양한 물질대사 수행 생명체’ 가치 밝혀내며 유전학 정립에 기여

[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 ‘균’의 쓸모…미안하다 몰라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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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17세기 중반에 미생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그 영향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미생물학 선구자에게 미생물은 동식물처럼 인간과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악마 같은 존재였고 박멸의 대상이었다(자연발생설과 미생물 원인설(하): 숙명의 라이벌 경쟁, 경향신문 2022년 9월30일자 14면 참조). 이렇게 미생물과의 전쟁으로 출발한 초기 연구 성과는 미생물학 발전의 추동력인 동시에 ‘미생물=병원체’라는 막연한 적개심을 키우고 미생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하는 빌미가 되었다. 물론 이는 미생물학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구자들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더더욱 아니다. 감염병 원인 규명과 치료가 최우선 과제였던 당시에는 미생물의 또 다른 모습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감염이 아니라 환경과 생태 관점에서 미생물을 탐구하는 학자가 있었다. 그를 만나러 풍차의 나라로 가보자.

박멸의 대상에서 연구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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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미생물의 존재를 최초로 발견한 레이우엔훅(Anthony van Leeuwenhoek)은 델프트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다. 당시 국가 경제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국립 델프트공과대학교가 있다. 바로 이 대학교에 미생물학 황금기의 주류 학자들과는 달리 미생물을 병원체가 아닌 생물학, 특히 유전학과 생화학 연구 모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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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세균학부장으로 부임한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세균학 전공 책임을 맡기는 했지만 모든 미생물과 이와 관련된 기초 및 응용 연구를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아울러 미생물 연구가 생명현상을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자신의 신념을 내비쳤다.

베이제린크는 세균이 보여주는 다양한 대사 능력을 환경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미생물학이 유전과 변이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 곧 유전학 정립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뒤를 이은 클루이버(Albert Kluyver)는 물질대사를 이루는 생화학적 과정에 생명의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미생물 연구를 통해 유전학을 정립하려는 연구보다는 화학과 생물학을 통합하는 원리를 찾는 연구에 주력했다. 이 때문에 미생물이 유전학 모델로 사용되기까지는 베이제린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클루이버가 미생물을 생명현상 연구의 출발점으로 택한 이유는 미생물이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1926년 그는 ‘코끼리부터 뷰티르산균에 이르기까지 물질대사는 똑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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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담을 대략 30년 뒤, 프랑스 미생물학자 모노(Jacques Monod)가 ‘대장균에서 사실인 것은 코끼리에서도 사실’이라고 각색해 널리 알렸다.

파디·자코브·모노의 ‘파자마’ 실험

1940년대 초반 모노는 포도당과 함께 다른 당을 공급한 상태에서 대장균을 키우면, 성장곡선이 2개의 상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했다. 포도당이 소진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당을 섭취하는 대장균의 편식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모노는 이를 ‘이원적 생장’이라고 불렀다. 모노는 ‘효소적응’, 곧 효소가 특정 대사물질에 반응하면 비활성 형태에서 활성 형태로 바뀐다는 가설을 적용해 이원적 생장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몇 년 동안 후속 연구를 하면서 젖당이 대장균 세포 안으로 유입되면 젖당 유도체로 변형되어 젖당 분해효소의 활성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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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가 젖당 분해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 같은 건물(파스퇴르 연구소)의 다른 연구실에서는 자코브(Francois Jacob)라는 생물학자가 몇 해 앞서 발견된 접합 현상을 이용해 실험하고 있었다. 접합은 두 세균이 직접 접촉한 다음, 마치 우주선이 도킹하듯 두 세균 사이에 통로가 만들어지고 이 통로를 통해 한 세균에서 다른 세균으로 유전물질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를 활용해 자코브는 젖당 분해효소 유전자(z)와 이것의 합성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i)의 존재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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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파디(Arthur Pardee)가 모노의 실험실로 안식년을 보내러 왔다. 모노는 자코브, 파디와 함께 정상 유전자(z+, i+로 표시)를 변형시켜 돌연변이 유전자(z-, i-로 표시)를 지닌 대장균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이런 대장균에 접합을 이용해 정상 유전자를 공급했다. 그 결과, z+/i+ 대장균에서는 젖당이 있을 때만 젖당 분해효소가 만들어졌고, z+/i- 대장균에서는 젖당이 있든 없든 꾸준히 생산되었다.

이런 결과를 확인한 세 과학자는 대장균의 유전자 부위에서 무언가가 젖당 분해효소 생산을 방해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1959년 그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세 과학자 이름의 앞 두 글자씩을 따서 ‘파자마(PaJaMa) 실험’으로 유명해진 이 연구 성과는 대장균의 세포질에 있는 어떤 분자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한다. 말하자면, 세포질에 있는 어떤 분자가 유전자 발현을 차단하는데, 특정 신호를 주면 유전자 발현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생명, 정보의 흐름

세포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은 기본적으로 유전자 발현, 곧 DNA에 부호화되어 담겨 있는 정보를 읽어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정보는 두 단계를 거쳐 전달된다. 먼저 DNA에 있는 정보가 전령RNA(mRNA)로 전해진 다음, 이 정보에 따라 세포질에서 단백질을 합성한다. 첫 단계(DNA→mRNA)를 ‘전사’, 두 번째 단계(mRNA→단백질)를 ‘번역’이라고 하며, 전체 과정을 ‘중심원리(central dogma)’라고 부른다.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사를 ‘글이나 그림 따위를 옮기어 베낌’이라고 풀이한다. DNA와 RNA는 화학성분과 구조가 기본적으로 같으므로 전사는 적확한 용어다. 한편 RNA로 복사된 유전정보가 단백질로 전환되는 과정은 4개의 염기(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로 된 DNA 언어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 단백질 언어로 바뀌는 과정이다. 따라서 ‘번역’ 역시 탁월한 작명이다. 그런데 DNA에 저장된 유전정보가 단백질로 전환되는 전체 과정을 가리키는 과학 용어에 왜 하필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비판과 증명이 허용되지 않는 교리’를 뜻하는 ‘도그마(dogma)’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바로 유전정보의 흐름이 일방통행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 생명정보는 DNA에서 단백질로 흘러 들어가기만 할 뿐 절대로 흐름을 거슬러 되돌아 나오지 않는다.

파자마 실험은 전사 수준에서 유전자 발현(단백질 합성)을 조절하는 컨트롤타워의 실체를 밝히는 돌파구를 열었다. 정리하자면 유전정보의 흐름, 곧 유전자 발현의 결과로 물질대사가 일어난다. 유전자 발현과 물질대사는 서로 통합되어 있으며 상호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세포 안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대사 반응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대사 반응은 효소의 촉매작용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효소의 기능을 조절하면 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 거의 모든 효소는 단백질이다. 단백질 합성에는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은 세포 에너지 수급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세포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은 가정에서 전기를 아끼려는 노력과 닮은꼴이다. 냉장고는 항상 켜둔다. 에어컨은 여름철에 외부 온도에 따라 적절하게 가동한다. 실내등과 TV는 하루에도 여러 번 켰다 끄기를 반복한다. 모든 가전제품을 불필요하게 계속 켜놓으면 전기요금 폭탄을 맞을 것이고, 모든 가정에서 모든 가전제품을 계속 켜놓는다면 전력 수급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이 기본 원칙은 세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필요 없는 단백질이라면 애당초 mRNA부터 만들지 않는 게 효율적이다.

새롭게 정립된 생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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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구조와 중심원리 규명에 이어 대장균의 젖당 분해 조절 원리가 밝혀지자 지극히 추상적이고 복잡하게만 보이던 생명현상을, 간단명료한 디지털 코드인 DNA에 저장된 정보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탈부착하는 분자 무리의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모노는 1970년 분자생물학을 통해 정립된 새로운 생명관을 자신 있게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우연과 필연(Le Hasard et la Necessite)>이다. 이 책은 1960년대 절정에 달했던 분자생물학과 그 중심에 서 있던 모노의 자신감이 한껏 펼쳐진 작품이다. 모노의 관점에서 생명이란 ‘DNA 디지털 정보의 구현’이고 모든 생명체는 DNA라는 같은 소프트웨어를 내장한 하드웨어인 셈이다.

<우연과 필연>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격렬한 지적 논쟁을 일으켰다. 17세기 과학혁명 시기부터 이어진, 생명은 생물이 가진 생명력에서 비롯된다는 ‘생기론’과 생물체를 기계에 비유하고 생명현상을 물리·화학적 작용으로 보는 ‘기계론’의 대결에서, 모노가 기계론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장균의 젖당 대사 과정은 생명체에서 유전자 발현이 어떻게 조절되는지를 실험으로 명확하게 밝혀낸 인류 최초의 성과물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대표적인 유전자 조절 사례로서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 원리 대부분은 대장균을 비롯한 미생물 연구를 통해 얻은 것이다. 대장균에서 사실인 것은 코끼리에서도 사실이라는 모노의 말을 여실히 입증하면서 말이다.

김응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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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입학처장과 생명시스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지은 책으로 <미생물과의 마이크로 인터뷰> <술, 질병, 전쟁: 미생물이 만든 역사> <온통 미생물 세상입니다> <생명과학, 바이오테크로 날개 달다> <미생물에게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나는 미생물과 산다> 등이 있다. 또한 유튜브 채널 ‘김응빈의 응생물학’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파트너 채널 ‘김응빈의 생물 수다’를 운영 중이다. 유튜브 채널 링크: https://www.youtube.com/@kimyesbio/featured. 네이버 채널 링크: https://contents.premium.naver.com/biotalkkim/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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