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열전

(7) 메리테리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메리테리움. 장비목의 먼 조상이지만 현대 코끼리와는 다른 계통을 겪었다. 코끼리(작은 사진)의 비강은 이마 가까이 있지만 메리테리움의 비강은 말처럼 이빨 교합면 가까이에 있다. 이것은 트렁크가 없다는 뜻이다. 런던자연사박물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메리테리움. 장비목의 먼 조상이지만 현대 코끼리와는 다른 계통을 겪었다. 코끼리(작은 사진)의 비강은 이마 가까이 있지만 메리테리움의 비강은 말처럼 이빨 교합면 가까이에 있다. 이것은 트렁크가 없다는 뜻이다. 런던자연사박물관

“비록 성씨는 다를지언정 의형제를 맺은, 즉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하여, 어렵고 위험할 때 서로 도울 것이다. 위로는 나라에 갚고, 아래로는 뭇사람을 평안케 할 것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한날한시에 죽기를 바라며, 하늘과 땅의 왕이 우리 마음을 굽어 살피어, 의와 은혜를 저버리는 자는 하늘과 사람들이 벌하여 죽을 것이다.”

복숭아 밭에서 취할 때까지 마신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내가 이렇게 다짐하였다고 하여 도원결의라고 한다. 이날 검은 소와 흰 말을 제물로 바친 데 그치지 않고 소를 한 마리 더 잡았다고 한다. 도원결의에는 돈이 제법 든 셈이다. 그런데 복숭아 밭이 누구 소유인지 아시는가? 나이가 벼슬인 시대라 결국 막내가 된 장비(張飛)다.

장비만큼이나 억울하게 알려진 사람도 없다. 일자무식과 문무겸비를 장비와 관우에게 배당하라고 하면 대부분 장비는 일자무식, 관우는 문무겸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우리가 오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매우 급하여 용맹하고 과격하며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즐긴 장비의 성격 탓이다. 장비만큼이나 유명하지만 특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동물군이 있으니 바로 장비목(長鼻目)이다.

장비목의 이름은 ‘코가 길다’는 뜻이다. 자유로이 움직이는 긴 코를 가지고 있는 포유류다. 코끼리 코(nose가 아니라 trunk)는 왜 이렇게 길어졌을까? 이런 질문에 언뜻 ‘코끼리가 고래처럼 육상에서 물로 돌아갔다가 다시 육상 생활로 돌아온 동물이 아닐까?’라는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코끼리가 수중 생활을 할 때 스노클링을 위해 코가 길어졌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실제로 코끼리가 긴 코를 이용하여 스노클을 한다는 증거가 몇 가지 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헤엄치는 동안 물 밖으로 코를 들어올린다. 코끼리 코는 매우 길고 유연하기 때문에 원한다면 스노클처럼 사용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1901년 이집트 호수 근처서 화석 첫 발견…이후 총 5종 확인
작은 하마 크기…약 3500만년 전 다습·온화한 환경서 서식
코끼리에 비해 아주 초보적인 짧은 엄니와 낮은 이빨 지녀
부드러운 수생 식물을 먹으며 강·늪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
기후 변화 속 멸종을 피한 계통은 사바나의 코끼리로 진화

아니나 다를까 실제 코끼리의 먼 조상 중 적어도 한 종은 물에 살았다는 게 밝혀졌다. 그렇다고 해서 고래처럼 물속에 들어가서 산 것은 아니고 하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살았다. 현생 생물 중 가장 큰 육상 동물의 가계도가 물속에 뿌리를 두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별난 일은 아니다. 코끼리는 매너티나 듀공 같은 바다소목과 조상을 공유하니까 말이다.

그 주인공은 메리테리움(Moeritherium). ‘메리스 호수에 사는 포유류’라는 뜻이다. 1901년 이집트 메리스 호수 근처에서 처음 화석이 발견된 이후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모두 다섯 종이 발견된 메리테리움은 약 3500만년 전에 살았다. 장비목과 바다소목이 공통조상에서 갈라선 후 수백만년이 지난 다음이다.

동물은 대멸종에 버금가는 환경위기를 맞기 전까지는 대부분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장비목도 마찬가지다. 조상 동물들은 작았다. 메리테리움은 어깨 높이가 70~90㎝에 불과했다. (현생 아프리카 코끼리는 어깨 높이가 최대 4m에 달한다.) 요즘 살고 있는 맥(tepir)이나 돼지 또는 작은 하마 크기의 동물이었다. 짧고 튼튼한 다리와 2m에 이르는 비교적 긴 몸통(현생 코끼리는 최대 7.5m), 짧은 꼬리를 가졌다. 발은 넓고 발굽은 납작했다.

코끼리는 큰 엄니가 상징적이지만 메리테리움의 엄니는 아주 초보적이었다. 가장 초기 메리테리움 종에는 엄니가 없었고, 이후 종들은 아래턱에서 작은 돌출부만 발달했다. 이것은 코끼리가 먹이 사냥, 싸움을 하고 다른 조작을 하는 데 사용하는 길쭉한 엄니와는 거리가 먼 형태다.

메리테리움이 물에 살았다고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빨 때문이다. 메리테리움의 이빨은 이집트 북부 파이윰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이 지역은 예전에는 얕은 하구 또는 해안 지역이었다. 메리테리움 화석이 늪과 강 생태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들이 실제로 그 환경에서 살았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죽은 후 사체가 떠내려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석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메리테리움 이빨은 단순하고 낮다. 이것은 부드러운 식물을 먹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나뭇잎, 수생 식물, 과일, 부드러운 나무껍질이 포함된다. 메리테리움의 이빨은 현생 코끼리처럼 질기고 섬유질이 많은 재료를 갈아먹는 데 적합하지 않았으며, 늪이나 강변에서 발견되는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식물을 먹기에 적합했다.

과학자들은 이빨 법랑질의 동위원소를 확인했다. 탄소 동위원소는 메리테리움의 식단을 알려주었고 산소 동위원소는 그 지역의 수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증명했다. 메리테리움의 동위원소 비율과 동시대 육상 동물의 동위원소 비율을 비교한 결과 이 고대 장비목 동물이 반수생 동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메리테리움은 아마도 작은 하마처럼 늪에 반쯤 잠긴 채 부드러운 반수생 식물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화석 기록만으로 행동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생활방식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메리테리움은 현대 하마처럼 먹이를 먹거나 더위를 식히고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물속이나 물 근처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메리테리움의 사회 구조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비슷한 환경에 서식하는 현생 초식 포유류에서 볼 수 있는 패턴, 즉 먹이 사냥의 효율성을 높이고 포식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작은 무리를 지어서 살았을 것이다.

현생 코끼리가 사바나 지역에 사는데 굳이 고대 장비목인 메리테리움이 수생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메리테리움이 살았던 3500만년 전의 에오세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매우 높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기온이 현재보다 훨씬 높은 온실 세계였다. 극지방에 얼음이 없고 광활한 지역에 얕고 따뜻한 바다가 존재했기 때문에 지구 대부분을 감싸는 습하고 온화한 기후가 형성됐다.

기후가 환경을 만든다. 만년설이 사라지면서 수분이 전 세계에 고르게 분포하게 되었다. 전 지구가 오늘날보다 훨씬 습했으며 울창한 숲과 풍부한 물로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풍요로운 서식지를 제공했다. 초기 포유류, 파충류, 수많은 식물 등 다양한 생명체가 살기에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게다가 중생대 백악기 말에 공룡은 이미 멸종한 상태였다. 공룡이 사라지자 동물은 식물만큼이나 다양해졌다. 포유류의 세상이 되었다. 이 시기에 영장류, 고래류, 말, 박쥐, 설치류의 초기 조상을 비롯한 많은 포유류 그룹이 등장했다.

낙원은 누구에게나 낙원이다. 에오세의 초록빛 낙원 속에서 메리테리움은 부드러운 수생 식물과 키 작은 나무와 관목의 잎사귀를 먹으며 지냈다. 이집트와 리비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가 오늘날에는 건조한 사막 환경이지만 당시에는 늪지대의 담수 서식지였다. 무성한 늪지대는 풍부한 먹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포식자의 위협에서 안전했으니 메리테리움처럼 크지 않은 초식동물이 번성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메리테리움도 장비목 동물답게 긴 코를 가졌을까? 긴 코를 이용하여 물속에서 숨을 쉬었을까? 콧구멍은 두개골의 윗부분에 있었지만 코끼리의 트렁크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코끼리 코, 트렁크에는 뼈가 없다. 약 4000개의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 화석으로 남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메리테리움에게 코끼리 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비강(鼻腔)은 얼굴의 가운데, 코의 등쪽에 있는 코 안의 빈 공간을 말한다. 비강 위에 코가 얹혀 있다. 메리테리움의 비강은 코끼리보다는 말과 비슷한 곳에 놓여 있다. 코끼리처럼 이마 가까이에 있는 게 아니라 말처럼 이빨 교합면 가까이에 있다. 이것은 트렁크가 없다는 뜻이다.

코끼리 트렁크는 물속에서 숨을 쉬려고 스노클로 진화한 게 아니다. 척박한 사바나에서 또 하나의 부속지로 진화한 것이다. 코끼리 코는 숨쉬고, 냄새 맡고, 의사소통을 할 뿐만 아니라 무기, 트럼펫, 국자, 손의 역할도 한다. 풍성한 환경에서 살던 메리테리움에게는 코끼리 코가 필요하지 않았다.

메리테리움은 당시 독특한 환경에 적응한 수많은 생물 중 하나였지만 새로운 틈새를 실험한 동물로서 가치가 있다. 메리테리움은 장비목 동물의 서식지가 육상에서 수생으로 그리고 다시 육상으로 되돌아왔다는 매우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초록빛 낙원이 펼쳐진 숲을 두고 수생 환경을 서식지로 삼는 실험에 성공했다. 환경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서식지를 찾아가는 적응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거기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배려하지 않는다. 어떤 생명도 영속하게 놔두지 않는다. 올리고세가 되자 지구가 점차 추워졌다. 화산이 활동하고 대륙판이 이동하고 대기 조건이 변했다. 숲은 건조한 개방형 생태계 사바나로 바뀌었다. 기후와 지형이 변하자 메리테리움을 비롯한 수많은 에오세 종들은 진화의 경로를 결정해야 했다.

한 가지 중요한 계통은 아래쪽으로 휜 엄니를 가지고 홍적세까지 살았으며 다른 중요한 계통은 현대 아프리카와 아시아 코끼리 조상을 포함하는 코끼리과로 이어졌다. 메리테리움에서 현대 코끼리에 이르는 진화 경로는 한 개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계통의 분기를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종이 갈라지고 멸종했다.

이 과정에서 장비목은 비로소 이름값을 하는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장비목의 기다란 하악골은 기다란 트렁크가 발생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초원에서는 기다란 코의 감고 움켜쥐는 역할이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물을 마시기에 좋았다. 트렁크가 먹이를 먹는 주요 도구가 되면서 이젠 하악골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메리테리움에서 후기 장비목으로 진화는 수백만년에 걸친 생태 및 기후 변화를 반영한다. 반수생에서 완전한 육상 생활로 전환하면서 몸집이 바뀌고 먹이 메커니즘에 새로이 적응해야 했다. 모든 환경 변화는 도전과 기회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멸종은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지만 늦출 수는 있다. 서식지 파괴, 오염, 기후변화 같은 생물다양성이 훼손되는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단호하고 집단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과거의 멸종에서 얻는 교훈은 단순히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제 곧 연분홍색의 복숭아꽃(복사꽃)이 피는 시기다. 누군가 또 도원결의에 나서고 싶을 게다. 이 시대의 도원결의는 무엇일까? 생명다양성과 에너지 전환 문제를 두고 고민할 때다.

■필자 이정모

[멸종열전]‘장비목’ 코끼리의 조상…짧은 코로 하마처럼 물에서 살아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고 있는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지속 가능하려면 지난 멸종 사건에서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연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했지만, 박사는 아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과학관,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한 저술과 강연,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 <과학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 <살아 보니, 진화> <달력과 권력> <공생 멸종 진화>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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