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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친밀한 타인
유럽서 주로 활동 연출가 요나 김‘심청’ 추월만정 놓고 독창적 해석 예술의전당 ‘관행’엔 아쉬움 토로 내부를 벗어난 ‘외부의 시선’ 신선심청은 ‘눈먼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팔려간 효녀’다. 현대인의 감각으로 볼 때 ‘부처님께 공양미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제안은 종교를 빙자한 사기고, 비록 자발적이라고는 하나 심청이 공양미와 목숨을 바꾸는 행위는 끔찍한 인신매매다.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현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 기괴한 이야기를 내년 공연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판소리 대본을 활용해 소리꾼이 노래하니 ‘창극’이라 불릴 만하지만, 제작자들은 ‘소리악극’ 같은 새로운 장르 이름을 구상 중이다.과거 한국의 정서에 기반한 이 작품이 동시대 세계 관객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심청>을 연출하는 요나 김은 듣도 보도 못한 해석을 들려줬다. “심청 이야기는 너무나 보편적이에요. 옛 동화들이 착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끔찍... -
서바이벌의 법칙: 여왕벌 게임·흑백요리사·더 인플루언서
“저는 방송이 존나 지겹습니다. 이 게임이 그렇게 재밌습니까? 그렇게 사람 본능 건드리면서 팀원들 바꿔가면서 TV를 보는 사람들이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제가 솔직하게 게임한 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이걸 원하세요? 결국에는 사람들의 악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결국에는 깨끗하게 마무리 지으실 거죠? 우승이라는 글자로. 진짜 우승이 어딨습니까? 이딴 식으로 하는데. 정신 차리세요. 전 진 게 아닙니다.”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에서 방영 중인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여왕벌 게임>에서 ‘여왕벌’ 모니카가 말했다. 4일 공개된 4화에서 탈락이 확정된 후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었을 때였다.이날 여왕벌과 해당 팀의 ‘수컷’ 중 한 명은 한정된 시간 동안 진흙을 최대한 많이 옮기는 게임을 했다. 최종 1위를 차지한 ‘여왕벌’ 장은실은 패배한 세 팀 중 한 팀의 우두머리 수컷을 영입할 수 있었다. 우두머리 수컷을 빼앗긴 팀의 나머지 인원은 모두... -
살인자 오씨의 경우
“한 전방 부대의 사령관 오모씨가 아내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건의 목격자들과 경찰의 말을 종합하면, 오씨는 관사에서 아내 A씨를 살해했다. 오씨는 A씨와 자신의 부관 B씨의 외도를 의심했다고 한다. 다투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 오씨의 오해가 밝혀지자, 오씨는 그 자리에서 후회하며 자살했다. 오씨가 아내를 의심한 배경에는 또 다른 부관 이모씨가 있었다. 이씨는 자신 대신 B씨가 승진한 데 대해 앙심을 품고 오씨를 파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씨는 오씨에게 A씨와 B씨의 불륜을 암시했으며, 오씨가 이를 믿지 않으려 하자 A씨의 손수건을 훔쳐 B씨의 숙소에 가져다두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씨는 현장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 체포됐다.”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를 사건 기사 형식으로 쓰면 위와 같이 앙상하게 요약할 수 있겠다. 오모씨는 오셀로, 이모씨는 이아고다. 피의자가 사망했으니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는 종결되고, 한때 미디어에 오... -
자기확신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관용적이라 리뷰에 쓰기에 그다지 좋지 않지만,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단 에투알(최고무용수) 박세은의 ‘빈사의 백조’를 보고서는 딱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1907년 전설적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초연한 이 작품에서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에 맞춰 발레리나가 서서히 무대에 오른다. 무용수는 우아하게 날갯짓하며 수면 위를 이동하지만, 이 백조는 제목 그대로 죽어가는 중이다. 첼로 선율, 푸른 조명에 휩싸인 백조는 엄습한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마지막으로 몸을 떤다. 잦아드는 첼로 소리와 함께 백조의 생명도 빠져나간다. 막이 내린 뒤에도 박수는 다음 무대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이어졌다. 죽음의 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안무의 기괴함에 놀랐고, 그 아름다움을 완벽히 체현한 박세은의 몸짓에 다시 놀랐다.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1669년 창단됐다. 박세은은 입단 10년 만인 2021년 이 세... -
모든 황금기에는 끝이 있다
칸국제영화제는 한국에서 통상 베니스, 베를린과 함께 ‘세계 3대 국제영화제’라고 불리지만 이는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현재 칸영화제의 위상은 나머지 영화제보다 크게 높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영화인들은 가능하면 칸영화제를 먼저 두드린다. 굳이 나누자면 칸이 1강, 베니스와 베를린은 2중이다.한국영화에 칸의 문턱은 그만큼 높았다. 베를린이 1961년 <마부>에 특별 은곰상, 베니스가 1987년 <씨받이>의 고 강수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했지만, 한국영화가 칸의 핵심인 경쟁 부문에 오른 것은 2000년 <춘향뎐>이 처음이었다. <춘향뎐> 상영 후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고 이태원 제작자는 어깨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세계 최고의 영화축제에서 턱시도를 차려입은 관객 2000여명이 일제히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하면 어떤 영화인도 감정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제77회 칸영화제가 25일까지 열린다. <춘향뎐&... -
3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는 것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다룬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바흐 ‘마태 수난곡’ 연주 시간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190분에 달했다. 현장에서 만난 지인이 체력을 보충하라며 고맙게도 초코바를 건네주었지만 인터미션에도 먹지는 않았다. 바로크 악기 특유의 거칠고도 맑은 음향, 최고 수준 성악가들의 청아한 목소리, 2000년 전 성인(聖人)의 위대한 행적이 감상자를 몽롱하게 했고, 그 아름다운 몽롱함에서 억지로 깨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몽롱함의 원인은 연주 자체와 함께 연주 시간에도 있었다. 기나긴 연주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통한 외부의 자극이 없으니,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종교음악의 흐름에 몸을 온전히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듣는다.국립오페라단의 <한여름 밤의 꿈> 공연 시간은 인터미션을 포함, 170분이었다. 셰익스피어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벤저민 브리튼이 1960년 발... -
‘패스트 라이브즈’의 인연과 우연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1879~1970)는 근대와 현대의 접점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31세에 출간한 대표작 <하워즈 엔드>는 교외의 오랜 저택 하워즈 엔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두 가문의 이야기다. 자동차와 기차가 다니고 사람들의 이주가 조금씩 활발해지는 시기, 인물들은 신문물이 전통을 대체하는 과정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한 인물은 말한다. “자기 집과 헤어진다는 것,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난다는 것-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요. (…)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방에서 죽지도 못한다면, 문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이제 태어난 방에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향’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졌다. 생애주기에 따라 진학·취업·결혼·출산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이주를 경험한다. 이런 주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한곳에서 오랜 세월 정주하기는 어렵다. 집값 변동, 도시계획, 자연재해, 전쟁같이 이주를 강제하는 요인은 차고 넘친다.한국계... -
로봇의 쓸모
인간은 목적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로봇은 그렇지 않다. 어떤 로봇은 하루 종일 손님을 위해 에스프레소를 만든다. 어떤 로봇은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고, 어떤 로봇은 거실 먼지를 빨아들인 뒤 충전기를 찾아 들어간다. 로봇은 인간을 위한 쓰임새가 있어야 하는, 실용적인 존재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희곡 <R.U.R>(1920)에서 처음 ‘로봇’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 로봇은 감정과 고통이 없이 대량 생산돼 산업 현장에서 노동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였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3’에 꾸며진 권병준의 전시실에는 이상한 로봇들이 가득하다.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외나무다리 위 로봇은 인간의 키보다 큰 상체로만 구성돼 있다. 조명이 향하면 로봇은 긴박한 국악 장단에 맞춰 팔을 흔들며 휘적휘적 춤을 춘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쇠파이프 위 몸통도 흔들려 금세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인간 관객의 염려는 아랑곳 않고 로봇은 춤을 춘다. ... -
신춘문예의 마음
신춘문예 공고가 나가는 매년 11월 초부터 문화부에는 여러 문의 전화가 걸려온다. 11월엔 주로 “단편소설 분량이 ‘원고지 70장 안팎’이라 하던데, 75장도 되느냐”와 같이 응모 요령에 대한 문의가 많다면, 마감이 끝난 12월엔 심사 일정과 당선자 통보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심사 기간을 꼬치꼬치 캐묻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연말에 약속이 많아 시간이 부족한데 당선될 경우를 대비해 소감 작성과 인터뷰 시간을 미리 빼려 한다”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당선자에게 이미 통보가 갔다”는 답변에 전화 너머로 크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내쉬는 분도 있었다.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시 부문에는 각 600여명의 응모자가 투고했다. 경쟁을 뚫고 당선된 소설은 ‘i’였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하루에 포장용기 수십만개를 옮기는 남성 노동자와 그의 임신한 아내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흔히 ‘신춘문예풍’으로 통칭되는 실험적·미학적 요철이 없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과 감정에 대한 핍... -
타란티노라면 전두광을 어떻게 했을까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2차대전 당시 미군 특수부대를 다룬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시나리오를 쓰면서 ‘히틀러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옛날 영화를 재탕하고 싶진 않았어요. 영화가 그러면 실망스럽잖아요. (암살 위기의) 히틀러를 뒤로 빼내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할까. 새벽 4시쯤에 시나리오를 쓰다가 결심했어요. ‘그냥 죽이자.’ 그래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렇게 썼어요. ‘X발 그냥 죽여.’ ”(2019년 5월 <지미 키멜 라이브>)역사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인 1945년 4월30일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전한다. 오랜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한 직후였다.2차대전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따른다. 전투의 세부묘사를 부풀리고 등장인물을 가공하기는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바꾸거나 히틀러의 죽음 정황을 각색하는 일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