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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는 것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다룬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바흐 ‘마태 수난곡’ 연주 시간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190분에 달했다. 현장에서 만난 지인이 체력을 보충하라며 고맙게도 초코바를 건네주었지만 인터미션에도 먹지는 않았다. 바로크 악기 특유의 거칠고도 맑은 음향, 최고 수준 성악가들의 청아한 목소리, 2000년 전 성인(聖人)의 위대한 행적이 감상자를 몽롱하게 했고, 그 아름다운 몽롱함에서 억지로 깨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몽롱함의 원인은 연주 자체와 함께 연주 시간에도 있었다. 기나긴 연주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통한 외부의 자극이 없으니,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종교음악의 흐름에 몸을 온전히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듣는다.국립오페라단의 <한여름 밤의 꿈> 공연 시간은 인터미션을 포함, 170분이었다. 셰익스피어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벤저민 브리튼이 1960년 발... -
‘패스트 라이브즈’의 인연과 우연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1879~1970)는 근대와 현대의 접점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31세에 출간한 대표작 <하워즈 엔드>는 교외의 오랜 저택 하워즈 엔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두 가문의 이야기다. 자동차와 기차가 다니고 사람들의 이주가 조금씩 활발해지는 시기, 인물들은 신문물이 전통을 대체하는 과정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한 인물은 말한다. “자기 집과 헤어진다는 것,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난다는 것-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요. (…)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방에서 죽지도 못한다면, 문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이제 태어난 방에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향’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졌다. 생애주기에 따라 진학·취업·결혼·출산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이주를 경험한다. 이런 주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한곳에서 오랜 세월 정주하기는 어렵다. 집값 변동, 도시계획, 자연재해, 전쟁같이 이주를 강제하는 요인은 차고 넘친다.한국계... -
로봇의 쓸모
인간은 목적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로봇은 그렇지 않다. 어떤 로봇은 하루 종일 손님을 위해 에스프레소를 만든다. 어떤 로봇은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고, 어떤 로봇은 거실 먼지를 빨아들인 뒤 충전기를 찾아 들어간다. 로봇은 인간을 위한 쓰임새가 있어야 하는, 실용적인 존재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희곡 <R.U.R>(1920)에서 처음 ‘로봇’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 로봇은 감정과 고통이 없이 대량 생산돼 산업 현장에서 노동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였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3’에 꾸며진 권병준의 전시실에는 이상한 로봇들이 가득하다.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외나무다리 위 로봇은 인간의 키보다 큰 상체로만 구성돼 있다. 조명이 향하면 로봇은 긴박한 국악 장단에 맞춰 팔을 흔들며 휘적휘적 춤을 춘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쇠파이프 위 몸통도 흔들려 금세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인간 관객의 염려는 아랑곳 않고 로봇은 춤을 춘다. ... -
신춘문예의 마음
신춘문예 공고가 나가는 매년 11월 초부터 문화부에는 여러 문의 전화가 걸려온다. 11월엔 주로 “단편소설 분량이 ‘원고지 70장 안팎’이라 하던데, 75장도 되느냐”와 같이 응모 요령에 대한 문의가 많다면, 마감이 끝난 12월엔 심사 일정과 당선자 통보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심사 기간을 꼬치꼬치 캐묻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연말에 약속이 많아 시간이 부족한데 당선될 경우를 대비해 소감 작성과 인터뷰 시간을 미리 빼려 한다”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당선자에게 이미 통보가 갔다”는 답변에 전화 너머로 크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내쉬는 분도 있었다.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시 부문에는 각 600여명의 응모자가 투고했다. 경쟁을 뚫고 당선된 소설은 ‘i’였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하루에 포장용기 수십만개를 옮기는 남성 노동자와 그의 임신한 아내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흔히 ‘신춘문예풍’으로 통칭되는 실험적·미학적 요철이 없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과 감정에 대한 핍... -
타란티노라면 전두광을 어떻게 했을까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2차대전 당시 미군 특수부대를 다룬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시나리오를 쓰면서 ‘히틀러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옛날 영화를 재탕하고 싶진 않았어요. 영화가 그러면 실망스럽잖아요. (암살 위기의) 히틀러를 뒤로 빼내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할까. 새벽 4시쯤에 시나리오를 쓰다가 결심했어요. ‘그냥 죽이자.’ 그래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렇게 썼어요. ‘X발 그냥 죽여.’ ”(2019년 5월 <지미 키멜 라이브>)역사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인 1945년 4월30일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전한다. 오랜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한 직후였다.2차대전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따른다. 전투의 세부묘사를 부풀리고 등장인물을 가공하기는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바꾸거나 히틀러의 죽음 정황을 각색하는 일은 거의 없다... -
‘블루 자이언트’의 청년과 세 어른
개봉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는 ‘재즈 영화’다. 재즈를 소재로 했던 실사영화 <위플래쉬>나 <라라랜드>보다도 훨씬 재즈에 충실하다. 상영시간 120분 중 4분의 1 정도가 극중 밴드 재스(JASS)의 라이브 연주 장면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연주는 인간 배우 이상으로 박력 넘친다. 보컬리스트의 가사 없이 색소폰, 피아노, 드럼 연주만으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재즈 영화지만 재즈 음악만으로 성립될 수는 없다. <블루 자이언트>의 주인공은 갓 고교를 졸업한 후 색소폰을 들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 다이, 작곡하고 피아노 치는 유키노리, 다이의 고교 시절 친구로 재즈의 매력에 빠져 뒤늦게 드럼을 배우는 슌지, 세 명의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특정 분야에 빠져 모든 것을 바치는 청춘의 성장기는 일본 만화의 특기 중 하나다.세 친구는 재즈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 ‘세계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가 되겠다며 밤마다 강... -
일론 머스크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기행(奇行)은 차고 넘친다. ‘모성 충동’이 강한 비혼의 여성 임원에게 자신의 정자를 기증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더 많은 아이를 가져야 하기에, 자신의 정자를 활용하라는 이유였다. 이 여성 임원이 임신 말기 입원했던 병원에는 그의 아이를 품은 또 다른 여성이 머물렀다. 그와 아내가 시험관으로 수정한 여자아이를 가진 대리모였다. 비디오 스트리밍 팟캐스트에 출연해 진행자가 권하는 대마초를 피운 다음날 그의 회사 주가는 연중 최저치로 떨어졌다. 동굴에 갇힌 태국 소년들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준 탐험가를 두고는 별다른 증거 없이 ‘소아성애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몇몇 일들은 ‘세계 최고 부자의 기행’ 정도로 간주하기 어렵다. ‘언론 자유 수호’라는 명목으로 트위터를 인수한 뒤 혐오표현, 인종차별 등을 이유로 계정 정지된 유명 사용자들을 복귀시켰으나, 정작 자신을 비판한 기자들의 계정은 정지시켰다. 밤이든 주말이든 휴가기간이든 원하면 언제나 직원들을 호출해 일을 시킨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악의 스펙트럼
지은 지 40년 넘은 구축 아파트라 공간이 부족해 주차가 몹시 어렵다. 가급적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고, 피치 못하게 사용하더라도 주차하기 쉬운 시간에 맞춘다. 이사 나가는 집이 버리는 가구와 가전제품, 이사 들어오는 집이 가져오는 가전제품 상자를 통해 요즘 트렌드를 짐작한다. 초등학교가 단지 안에 있어 아이들의 성장 환경은 대부분 비슷하다. 길 하나로 마주 보는 신축 아파트와 신설될 도로 위치를 두고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이후 도로 신설 계획이 유야무야돼 다툼도 흐지부지됐다.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동양대 교수는 2011년 펴낸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1인칭 시점으로 “신중산층이 나를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내가 그들을 빚어냈다. 그들의 욕망은 내 피조물이었다”고 적었다. 1970~1980년대 정책 입안자들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에 따라 군사기지를 닮은 모양새”로 만든 아파트는 “대량 복제를 통한 특정한 주거 모델의 확... -
어느 모험가의 말년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레이더스>(1981)에 묘사된 인디아나 존스는 말이 고고학자지 사실상 도굴꾼이다.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지역의 성스럽고 유서 깊은 문화유적 안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가 보물을 들고나온다. 치부가 아니라 연구를 위함이고, 개인 소유가 아니라 박물관 기증이 목적이라 해도 존스의 행동이 무분별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상, 성궤 등 지역 고유의 전통, 신앙과 밀착했을 때 의미 있는 유물들을 별다른 문화적 맥락 없는 서구의 박물관으로 가져오는 행위는 독단적이고 무도하다. 이 과정에서 지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레이더스>에서 지역민은 대사 한 줄 받지 못한 채, 백인 도굴꾼들이 시키는 대로 땅을 파고 물건을 나른다. 때로 호전적으로 독화살을 쏘는 이도 있지만, 이 역시 독자적으로 살아 있는 캐릭터라기보다는 백인 정복자의 죄의식이나 공포가 만들어낸 허상처럼 보인다.... -
뤼미에르 형제와 마동석
“영화의 역사는 한 번의 ‘대폭발’(빅뱅)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영화학자 파올로 케르키 우사이는 말한다. 18세기 후반부터 정적인 이미지들을 광원 앞에 빠르게 통과시켜 이미지가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창조하는 실험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1891년 특허를 취득한 ‘키네토스코프’는 앞선 기술력을 보여줬다. 구멍 뚫린 창을 통해 한 번에 한 사람씩 권투, 스트립쇼 등을 볼 수 있게 한 장치였다. 에디슨은 1894년 미국 뉴욕에 각기 다른 영화를 보여주는 10대의 키네토스코프를 들였다.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이보다 늦은 1895년 12월을 영화의 탄생 시점으로 본다. 이때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상영한 짤막한 다큐멘터리들의 관객이 개인이 아닌 다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뤼미에르 형제가 상영한 50초 길이의 <기차의 도착>은 오늘날까지 ‘최초의 영화’로 불린다. 스크린 앞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란 관객이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