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의 마음

백승찬 기자
2024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 심사위원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최종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지아·김미월·김인숙·강지희·전성태 심사위원. 서성일 선임기자

2024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 심사위원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최종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지아·김미월·김인숙·강지희·전성태 심사위원. 서성일 선임기자

신춘문예 공고가 나가는 매년 11월 초부터 문화부에는 여러 문의 전화가 걸려온다. 11월엔 주로 “단편소설 분량이 ‘원고지 70장 안팎’이라 하던데, 75장도 되느냐”와 같이 응모 요령에 대한 문의가 많다면, 마감이 끝난 12월엔 심사 일정과 당선자 통보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심사 기간을 꼬치꼬치 캐묻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연말에 약속이 많아 시간이 부족한데 당선될 경우를 대비해 소감 작성과 인터뷰 시간을 미리 빼려 한다”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당선자에게 이미 통보가 갔다”는 답변에 전화 너머로 크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내쉬는 분도 있었다.

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시 부문에는 각 600여명의 응모자가 투고했다. 경쟁을 뚫고 당선된 소설은 ‘i’였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하루에 포장용기 수십만개를 옮기는 남성 노동자와 그의 임신한 아내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흔히 ‘신춘문예풍’으로 통칭되는 실험적·미학적 요철이 없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과 감정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에 ‘미학적 새로움’ ‘독자적인 스타일’이 없다고 지적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신춘문예 당선작으로는 보기 드물게 한달음에 읽히는 글이다. 심사위원들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같은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시 부문 당선작 ‘여기 있다’는 ‘투명인간’의 은유를 활용한 작품이다. 다만 이 시의 ‘투명인간’은 SF에서 볼 법한 기발함 혹은 음험함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접시, 잔반, 앞치마, 고무장갑, 도마, 택배상자 등의 시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공교롭게도 소설 당선작 ‘i’와 같이 노동의 현장이다. 사골에서 핏물을 빼는 데서 시작해 오랫동안 기름과 불순물을 건져내며 육수를 끓이는 과정을 시 창작 과정에 빗댄 당선 소감은 이 시가 당선자의 관념이 아닌 삶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응모작 16편이 도착한 평론 부문은 그 어느 때보다 수작이 많았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전언이다. 당선작은 천선란의 SF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은 모두 고유한 무게를 가진 채 서로를 형성하고 조건 짓는, 근본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들”이라는 깨달음을 전한다. 심사위원들은 주디스 버틀러, 그레이엄 하먼 등의 논의를 참조하면서도 “그 이론의 완력에 휘둘리지 않고, 선행 논의를 존중하면서도 그 논의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당선작의 큰 미덕으로 꼽았다.

제도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민망한 말이긴 하지만, 신춘문예는 구닥다리 제도다. 경향신문만 해도 76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2년 사이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튜브, 쇼트폼으로 미디어의 인기 흐름이 바뀌는데, 연말에 투고해 심사하고 1월1일 1편씩의 당선작을 발표하는 신춘문예 제도는 오랜 시간 그대로다. 최근엔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 기성 제도·문인의 승인 없이 문학 활동을 하는 이들도 크게 늘었다. 이슬아 작가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웹사이트 형태로 첫 시집을 발표한 계미현 시인을 소개하며 “권위자들의 광채와 함께 높은 곳에서 데뷔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동료들과 지하에서 등장하는 작가도 있다”고 말했다. 신춘문예가 전자라면, 계미현은 후자다. 이슬아가 애정을 쏟는 방식 역시 후자다.

신춘문예가 현재 가장 권위 있는 등단 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백명의 지원자 중 가장 좋은 재능을 확실하게 골라낼 공정함을 담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문학은 기록 경기처럼 순위를 측정할 수 없으며, 해당 연도 심사위원의 성향에 따라 당선작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춘문예는 무엇인가. 이 제도가 70년 이상 가져온 이름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아 본다. 한국, 아르헨티나, 스위스에서, 14살 중학생부터 80대 노인까지 신춘문예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A4 용지에 깔끔한 활자체로 프린트한 원고가 대다수지만, 원고지에 직접 써내려간 유일무이한 육필 원고도 있다. 매년 같은 시기 치러지는 신춘문예가 그들에게 글쓸 용기와 의지를 정기적으로 북돋는 제도였으면 한다. 쇼트폼의 시대에 활자를 붙든 사람이 당신만은 아니라고, 서로에게 동지의식을 느끼게 하는 제도였으면 한다. 무엇보다 글은 글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임을, 좋은 삶을 살고 그것을 활자로 옮길 때 좋은 문학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제도였으면 한다. 경향신문 신춘문예가 그런 제도가 될 수 있다면, 베스트셀러 작가나 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하지 못하더라도 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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