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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운명 사이에서
대개 구분 없이 쓰곤 하지만, 사실 우연(偶然)이란 단어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하나는 어떠한 현상이 너무나도 무작위적이라 예측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경우에 쓰인다. 바닷가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나가며 모래사장에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이들이 남기는 자국은 무작위적이어서 다음에 어떤 흔적이 남을지 예측할 수도 없고, 한 번 만들어진 자국이 재현되지도 않는다. 이는 신기한 현상이지만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와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두 번째 의미의 우연은 좀 다르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맞물려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이를 ‘기막힌 우연’이라고 표현한다. 이 역시 예측한 적 없고 재현될 가능성 역시 낮지만, 그 결과 특정 의미로 이어지는 고로 당위성을 부여하고픈 욕망을 부추긴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우연히 누군가를 다치게 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살인을 목전에 둔 악한이어서 더 큰 비극을 막는 영웅이 될 수... -
본능과 감정 그리고 이성
생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바로 본능, 감정, 이성에 의한 행동이다. 많은 동물은 본능에 의해 살아간다. ‘이기적’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생존과 번식을 강화하는 행동들 말이다. 생물은 배운 적이 없어도 혈당이 떨어지면 먹을 것을 찾고, 천적의 기척을 느끼면 도망치며, 번식기가 찾아오면 짝짓기를 한다. 때로 매우 정교해서 지능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내장된 프로그램에 따르는 자동 반사에 가깝다. 개미의 장례 행동이 그렇다.사회성 곤충인 개미는 죽은 동료의 사체를 회수해 개미굴 내에 위치한 특정한 장소, 일종의 공동매장지에 안치한다. 하지만 개미들이 동료의 죽음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개미는 동료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개미들이 동료의 사체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최소 이틀은 지난 후의 일이다. 마치 그때까지는 투명했던 사체가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개미들은 서둘러 동료의 사체를 매장지로 옮긴다. 사회생... -
좀비 연어의 죽음
드넓은 바닷속을 헤엄치며 살아가는 연어들에게는 일생에 한 번 운명의 스위치가 켜진다. 바로 자손의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절대 명제에 따라, 알을 품고 태어난 고향 개울을 찾아 회귀하라는 본능의 스위치다. 한 번 켜진 스위치는 절대로 꺼지는 법이 없다. 바다에서 강의 상류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도,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고생길도, 그 길목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을 포식자에 대한 공포까지도 이들의 회귀 본능을 꺾지는 못한다. 이처럼 험난한 귀향길을 헤치고 고향에 도착할 즈음이면, 같이 출발했던 동료들 중 태반은 목숨을 잃었고 간신히 도착한 이들도 상처투성이에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이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 강바닥에 알을 낳고 수정된 알을 자갈로 덮는다. 이제 유전자는 이기적 복제자가 연어라는 생존 기계에게 부여한 숙명은 끝난 듯 보인다.여기까지가 잘 알려진 연어의 일생과 회귀 본능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연어는 산란 뒤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방식이 어떤... -
경제적 가치 넘어서는 아이의 본질적 가치
형사재판에서는 공권력이 잘못을 저지른 개인을 단죄하며 그의 자유(때로는 생명까지)를 제한하지만, 민사재판에서는 피고와 원고가 손해득실을 따져, 손해를 입힌 쪽이 손해를 입은 쪽에게 그만큼의 물질적 대가를 지불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재산상의 손해인 경우에는 차라리 단순하지만, 그 대상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개인의 생명인 경우에는 대립이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생명 가격표>의 저자 하워드 프리드먼은 ‘서스턴 사건(2013)’의 판결을 통해 사회가 ‘목숨값’을 어떻게 계산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셰릴 서스턴은 지속적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으로, 당시 뉴욕의 한 발달장애인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2008년 8월30일, 서스턴을 목욕시키던 시설 직원이 갈아입힐 옷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발작을 일으킨 서스턴이 욕조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고, 이에 분노한 유족들은 병원을 고소한다. 서스턴 가족과 병원의 법정 공방은 5년이나 지속되었고, 결국 ... -
아빠만 둘인 쥐의 탄생
생물체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번식하지만, 크게 암수의 구분 없이 모든 개체가 재생산이 가능한 무성생식과 암수가 각각 만들어낸 각각 다른 생식세포를 결합시켜 번식하는 유성생식으로 나뉜다. 이 중 유성생식으로 번식하기 위해선 두 종류의 생식세포, 즉 난자와 정자가 필요하다. 난자와 정자는 감수분열을 통해 해당 종의 생물체가 가진 염색체의 절반만을 가지도록 만들어진 반수체 세포로, 둘이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한 벌의 온전한 염색체가 갖춰지며 새로운 개체로 발생하는 세포다. 이때 두 생식세포 중 더 크고 자원을 더 많이 갖고 있어 이후 만들어질 수정란의 터전이 되는 쪽이 난자, 좀 더 작고 운동성이 있어 난자 속으로 들어가 유전물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쪽이 정자이며, 난자를 만드는 쪽이 암컷, 정자를 만드는 쪽이 수컷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암수로 성이 나뉜 존재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짝을 지어야만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들 중에는 짝짓기 없이 한... -
아이들 유전자에 어떤 경험을 새길 것인가
‘복제(複製)’의 한자를 풀이하면 ‘겹옷(複)을 짓다(製)’는 뜻이다. 그래서 복제란 마치 옷 두 벌을 겹쳐서 똑같은 옷을 한 벌 더 짓는 것처럼 ‘본디의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드는 행위 또는 그렇게 만든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생물도 예외가 아니기에, 체세포핵치환을 통해 어떤 생물의 유전적 정보를 복제하면 그 생명체와 똑같이 생긴 존재가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2001년 세계 최초의 복제 고양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제의 대상이던 암컷 고양이 레인보는 오렌지색과 검은색 털이 알록달록 섞인 삼색털 고양이였지만, 복제하여 태어난 암고양이 CC는 흔히 ‘고등어’라고 불리는 특징적인 검은색 줄무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비밀은 고양이에게서 털색을 나타내는 유전자의 발현 패턴에 있었다. 고양이의 털빛을 결정짓는 유전자는 X 염색체 위에 있다. 그런데 암컷의 경우 두 개의 X 염색체 중 한쪽만 기능하고, 다른 한쪽은 발생 과정에서 불활성화되... -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몇해 전부터 물리학자들과의 만남이 잦아지고 있다. 계기는 포항공대 내에 위치한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과학문화위원회 일을 맡게 되면서였다. 물론 그곳에서 내가 맡은 바는 물리학적 지식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대중과학 및 과학 커뮤니케이션 분야 일이지만, 아무래도 이전에 비해 물리학자들과의 접촉 빈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물리학과의 직접적 인연은 대학교 때 들었던 일반물리학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접한 물리학자들의 세계는 낯설고도 신선했다. 그러다보니 이토록 쟁쟁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혼자만 물리학 문외한으로 있는 것도 멋쩍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물리학자들의 저서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깨달았다. 왜 한창 과학자의 꿈을 키우던 학창 시절, 유독 물리학과는 친해지지 못했는지 말이다.한마디로 물리학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양자물리는 모순투성이처럼 느껴졌다. 양자물리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예시로 ... -
과학적 회의주의가 막은 비극
1960년 9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심사관으로 근무하던 프랜시스 켈시는 자신 앞에 쌓인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윌리엄 머렐사에서 판매 허가를 요청한 약물 ‘케바돈(Kevadon)’의 미국 내 판매 허가 요청서였다. 사실 케바돈은 새로 개발된 약이 아니라 이미 유럽에서는 몇 년 전부터 판매되고 있던 ‘콘테간(Contergan)’이라는 약물 이름만 바꾼 동일한 약이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일반의약품으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약물이었기에 별다른 추가 테스트 없이 허가해도 무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가 켈시의 마음에 걸렸다. 서류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당시 FDA의 규정상 인체에 사용되는 모든 약물은 시판 허가를 받기 전에 동물실험을 실시해야만 했고, 해당 서류에도 관련 결과가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결과지에는 케바돈을 이용한 동물실험 과정 중 사망한 동물이 없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통상 판매되는 용량의 수백배를 투여했는데도 케바돈은 동물에게 별다른 이상을... -
편견의 5단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 이상의 구성원이 존재해야 하므로, 우리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집단을 인식하고 그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낀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아이들은 3세 정도만 되어도 집단을 인식할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별하고, 각 집단에 대한 다른 선호도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 ‘본능적인’ 집단 선호도는 자신이 속한 그룹을 최우선으로 하며 진행된다.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집단에 속하는 것에 대한 안정감을 가지게 되는 시기도 이때이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집단 선호도에 따른 불안감과 안정감이 고착화되어 극단화되는 경우, 자칫 외부 집단에 대한 편견과 혐오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한 집단에 소속되면서 주어지는 안정감은 쉽게 타 집단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이러한 ‘타 집단 전체에 대한 반감’을 ‘편견’이라 ... -
과학은 열린 학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발표된 지 한 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은 누구도 이 위대한 물리학자의 이론에 반박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론이 발표되었을 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200년이 넘게 진리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뉴턴 역학을 반박하고 발표된 새로운 이론이 심지어 실험적 증거조차 미비했기 때문이다. 방법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계산에 따르면, 별빛은 태양의 중력에 의해 약 1.75″(초·1″=1/3600°도, 원둘레의 1/1296000) 정도 휘어져야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방법은 알았지만,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태양빛이 너무 밝아 태양이 떠 있는 동안에는 별빛을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1919년의 개기일식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면 잠시 동안 태양빛이 가려지기에, 별빛을 관측할 수 있다. 이에 영국 왕립천문학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일식 원정대를 두 팀 꾸려 각각 서부 아프리카의 프린시페와 남아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