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봐도 절정, 깊은 지리산 노고단

구례 | 글 정유미·사진 이준헌기자

누구나 품어주는 ‘어머니 산’ 추억 산행

누구나 마음속에 산 하나씩 두고 산다. 한번은 가보고 싶고 한번쯤 가보았던 산, 지리산이 대표적이다. 지리산이 울긋불긋한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산 아래 들녘은 황금빛 치마를 두른 채 춤을 추고, 야생화들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로 피어가을 햇빛을 만끽하고 있다.

억겁의 세월을 버틴 지리산은 변함이 없었다. 할머니 산신을 모셨다는 노고단에서 내려다본 섬진강은 눈부셨고 들판은 기름졌다. 하늘이 내린 천혜의 선물이 이런 것이리라.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도 여전했다. 주름진 얼굴마다 미소가 번졌다.

해발 1507m 지리산 노고단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자 등산객들이 신음 같은 탄성을 토해냈다.

해발 1507m 지리산 노고단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자 등산객들이 신음 같은 탄성을 토해냈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 사는 곳에 경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여 소출이 넘쳐나면 인심 또한 자연스레 넉넉하게 마련”이라고 했다. 지리산은 물이 풍부하고 골이 깊어 수많은 동식물과 사람을 품고 있다. 생김새부터 둥그스름하고 넉넉한 지리산은 언제봐도 어머니산답다.

■ 노고단을 추억하다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노고단(1507m) 대피소에 이르는 6㎞ 구간 중 고비는 마지막 1㎞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인 데다가 다왔다 싶으면 수직으로 우뚝 선 바위가 나타났다. 나무뿌리를 붙잡고 가파른 바위를 오르면서 수없이 미끄러졌다. 하늘을 올려다 볼 새도 없이 땅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걸어야 했다. 지치고 무거운 몸으로 그렇게 5시간을 올라야 노고단에 닿을 수 있었다.

그 길을 단 30분 만에 올랐다. 화엄사에서 차를 타고 천은사를 지나 성삼재 휴게소에서 내렸다. 저 멀리 노고단 정상의 상징인 종탑이 보였다. 지리산 단풍은 11월이나 돼야 한다고 했지만 노고단은 이미 화려한 옷으로 단장을 하고 있었다.

격세지감. 땅에 코를 박고 오르던 노고단을 향긋한 커피향을 맡으며 걷다니. 2.7㎞에 이르는 길은 평탄한 탐방로였다. 등반객들은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 앞에서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들 여기가 지리산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듯했다.

노고단 대피소는 여관보다 멋졌다. 1980년대만 해도 노고단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려면 군대 막사 같은 텐트를 쳐야 했다. 4인용인데 6명이 꾸역꾸역 들어가 자리를 잡고 누워보지만 온몸이 바위와 자갈에 박혀 잠을 설쳤다. 산을 오르느라 땀 범벅이 돼도 씻을 수가 없었다. 발 냄새 때문에 신발은 신고 자야만 했다. 쌀과 김치, 감자 등 10~20㎏이나 되는 짐을 이고지고 올랐다. 40~50㎏이나 되는 짐을 대피소까지 날라주던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이 따로 없었다.

지리산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철에는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졌다’. 헬리콥터가 마대를 내리면 “여기요”하고 소리쳤다. 귀하게 도착한 물품은 120여개나 됐지만 인기 품목은 단연 새우깡과 캔맥주였다. 해가 지면 대학생들은 주먹을 쥐고 운동가요를 불렀다. 지금은 술과 담배, 컵라면을 팔지 않지만 그때는 밤새 소주를 마시고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노고단의 밤은 그렇게 한바탕 소란스러운 의례를 거친 뒤에야 잠이 들었다.

올해 3층 목조건물로 리모델링된 노고단 대피소(왼쪽 위).  1인용 침실공간으로 탈바꿈한 대피소 내부(오른쪽 위).1980년대 노고단 야영장 모습.(왼쪽 아래) 1970년대 노고단 대피소.(오른쪽 아래)

올해 3층 목조건물로 리모델링된 노고단 대피소(왼쪽 위). 1인용 침실공간으로 탈바꿈한 대피소 내부(오른쪽 위).1980년대 노고단 야영장 모습.(왼쪽 아래) 1970년대 노고단 대피소.(오른쪽 아래)

■ 노고단에서 별을 헤다

“저기 있다. 반야봉은 세 걸음, 천왕봉은 다섯 걸음이면 닿겠네.”

3층 목조건물인 노고단 대피소에 짐을 풀자마자 일몰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잘 다듬어놓은 나무 데크를 천천히 오르는데 가을 하늘이 사방으로 터져 있었다. 노고단 정상부근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은 곡선을 그으며 느긋하게 흐르고 있었다. 물들지 않은 피아골 계곡은 핏빛 단풍 절정을 준비라도 하는지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했다.

지리산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하늘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주홍빛으로 물들고 그 빛들이 산자락으로 녹아내렸다. 온 산이 잘 익은 홍시처럼 선홍빛으로 뒤덮였다.

대피소로 돌아오자 어둠이 깔렸다. 젊은이들은 감동적인 장면을 ‘셀카’에 담기 바빴고 자녀들과 가족 등반에 나선 사람들은 저녁식사를 챙기느라 분주했다.

“대학시절 선배에게 이끌려 처음 지리산에 왔는데 자신이 없었지요. 결국 정상에 올랐는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40대가 되면서부터 해마다 지리산을 찾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왔다는 김영환씨(49)처럼 추억을 되새기며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밤 9시 소등을 하자 시끌벅적했던 대피소에 정적이 흘렀다. 노고단 대피소는 산에서 만날 수 없는 최고의 침실이다. 개별 조명등이 있고, 배낭을 따로 보관할 수도 있다. 휴대폰도 터졌고 춥지도 않았다. ‘드르렁’ 코를 골며 대수롭지 않게 방귀를 뀌는 등산객들만 그대로였다.

별천지. 자정 무렵 대피소 밖으로 나오니 별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취사장 근처에서 우당탕하고 쓰레기통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숲에서 나온 오소리가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거였다. 손끝이 시리고 콧물이 났다. 섭씨 23도였던 기온이 밤이 되자 8도까지 뚝 떨어졌다. 새벽의 노고단은 ‘겁나게’ 춥다.

■ 노고단에서 아침을 열다

다음날 오전 5시 대피소는 ‘탄광촌’을 방불케 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이마에 조명등을 달고 성삼재 휴게소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70여명의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오전 5시50분, 일출을 보고 싶은 욕심에 노고단 재난구조대 김성원 반장(63)과 함께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까지 400m라고 했다. 올해로 두번째 지리산을 찾았다는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단풍 있는 산이 너무 좋다”고 했고, 옆에 있던 아버지는 “아들과 못다 한 속얘기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직 단풍이 다 안들었제이.” 김 반장이 비추는 손전등을 따라 눈을 돌렸다. 야생화가 지천이다. 용담, 구절초, 억새풀 등이 어둠속에서 환하다.

오전 6시25분 여명이 밝아왔다. 파란 하늘 아래 옅은 구름띠가 걸린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왕봉, 반야봉이 손에 잡힐 거 같다. 운해가 깔린 섬진강은 깊은 바다였다.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도 이곳을 찾는다. 한마디로 세살부터 여든살까지, 관광객과 전문산악인 가릴 것 없이 줄을 잇는다”고 이상원 노고단 대피소 센터장(49)이 말했다.‘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출은 환상적이었다. 동해 일출이 찬란하다면 지리산의 일출은 신비롭다.

■17일부터 노고단 정상 탐방 예약제

지리산국립공원은 오는 17일부터 노고단 정상 탐방 예약제를 실시한다. 가을 성수기를 맞아 내달 8일까지 매일 14차례(오전 9시∼오후 4시까지 30분 간격) 사전예약자에 한해 개방한다. 지리산 단풍은 10월말부터 11월초까지가 절정이다. 대피소의 하루 이용료는 1만1000원이고 생수와 봉지라면이 각각 1000원이다. 모포는 2000원에 빌릴 수 있고 등산화는 무료로 대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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