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서 대선 후보로…미 보수 거목 스러지다

심진용 기자

공화당 존 매케인 상원의원, 뇌종양 투병 끝에 별세

베트남전 참전해 5년 반 포로생활…정계 진출 후 상원만 6선

원칙 어긋나면 같은 당 대통령도 비판…‘합리적 보수’ 평가

마지막까지 날 세웠던 트럼프 “우리 기도가 함께할 것” 추모

전쟁 영웅서 대선 후보로…미 보수 거목 스러지다

참전 영웅, 6선 상원의원, 대선 후보. 화려한 이력에 걸맞지 않게 정계의 ‘이단아’라 불렸던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25일(현지시간) 애리조나주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인은 지난해 7월 악성 뇌종양의 일종인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매케인은 1982년부터 36년간 애리조나주 연방 상·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원칙주의자에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평가받았다. 원칙과 소신을 위해 정파를 넘나드는 그의 행보에 이단아라는 별칭이 붙었다.

매케인은 1936년 8월29일 파나마운하의 미 해군항공기지에서 해군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부친 모두 해군 4성 장군을 지냈다. 매케인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매케인은 1967년 해군 조종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혔다. 이때 당했던 고문후유증으로 그는 평생 한쪽 다리를 절게 된다. 북베트남은 매케인의 아버지가 통합전투사령부 태평양사령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협상용으로 석방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매케인 부자는 포로는 붙잡힌 순서대로 풀려나야 한다는 원칙을 앞세워 석방을 거부한다. 매케인은 5년 반 동안 포로로 지내다 1973년 석방된다.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1973년 당시 북베트남군 포로생활 5년 반 만에 풀려나 하노이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1973년 당시 북베트남군 포로생활 5년 반 만에 풀려나 하노이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1981년 대령으로 퇴역한 매케인은 이듬해 중간선거에서 애리조나주 제1선거구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전쟁 영웅’ 매케인은 단숨에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1984년 재선에 성공했고 1986년 같은 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내리 6선을 했다.

매케인이 1992년 하노이 군사박물관 앞에서 포로 당시 자신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매케인이 1992년 하노이 군사박물관 앞에서 포로 당시 자신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매케인은 총기 규제, 세제 개편 등을 두고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대립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때는 경기부양책과 오바마케어를 비판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이제 아무도 미국의 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정부를 질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도 여러 차례 충돌했다. 그의 중동정책을 비판했고, 러시아 대선개입 의혹이 불거지자 전면수사를 촉구하며 압박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소신에 따른 행보였다. 2007년 그는 양당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 병력 증파를 지지하며 “조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내가 선거에서 지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공화당 대선 경선에 나선 매케인이 2000년 1월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뒤 부인 신디와 함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공화당 대선 경선에 나선 매케인이 2000년 1월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뒤 부인 신디와 함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경쟁 당과 협력했다. 2002년 민주당과 손잡고 정치자금법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2013년에는 초당파 의원 모임 ‘8인위원회’의 일원으로 이민법 개혁안 초안을 마련했다. 뇌종양 투병 중이던 지난해 7월 그는 생애 마지막이 된 상원 연설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날 그는 오바마케어 폐지를 위한 안건에 투표하기 위해 애리조나 병원에서 워싱턴 의사당으로 날아왔다.

매케인의 소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2008년 대선 때다. 당내 경선 후보였던 매케인은 부시 정부에 맞서 고문 반대를 강력히 주장했다.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 3분의 2가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필요하다면 고문도 해야 한다고 답하던 때였다. 뉴욕타임스는 25일 칼럼에서 그때가 “매케인이 가장 용감했던 순간”이었다고 적었다.

2009년 매케인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악수하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2009년 매케인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악수하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매케인은 두 차례 대권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2000년 대선 경선에서 부시에게, 2008년에 본선에서 오바마에게 각각 패했다. 정치 인생에서 오점도 적지 않았다. 1989년 정치자금 수수로 ‘키팅스캔들’에 휩쓸렸고, 2000년 대선 경선 때는 ‘인종주의의 상징’ 남부연합기 철거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2008년 대선 때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것은 지금도 최악의 결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그가 늘 용감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그는 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누구보다 엄격하게 자신을 비판했다”고 전했다. 키팅스캔들 이후 그는 정치자금법 개혁에 진력했다. 남부연합기 문제에 대해서도 훗날 “여론을 의식했다. 정직하지 못했다”고 했다.

매케인이 지난해 7월 혈전 제거 수술을 받은 지 2주 만에 오바마케어 폐지 논의 안건에 투표하기 위해 워싱턴 의사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매케인이 지난해 7월 혈전 제거 수술을 받은 지 2주 만에 오바마케어 폐지 논의 안건에 투표하기 위해 워싱턴 의사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하노이·피터버러·워싱턴 | AP·AFP연합뉴스

매케인의 포로 이력까지 들먹이며 그를 조롱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로 “우리 마음과 기도가 당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우리는 서로 경쟁했지만, 더 높은 차원의 이상을 향한 믿음을 공유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고인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화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추모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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