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쏠림’ 미 대법원, 이번엔 소수 인종 우대 정책 위헌 결정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바이든 “강력히 반대”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입 시 소수 인종 우대 정책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29일(현지시간) 시민들이 대법원 앞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입 시 소수 인종 우대 정책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29일(현지시간) 시민들이 대법원 앞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대학 입학시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1960년대 이후 60년 간 교육의 다양성을 보장하고자 유지되어 온 정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보수화된 대법원이 50년 간 이어진 임신중지권을 폐기한 데 이어 소수 인종 우대 정책까지 무력화하면서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사회적 합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연방대법원은 이날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Fair Admissions)이란 단체가 소수 인종 우대 제도로 백인과 아시아계가 차별을 받았다며 노스캐롤라이나대와 하버드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각각 6 대 3, 6대 2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하버드대 출신인 커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은 이해충돌 우려를 이유로 하버드대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은 흑인 민권 운동이 활발하던 1961년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시발점으로, 1978년 대법원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인종을 입학 사정 평가 요소로 포함시킨 이 정책 도입 이후 주요 대학에서 흑인과 히스패닉 출신 학생의 입학이 늘었지만, 성적이 우수한 아시아계와 백인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돼 왔다.

이번 결정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3명의 대법관을 연달아 임명한 이후 ‘보수 쏠림’이 된 연방대법원의 이념 구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전체 대법관 9명 가운데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포함해 6명이 보수 성향, 나머지 3명은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다수 의견을 쓴 로버츠 대법원장은 “선의로 시행됐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정책은 아니었다”면서 “학생들은 인종이 아니라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 대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대학들은 너무 오랜 기간 개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학습이 아닌 피부색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려왔다”면서 “헌정사는 그런 선택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반면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소수 의견에서 “대법원은 수십 년 간의 선례와 중대한 진전을 후퇴시켰다”며 “지금도 인종에 따라 광범위하게 분리된 사회에서 인종 불평등을 고착화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사회의 근간을 전복했다”고 비판했다. 프린스턴과 예일대를 졸업하고 대법원 최초의 히스패닉계 대법관이 된 소니아 소토마요르는 자신을 “완벽한 소수인종 우대정책의 수혜자”라고 표현한 바 있다.

보수 우위로 재편된 연방대법원의 지형을 고려할 때 이번 결정은 이미 예견돼 왔다. 그럼에도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 차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오랜 기간 작동하며 사회적 합의로 굳어진 정책을 뒤집은 데 따른 파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이 더 좋은 사회 진출 기회를 제공해 왔다는 점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의 미국 주류사회 진입도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6월 임신중단권을 보장하는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에 이어 연방대법원이 첨예한 사안마다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

소수인종 우대 정책을 둘러싼 근본적인 논쟁 지점은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인 SAT 시험 성적이 다른 요소보다 우선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미국 교육 관련 기관인 ‘학습정책연구소’의 선임연구원 피터 쿡슨은 “시험 성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대학에 진학한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은 엄청난 역경을 이겨내고 대학에 진학한 경우가 많다”면서 “따라서 건강하고, 다양하고, 포용적인 대학 구성원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브루클린의 공립 고등학교 재학생으로 하버드대에서 여름학기를 듣고 있는 마야 클린턴은 가난한 지역 공립학교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하면 이제 엘리트 대학 입학은 더욱 어려워지게 될 것이라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대법원 결정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강력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대법원을 ‘불량 법원’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잠시 침묵하더니 “정상적인 법원은 아니다”고 답했다.

미 정치권은 극명하게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흑인인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로 대 웨이드를 뒤집었던 “똑같은 극단주의자들”이 “대입에서의 인종 다양성에 대한 고려를 삭제해 버렸다”고 비판한 반면, 공화당 대선주자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을 위해 훌륭한 날”이라며 “우리는 완전히 능력에 기반을 둔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게 옳은 길”이라고 환영했다.

존폐 기로에 선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이 임신중단권과 더불어 차기 대선의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선 임신중단권 폐기에 반발하는 여성 유권자가 대거 결집하면서 민주당이 예상 밖 선전을 거뒀다. 다만 대입 시 인종을 고려하는 정책에 대한 미국 내 지지 여론이 높지 않아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 8일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인종 고려 대입 정책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50%로 찬성한다는 33%보다 높았다.

미국 전역의 대학들은 이번 판결로 인해 오는 8~9월부터 시작되는 대입 지원에 맞춰 선발 기준을 재정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NYT는 대학들이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학교 성적이나 시험 점수가 아닌 에세이, 추천서 등 주관적인 지표를 더 비중있게 고려해 선발 절차가 불투명해질 수 있고, 이에 보수 단체들이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소송전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온라인 지원사이트를 운영하는 한 회사는 지원자의 인종 체크란을 없앨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대법원의 이번 판단은 대입에 국한했지만, 노동시장에서 소수 인종을 배려하는 고용 관행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보수 진영은 기업들이 내건 다양성·평등·포용성(DEI) 기조가 여성과 소수자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비판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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