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 내걸었던 세계 우파 지도자들, 인플레이션 역풍에 정치 위기

이윤정 기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수도 앙카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앙카라|로이터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수도 앙카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앙카라|로이터연합뉴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경제 성장’을 약속하며 집권한 세계의 우파 지도자들이 인플레이션으로 정치적 역풍을 맞고 있다. 최근 터키의 리라화 가치가 폭락을 거듭하면서 20년 가까이 정권을 잡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가파른 인플레이션에도 금리를 인하하며 ‘거꾸로 정책’을 펼친 탓이다. 헝가리, 브라질 등에서 ‘스트롱맨’을 자처해온 우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 위기에 봉착했다. 그동안 저금리 기조 속에 신흥국 투자 효과를 누려왔지만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경제를 살릴 묘책이 없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터키에서 리라화가 폭락하고 물가가 치솟으면서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았던 도시에서조차 민심이 싸늘하게 식었다고 20일(현지시간) 전했다. 현재 보수정권의 중심지로 불리는 코냐는 에르도안 정권 이전만 해도 농업 도시였다. 에르도안 시대 이후 공업도시로 탈바꿈하며 경제 호황을 누렸지만 현재는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인플레이션으로 에너지, 포장, 운송 등의 비용이 전방위적으로 상승한데다 수출업체는 환율 변동성으로 애를 먹고 있다. 물가는 살인적으로 오르는데 일자리는 사라진 탓에 주민들은 빚에 허덕이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코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속한 정의개발당(AKP)의 정치적 고향과도 같은 곳으로 통했다. 코냐는 전국에서 AKP 지지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꼽혀왔다. 2018년 대선 당시 코냐에서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율은 75%에 달했다.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코냐에서 AKP와 연합 정당인 우파 민족주의행동당(MHP)의 지지율은 야당 연합에 추월당했다. 이스탄불 소재 경제외교정책연구센터의 시난 울겐 소장은 “AKP에 대한 지지가 이렇게 낮은 것을 본 적이 없다”면서 “2023년 대선에서 정치적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에르도안 정권의 ‘거꾸로 정책’은 경제 실패의 원인으로 꼽힌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시작됐지만 자신의 공약인 금리 인하를 밀어붙였다. 미국, 영국 등 세계 주요국이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예고한 것과 정반대 행보다. 에르도안 정권은 9월 이후에만 세 차례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그 결과 물가는 더 올랐고 리라화 가치는 지난해보다 50% 가까이 떨어졌다. 터키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의 주택 월평균 임대료는 지난해 대비 약 60% 급등했다.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 8월부터 4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20%에 육박하고 있다.

우파 포퓰리즘 지도자로 꼽히는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도 인플레이션 대처 실패로 위기를 맞았다. 브라질 물가상승률은 연 10.7%에 육박했고, 헝가리의 지난달 물가상승률도 7.4%로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제 상황 악화는 지도자들의 지지율도 하락으로 연결됐다. 현재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로 야당 대선 후보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46~48%)에 크게 뒤지고 있다. 헝가리에서도 야당 연합 지지율(39%)이 집권당 피데스(37%)를 앞질렀다.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오르반 총리는 어려워진 경제를 살린다며 현금 지원을 멈추지 않고 있고 시중에 풀린 돈은 다시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선거를 앞두고 우파 포퓰리즘 지도자들이 민심을 고려해 인플레이션 대처에 적극 나서지 않다가 오히려 상황이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내년엔 브라질 대선과 헝가리 총선이, 2023년에 터키 대선이 치러진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전통적인 해결책은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과 정부의 긴축 재정이다. 그러나 두 조치 모두 단기적으로 경제 성장과 고용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만큼 현재 지도자들의 재선 전망도 악화시킬 수 있다. 선거를 의식해 경기 부양에 집중하면서 인플레이션 대처를 후순위로 미뤘다가 문제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저금리 기조가 이어진 세계 경제가 신흥국의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에게 순풍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파 지도자들은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정권을 잡았고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신흥국으로 투자가 몰리는 이점을 활용해왔다는 것이다.

다론 아세모글루 미 매사추세츠공대 경제학 교수는 “2008~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들의 낮은 금리 정책으로 외국자본 투자가 신흥국에 쏠리면서 이들 나라의 권위주의 정권은 경제 성장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면서 “그동안의 거시경제 환경은 신흥국의 권위주의자들에게 신의 선물이었다”고 했다. NYT는 보수적 가치관과 민족주의를 내세워 집권층을 결속시킨 신흥국의 우파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무너지는 경제 지표 속에 시민들에 대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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