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공포에 떨게 한 흑사병 발원지 찾았다

흑사병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키르기스스탄 천산산맥 계곡 마을. /로이터연합뉴스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전염병은 흑사병(페스트)이다. 몸이 까맣게 된 채 죽어간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 이름 붙은 이 병은 1346~1353년 유럽에서 특히 맹위를 떨쳤다. 14세기 유럽에서만 7500만~2억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인구의 60%가 흑사병으로 사망한 지역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흑사병이 정확히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돼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로 퍼졌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추측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346년 몽골군이 흑해 크름반도의 카파항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다. 당시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성안으로 던졌다고 전해진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흑사병이 아시아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14세기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흑사병 발원지가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 근처 천산산맥 계곡이라고 유전자 분석 등을 통해 규명한 연구 결과가 15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연구를 주도한 독일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의 고생물학자인 요하네스 크라우제는 “천산산맥 일대가 진원지라고 확신한다”며 “중국 우한에서 발견된 코로나19 바이러스에서 알파, 델타, 오미크론 변종이 나온 것처럼 모든 흑사병 변종이 시작된 균주를 찾아낸 것 같다”고 밝혔다.

구글 지도

미스테리를 푸는 첫 열쇠를 발견한 이는 영국 스털링대학의 역사학자 필립 슬라빈이다. 그는 이식쿨호 근처 천산산맥 한 계곡마을의 고분군을 조사하다 1338~1339년에 만들어진 무덤이 지역에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묘비만 118개를 찾아냈고 그 중 10개는 역병이란 단어가 명확하게 언급됐다. 시리아어로 적힌 “호랑이의 해였다. 신자 산마크(Sanmaq)의 무덤으로 그는 역병으로 죽었다”는 구절이 발견된 묘비가 단적이다.

이 무덤들은 1880~1890년대 발굴돼 유골은 한참 전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진 상태였다. 슬라빈은 발굴일지를 추적해 7구의 유골을 찾아냈다. 이후 크라우제 등 고·중세 DNA 전문가들이 연구진에 합류해 이 유골의 치아에서 DNA를 추출했다. DNA 분석 끝에 3구에서 임파선페스트(선페스트)를 일으키는 페스트균(Y. pestis)을 찾아냈다. 연구진은 이 페스트균은 2011년 영국 런던에서 사망한 환자에서 발견된 페스트균의 직계 조상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또 오늘날의 이식쿨호 일대와 카자흐스탄, 중국 신장 등의 설치류에서 채취된 페스트균과도 친척인 것으로 드러났다.

페스트균이 발견된 마을은 과거 실크로드의 동서무역 중심지로 추정된다. 고분에는 인도양의 진주, 지중해의 산호, 각국의 동전 등 세계 각지의 물건들이 발견됐다. 페스트균은 설치류를 통해 옮겨지며 인간은 쥐벼룩과 같은 매개를 통해서만 감염된다. 연구진은 기상이변 등으로 키르기스스탄 계곡의 설치류가 부쩍 늘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페스트균이 1338~1339년 폭발적 변이를 겪고 치명적 전염병이 됐다고 추정했다. 설치류가 상인들에게 변이를 거친 페스트균을 옮기면서 유럽으로 페스트가 퍼졌을 것이라고 봤다. 유럽 쥐들이 변이 바이러스에 면역이 없어 대거 감염된 것도 치명적인 페스트 확산의 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식쿨 호수 근처에서 발견된 묘비 사진. 십자가 표시와 함께 역병으로 사망했다는 구절이 적혀 있다. 중앙아시아 및 동아시아로도 전파된 기독교의 분파인 네스토리우스교 공동체의 묘비로 보인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의 생물고고학자인 샤론 드윗은 이번 연구가 흑사병이 유럽에서 갑자기 대규모로 발병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다만 페스트균이 1338~1339년 폭발적 변이를 겪었다는 가설을 입증하려면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크라우제는 좀 더 명확한 연구를 위해 중국에서 발견된 페스트 사망자의 유해나 사망패턴 등을 비교 분석하고 싶다고 전했다.

키르기스스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