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공존의 시대 피조물서 창조자로인간을 다시 정의하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20 불완전한 창조자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유한·필멸’의 굴레 극복하려는 근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AI·가상현실…인간을 창조 대상 아닌 ‘창조하는 존재’ 로 만들어
인간 형상 따라 지능·인격·가치의 이해도 없이 만드는 ‘비극’
고유한 가치·새로운 규범에 대한 고민 어느 때보다 절실

이 연재의 마지막 회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고자 한다. 물론 이 질문의 방점은 ‘다시’라는 부사에 있다. 기술과 인간의 공존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 우리는 ‘다시’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 것일까?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인간을 ‘자기-해석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해석을 찾는다. 아무도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으며, 어쩌면 삶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연역적으로 혹은 귀납적으로 찾는 과정일 수 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을 ‘신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 인간의 역사를 ‘실낙원의 과정에서 출발해 이후 이 완전한 형상을 회복하기까지의 과정’으로 해석해왔다. 이 해석 안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본 형상이 되는 신에 대한 앎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그 밖의 다른 여러 해석들이 있었을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이 궁극적인 답에 대한 변주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는 한동안 신에 대한 이해에만 뿌리를 뒀고, 인간을 아는 것은 신이 자신과 인간에 대해 드러낸 계시의 한계 안에서만 가능했다.

르네상스는 이 오래된 뿌리에서 벗어나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시도였다. 중세에 대한 연구들이 쌓여가면서 중세에선 신이 중심이었지만 르네상스에선 중심이 인간으로 옮겨왔다고 단순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에 인간이 신을 참조하지 않고도 인간 스스로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변화를 감지할 수는 있다. 이 시기부터 인간은 신이 남긴 ‘말씀’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 대해 말했던 문학, 역사, 철학, 건축, 예술을 통해서도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시 그런 매체를 통해 후대에 남기려 했다.

이후 근대과학의 태동과 연이은 발전은 인간을 이해하는 뿌리였던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자르는 계기가 됐다. 연재를 시작하는 글에서도 인용했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1978년의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뇌는 진화의 산물이다”라고 선언했고, 종교를 비롯한 모든 “고등 윤리적 가치”는 “인간 유전물질이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복잡한 기법으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진화적 방법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다”고 봤다.

지난 글에서 다룬 것처럼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인간은 단순히 삶이 편리해졌을 뿐 아니라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분석하는 일에 도전하고, 생명의 기원과 연장을 통해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방법을 찾아나서게 됐다. 그러나 그 이면에 우리의 처지는 어떠한가?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결국 대체될 존재라는 극단적 견해 사이에서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영국의 위대한 지성으로 평가받는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2017년 <인간의 본질>에서 인간이 처한 이 빈궁한 상황을 그리며 인간이 하나의 고유한 인격체로서 타인과의 만남과 관계 속에서의 근본적인 도덕성을 회복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약 250년 전, 칸트의 표현대로 “인간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지도 없이 이성적으로 사는 것”을 꿈꿨던 계몽의 시대에,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항구적이며 공고한 기착지였던 ‘신’이라는 거울을 떠나 그 닻을 거둬들이고 자유롭게 이성의 넓은 바다를 향해 항해하기로 결단했을 때, 우리가 이토록 표류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자연주의, 즉 인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해 모든 현상을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보고 기계론적으로만 설명하려는 태도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최악의 지성의 병”이라고 진단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있어서 ‘다시’라는 부사가 중요하다고 말한 까닭은 이렇듯 우리가 우리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에 있어 예상보다 오래 표류해왔기 때문이고, 어쩌면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큰 폭풍을 품은 먹구름이 저 끝에서 몰려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미래사회의 양상에 대해선 제각각 다른 예측을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인간의 본질과 고유함에 대한 고민을 끝내고 다시 고요하게 닻을 내릴 때라고 말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얀 브뤼겔의 ‘오디세우스와 칼립소가 있는 환상적인 동굴’. 오디세우스는 풍요로운 영생을 약속하는 칼립소의 유혹을 뒤로하고 험난한 귀향을 택했다. 위키피디아

얀 브뤼겔의 ‘오디세우스와 칼립소가 있는 환상적인 동굴’. 오디세우스는 풍요로운 영생을 약속하는 칼립소의 유혹을 뒤로하고 험난한 귀향을 택했다. 위키피디아

한 가지, 인간에 대해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긴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갔다는 사실. 인간을 뜻하는 라틴어 ‘호모(homo)’의 어원이 땅과 흙을 뜻하는 ‘후무스(humu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듯이 인간은 결국 유한한 시간을 사는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불사의 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필멸의 굴레에 머무르기를 택하는 존재였다. 트로이아 전쟁 이후 영웅 오뒷세우스(오디세우스)가 이타카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오뒷세이아>에서 호메로스는 인간의 그런 운명을 이렇게 그려낸다.

“제우스의 후손인, 라에르테스의 아들이여,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여, 그대는 정말로 이렇게 지금 당장이라도 사랑하는 고향 땅에 돌아가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 하더라도 부디 잘 가세요. 그러나 만약 그대가 고향 땅에 닿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운명인지 마음속으로 안다면 그대는 날마다 그리는 그대의 아내를 보고 싶은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바로 이곳에 나와 함께 머물러 이 집을 지키며 불사의 몸이 되고 싶어질 거예요….” (중략) 그러자 그녀에게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가 이런 말로 대답했다. “존경스러운 여신이여, (중략)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 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보기를 날마다 원하고 바라오.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다시 포도줏빛 바다 위에서 나를 난파시키시더라도 나는 가슴속에 고통을 참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참을 것이오. 나는 이미 너울과 전쟁터에서 많은 일을 당했고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이오. 그러니 어디 이들 고난들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호메로스 오뒷세이아 5권 203~224행, 천병희 옮김)

풍요로운 영생의 삶을 약속하는 칼립소의 달콤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난들로 점철된 모험과 병약함과 늙음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오뒷세우스는 필멸의 인간이 걸어가야 할 운명을 잘 보여준다.

유한과 필멸의 조건이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전통적인 인간 이해를 대체할 새로운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최근 인문학계에서 활발한 논의를 만들어내는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 연구도 크게 이 맥락 안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인간 이해는 과학기술에 의해 현재의 신체·정신적 한계를 초월하는 방향으로 인간이 발전해가리라는 신념에 근거하기도 하고,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여집합으로만 취급됐던 다른 형태의 존재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을 포함해, 인간과 인공지능에 대해 쏟아져 나오는 많은 글들 속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축소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 디지털 전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느 누구도 초거대 언어 모델이 단순한 확률적 앵무새를 넘어 메타적 지식이나 자기인식(self awareness)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만큼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처럼 인간의 마음을 초거대 언어 모델이 흉내낼 수 없는 “수백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수집해 패턴 매칭을 만들어내는 둔중한 통계 엔진이 아니라 소량의 정보로 작동하는 놀랍도록 효율적이고 우아한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저명한 인공지능 연구자인 아궤라 이 아르카스나 피터 노빅처럼 이미 최신 언어모델이 인공일반지능(AGI)에 도달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기술 공존의 시대 피조물서 창조자로인간을 다시 정의하다

그래서 얼마 전 구글 딥마인드(DeepMind)의 연구진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공일반지능의 정의를 일일이 검토한 뒤, 인공일반지능의 발전 단계를 수행능력과 일반성이라는 두 차원으로 나눠 0단계부터 5단계까지 세분화한 정의를 제안했다(Levels of AGI: Operationalizing Progress on the Path to AGI).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초지능으로 발전했는지를 튜링 테스트보다 더 예리하게 시험해볼 수 있는 기초 작업을 진행한 셈이다.

이 벤치마크 테스트를 통과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계없이 나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공지능을 통해 지능적인 인공의 존재를, 또 가상현실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실험들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창조의 대상이 되는 목적어가 아니라 ‘창조한다’는 동사로 향한다. 과거 꽤 강력한 도구들을 만들었던 경험에 비해 창조의 의미를 더 부여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이 만들고 있는 것들이 인간의 존재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배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창조는 그저 한번 만들어본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무게를 갖는다. 인간은 신이 만들고 호흡을 불어넣었는데도 본래의 창조된 목적대로 살지 않았다. 인간의 이런 피조물로서의 경험은 데미우르고스(플라톤이 말하는 제작자)로서 창조의 경험을 시작하는 지금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기록된 창세기의 기록처럼, ‘창조하는 인간(호모 크레안스)’으로서 우리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닮은 존재, ‘인간-기계’ ‘아바타’ ‘체화된 지능’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가진 신과 달리 우리는 우리의 지능과 인격과 가치에 대한 이해도 없이 우리의 모양대로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 비극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인간이 ‘창조하는 존재가 되기는 했으나 끝내 불완전한 창조자’로 머물 수밖에 없는 근거이며,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새로운 규범에 대한 고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이다.

초지능(슈퍼 인텔리전스)을 꿈꾸며 인공일반지능으로의 도약을 도모하는 여러 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인간 지능의 제약과 한계에 대한 메시지를 발신할 것이다. 인간의 자연지능을 뛰어넘는 것이 인공지능의 숙명적 존재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인공지능의 도전이 거셀수록, 우리가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마음과 지능을 더 깊이 묵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인공지능이 학습을 위해 사용하는 방대한 데이터와 전력과 자원들을 생각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자연지능이 얼마나 우아하게 설계된 시스템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가 인간 지성의 놀라움을 더 깊이 이해할 거대한 실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부족한 글과 고민을 함께 호흡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시리즈 끝>

이은수

[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기술 공존의 시대 피조물서 창조자로인간을 다시 정의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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