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키워드’ 로 되돌아본 을유년

을유년(乙酉年)의 화두(話頭)는 단연 ‘황우석’이다. 봄에 활짝 핀 줄기세포의 ‘꽃’은 겨울에 뿌리마저 얼었다.

닭띠 해는 또 ‘비열한 엿보기’로 먹칠이 됐다. 연예계 X파일에 이은 안기부 X파일 사건은 국민 모두에게 ‘나도 벌거숭이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겼다. ‘기생충 알 김치’와 ‘줄기세포 파동’을 둘러싼 일그러진 애국주의 논쟁 또한 우리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독이 든 성배’를 기꺼이 받아든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전과 자신감 넘치는 노처녀 ‘삼순이’를 보면서 서민들은 웃었다. 희망과 절망이 범벅된 2005년 10대 키워드를 소개한다.

‘10대 키워드’ 로 되돌아본 을유년

# 한국축구 새희망 아트감독 ‘독이 든 성배’

2005년 8월23일 본프레레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물러나자 외신들은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직에 대해 ‘독이 든 성배’라고 표현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4강 신화를 이뤄낸 이후 한국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움베르투 코엘류와 본프레레는 성배 안에 든 독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네덜란드 출신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그러나 독이 든 성배를 기꺼이 마셨다. 그리고 살아 환호했다. 그는 월드컵 이후 해이해진 대표팀 선수들을 질타하며 정신무장을 촉구했다. 그의 지도력으로 대표팀은 이란전 2-0 승리와 스웨덴 2-2 무승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2-0 승리 등 희망적 결과를 거뒀다. 2006년 6월 독일월드컵에서 아드보카트 감독이 독이 든 성배를 모두 비워내고도 건재할지, 아니면 자신도 독이든 성배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10대 키워드’ 로 되돌아본 을유년

# 축복받은 그녀들의 반란 ‘삼순이’

삼순이는 대다수 현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날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날씬해지기 위해 밥을 굶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 목숨마저 마다하지 않는 일부 여성들과 달리 양푼에 밥을 비며 퍼먹고 내숭없이 할 말은 거리낌없이 내뱉는 30세 노처녀였다. 그러나 삼순이는 파티셰(제빵제조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고 주눅들지 않으며 세상을 향해 당당했다. “네가 좋아져 버렸다” “(남자를) 너무 오래 굶었다”는 등 속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 삼순이의 태도에서 ‘보이기 위한 아름다움’에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모처럼 해방감을 느꼈다.

2005년 6월 방영된 ‘내 이름은 김삼순’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삼순이 직업 ‘파티셰’는 인기 직업으로 떠올랐다. 드라마에 나온 삼순이 인형은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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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 웃고 울린 ‘줄기세포’

지난 5월 황우석 서울대 교수가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환자맞춤형 배아줄기세포는 난치병 환자뿐 아니라 한국의 미래를 밝혀줄 ‘횃불’이었다. 황교수는 21세기 생명공학을 이끌 ‘메시아’였다. 하지만 이는 조작된 것으로 귀결됐다. 줄기세포 분야에서 최고 선진국으로 자부하던 한국은 순식간에 세계 과학계의 비웃음을 샀고 국가의 명예도 실추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한국인들의 마음에도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진위논란 과정에서 황교수 지지와 반대 세력으로 나뉘어 국론 분열이 일어났고 한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을유년이 저물어도 줄기세포 파동은 식지 않고 해를 넘겨 달려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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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익에 가린 진실 ‘애국주의’

한국인들에게 ‘애국’이라는 단어는 남다르다. 애국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나라를 사랑함’이지만 역사적으로 숱한 난관을 헤쳐온 한국인에게는 다른 의미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황교수 줄기세포 파동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과도한 맹목적 애국주의를 표출, 우려를 자아냈다. MBC PD수첩의 의혹제기를 ‘매국’ 행위로 몰아갔고, 기업들을 대상으로 MBC에 광고중단 압력을 가했다. 인터넷에는 담당 프로듀서의 가족 사진과 함께 “가족들을 다 죽여라”는 비이성적 폭력 행위가 난무했다. 일부 언론도 ‘국익’이라는 명목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일그러진 애국주의 확산에 동참, 진실을 향한 발걸음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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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가치 일깨운 ‘단식’

단식은 원래 종교에서 비롯됐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을 예수가 40일간 단식하였다는 사실을 기념해 ‘사순절’로 정하고 극기·수양의 목적으로 단식을 한다. 인도에서는 브라만교가 수행법의 하나로 단식을 하고 힌두교도 남에게 선덕을 베푸는 법의 하나로 단식을 한다.

한국에서의 단식은 목숨을 내걸고 자신의 요구를 바라는 수단의 하나다. 올초 지율스님의 100일 단식은 생명의 가치를 다시 되새기게 했다.

정치인들도 앞다퉈 단식에 나섰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쌀 협상안에 반대, 지난 10월27일부터 29일간 단식을 했다. 11월24일 헌법재판소의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 위헌 여부 결정을 앞두고 국민중심당(가칭) 정진석 의원이 10일간, 열린우리당 선병렬, 양승조 의원이 9일간 단식하며 헌재의 합헌 결정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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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의 위기 ‘기생충알 김치’

10월 21일 식약청이 중국산 김치 16개 제품 가운데 9개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된 것으로 발표하며 ‘기생충 알 김치’ 파문이 시작됐다. 이어 일부 국산제품에서도 기생충 알이 검출되면서 김치 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음식점과 김치 제조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았고 국산 김치에 대한 신뢰가 하락했다.

식약청이 뒤늦게 안전하다고 주장했지만 무책임한 행정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생충 알 김치 파동으로 11월 김치 수출액이 월간 기준으로 6년5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중국과도 외교분쟁 직전까지 맞닥뜨렸다. 중국산 김치의 기생충알 검출뿐 아니라 중국산 수입 어류에서 발암의심물질인 말라카이트 그린이 검출돼 중국산 식품 전체에 대한 불신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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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의 두 얼굴 ‘댓글 문화’

‘댓글’은 ‘대답하다, 응수하다’를 뜻하는 영어 단어 ‘리플라이(reply)’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댓글은 블로그와 미니홈피 등과 더불어 인터넷 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힘으로 꼽히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바쁜 국정 와중에 정부 인터넷 사이트에 댓글을 다는 ‘댓글정치’를 펼쳐 눈길을 모았다.

100자 내외의 인터넷 댓글의 묘미는 익명으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솔직함에 있다. 하지만 댓글은 양면성도 존재한다. 익명의 그림자에 기대 여론을 호도하고 논란을 부채질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문화의 성장만큼 이에 걸맞은 예의를 갖추는 일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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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격유착의 치부 ‘X파일’

새해 벽두부터 전국을 강타한 ‘연예계 X파일’은 국내 연예계 톱스타들의 사생활과 미확인 소문들을 노골적으로 담은 채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확산됐다.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 통신에 200명이 넘는 연예인들은 인격·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연예계 X파일은 하반기에 튀어나온 ‘안기부 X파일’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정보기관이 정계·재계·언론계 인사를 무차별적으로 도청해 얻은 정보가 유출되면서 정국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소용돌이쳤다. 정치권·재계·언론계의 검은 고리가 여지없이 드러났고 한국 자본주의와 정치가 정경·관언유착의 시대였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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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전략 새물결 ‘블루오션’

2005년 한국은 ‘블루오션’(푸른 바다) 열풍에 휩싸였다. 블루오션의 핵심은 붉은(red) 피를 흘려야 하는 경쟁시장에서 예전의 업종·고객 개념에 얽매이지 말고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 푸른 바다와 같은 신시장을 개척하자는 개념. 프랑스 유럽경영대학원 인시아드의 한국인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주도해 올 2월 하버드대 출판사에서 출간된 ‘블루오션’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기인한다. 삼성전자와 LG그룹이 블루오션을 경영전략으로 도입할 것을 선언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탐독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전국이 ‘블루오션’ 바람에 휩싸였다. 그러나 무작정 ‘푸른바다에서 보석찾기’식으로 전 사회가 나선 나머지 레드오션에서 허우적대는 전통적 산업 근로자와 소외계층의 목소리가 묻혀버린다는 지적도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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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보다 진한 권력 ‘형제의 난’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콩은 가마솥에서 우는구나/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어찌 이리도 급히 삶아대는가.

중국 삼국시대 조비는 동생을 없애기 위해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압박했다. 동생 조식은 ‘콩대를 태워서…’로 시작하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었다. 형 조비는 시를 듣고 동생의 숨을 거두게 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그러나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두산그룹은 같은 콩대에서 난 콩들이 경영권을 둘러싸고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다툼을 벌였다. 7월말 박용오 전 회장측의 진정서가 검찰에 접수되면서 비자금 사건으로 비화된 두산그룹 형제의 난은 결국 박용오·용성 등 형제 일가는 물론 계열사 전·현직 대표까지 14명이 불구속 기소되는 비극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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