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인데 행복느낌 ‘플루토에서 아침을’

올해 들어 먹은 음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 1000원에 4개인 따끈한 붕어빵. 1인분에 1만원이지만 불고기 한 접시만 얹으면 2만~3만원대로 내놓아도 손색없는 한정식. 외국 출장지에서 친구가 사준, 유명 레스토랑의 요리. 가격이 비쌌다는 것밖에 기억 안남.

그런데 만약 붕어빵처럼 가벼운 스타일에, 한정식처럼 다채로운 종류의 음식이, 유명 주방장의 솜씨로 만들어진다면? 무조건 고(Go)! 오늘 본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Breakfast on Pluto)처럼.

플루토에서 먹는 아침이라니? 제목만으로는 얼핏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상시키지만, 명왕성 혹은 지옥의 신이라는 뜻을 가진 플루토에서 밥을 먹겠다는 이 영화의 주인공 키튼(킬리언 머피)은 티파니 보석상에 나타난 여신 같은 홀리(오드리 헵번)와는 사뭇 다르다. 여성의 성 정체성을 가진 남자, 즉 여장남자로서 1960년대와 70년대의 아일랜드 소도시와 런던을 떠돌아다니며 영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총체적으로 체험하는 존재인데, 그는 무겁거나 진지하지만 않으면 세상의 어떤 시궁창이나 폭력도 괜찮다는 듯이 흐느적거리고 느물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튼의 분위기는 홀리만큼이나 화사하고, 킬리언 머피의 연기는 오드리 헵번만큼이나 매력적이다.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키튼의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기에 웃으면서, 심지어 환상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계속 낄낄거리며 영화를 보다가 결국 가슴이 찡해졌다. 이 영화가 희극인지 비극인지를 나는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영화가 끝나고 나서 행복했다는 것이고, 영화나 세상이나 내 인생이나 한바탕의 시트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절묘한 요리를 내놓은 셰프는 아일랜드 출신의 닐 조던이다. 이 감독의 이름이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계기는 ‘크라잉 게임’(1992)이었다. 아일랜드 반군의 존재와 성 정체성 문제는 당시 한국사회에서 대중화되지 않은 이슈였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이해의 기반이 없었던지라, 영화를 통해 충격과 감동을 넘어서서 교육적인 효과도 단단히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제적으로 ‘플루토에서 아침을’은 ‘크라잉 게임’과 사실상 같거나 약간의 확장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한 동어반복을 넘어설 수 있었던 힘은 스타일과 캐릭터에 있다. 가장 심각한 종류의 사회 문제들이 키치적인 스타일로 버무려지고, 상식을 벗어난 밑바닥 인생이 세상의 누구보다 상식에 입각해있고 따뜻하며, 그리하여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시침 떼는 주인공이 가장 지성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감독은 “괴물 혹은 괴물적인 사람들에 매혹되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에 매료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정상과 이성의 체계에서 배제된 비이성적 존재를 통해 기성 질서를 희롱함으로써 상호이해와 공존을 모색하는 닐 조던이야말로 괴물의 효용가치를 가장 정확하게 통찰하는 사람이라고 보여진다.

이 영화가 던져주는 또 한가지 소회가 있다. 바로 닐 조던 감독의 나이다. 195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58세인데, 그는 여전히 창의적인 현역 감독이다. 물론 다양한 팝 음악을 활용하거나 형식상의 파격을 감행하는 것이 닐 조던의 독창적인 공로라기보다는 90년대에 르네상스를 맞이한 영국영화의 기운을 흡수한 측면이 다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제적 관심사를 동시대의 감수성과 노련하게 융합시켜 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임권택 감독을 제외한 원로와 중견세대가 놀랄 만큼 진공 상태인 한국영화계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김소희|영화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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