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동춘서커스

글 김희연·사진 남호진기자

아찔한 묘기·아슬한 단원들의 삶

84년 역사 뒤로하고 내달 마지막 공연

서커스가 끝났다. 500여개의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드문드문 앉아 있던 7~8명의 관객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들릴까말까한 박수 소리를 뒤로 하고 곡예사들은 다음 공연을 위한 장대를 무대 위에 세운 후 천막 뒤로 하나 둘 사라졌다. 천막에 가려 있던 무대 뒤에는 곡예사들의 또 다른 삶이 숨어 있었다. 외줄에서 아찔한 묘기를 끝내고 땅 위에 발을 내디뎠지만 그들의 삶은 공중보다 더 위태로워 보였다.

굿바이, 동춘서커스

지난 23일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11-1번지 수산시장 옆 공터. 이곳에 동춘서커스 대형 천막이 들어서 있었다. 녹음기의 안내방송은 하루 3회 ‘지상 최대의 서커스’를 쉴 새 없이 자랑하고 있었지만 곧 사라질 서커스단의 처지를 말해주듯 낮 공연 풍경은 쓸쓸했다. 가중되는 경영난 때문에 내달 15일 공연을 끝으로 동춘서커스의 간판을 내릴 예정이다. 지난해까지 90명이던 단원은 현재 45명 정도다. 그나마 중국인 단원이 반을 넘는다. 오늘, 내일 떠나겠다는 사람도 여럿이다.

“이렇게 비참하게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요. 무대 밑 맨땅에 포장 치고 젖물려 키운 아이가 고등학생이에요. 이제 뭘로 키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공중그네 곡예사 김영희씨(46)의 눈이 반짝이 분장과 함께 젖어들었다. 김해가 고향인 그는 일곱살 때 장터에서 본 서커스에 반해 따라나섰다. 벌써 40여년. 동물 조련쇼와 공중그네 타기로 인기를 모았던 그는 서커스 막간에 객석을 돌아다니며 1000원짜리 기념 책받침을 팔았다.

‘더 이상 애처로운 향수는 거부한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면서 기상천외한 묘기로 기쁨과 감동을 준다. 퍼포먼스 동춘….’ 책받침에는 이봉조, 서영춘, 배삼룡, 장항선 등 동춘을 거쳐간 걸출한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등 신파극과 원맨쇼, 곡예 등이 어우러진 동춘서커스는 84년의 역사를 지녔다. 2000년까지 기록된 연혁에는 ‘다른 스타일의 재주를 접목해 세계 무대를 공략하겠다’는 포부도 적혀 있다. 서커스단에서 막일과 중국인 단원 통역을 하는 중국동포 유철씨(29)는 “6개월 전에 좋은 일자리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지금은 월급이 밀려 집사람 볼 낯이 없다”고 푸념했다.

이날도 비록 열 명도 안 되는 관객이 찾아왔지만 지상과 공중을 오고가는 서커스는 계속됐다. 건장한 청년 7명은 공중에서 수평으로 매달리며 중력의 힘을 이겨냈고, 외줄에 사다리를 얹은 한 곡예사는 그 위에 올라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두 가닥 줄에 매달린 남녀 곡예사는 ‘아리랑’ 음악에 맞춰 새처럼 날아올랐다. 오토바이 4대는 거대한 철책 지구본 안에 들어가 굉음을 내며 원을 그렸다. 공중에서 내려온 붉은 천에 몸을 맡긴 앳된 중국인 소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공중에 매달린 채 팔과 다리를 꺾으며 묘기를 부렸다. 안간힘 쓰며 떨리는 소녀의 손끝과 발끝에서 먼 고향 냄새가 났다. 소녀의 희망도 아슬아슬 줄을 타고 있는 듯했다.

낡은 의상은 촌스러웠고 조명과 음향은 싸구려 티가 났다. 하지만 서커스는 거짓 없이 다가왔다. 세종문화회관 VIP석에서 보았던 아트서커스, 마카오의 호화로운 상설극장에서 구경한 ‘태양의 서커스’ 공연은 감탄스러웠지만 이처럼 가슴 저리지는 않았다. 포장하지 않은 맨몸에서 인생을 봤기 때문일까.

막걸리 한 잔 걸치고 공연을 지켜본 윤근친씨(55·서울 신내동)는 “20여년 전 뚝섬에서 정말 재미나게 봤는데 그 맛이 안 난다. 그땐 천막에 들어가질 못해 대기할 정도였다. 재밌는 원숭이쇼, 자전거쇼가 다 빠져 진품 묘기가 없다”고 불평했다. 이제 쇠락한 서커스의 산증인이 된 곡예사 김영희씨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주단 깔린 좋은 극장에서 공중그네 타며 박수치는 구경꾼들을 내려다봤으면…. 부귀영화를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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