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이승복 어린이 사망

최민영 기자

14년간 ‘허구’여부 기나긴 공방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펼치기가 꺼려지는 페이지가 있었다. 이승복의 시신을 찍었다는 흐릿한 흑백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질이 좋지 않아 사람의 형상을 분간해내기가 어려웠지만 어찌됐든 교과서가 거짓말할 리는 없었다. 그것도 평화로운 강원도 평창군의 산골마을에 침입한 북한의 무장간첩이 무참하게 ‘입을 찢어’ 죽인 우리 또래의 9살 어린 아이 사진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머니와 소년의 여동생도 함께 목숨을 잃어서 아버지와 형만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선생님의 무섭고 슬픈 설명까지 들으면서, 나무책걸상에 앉은 초등학생들은 ‘북괴’의 잔학함에 몸서리를 쳤다.

[어제의 오늘]1968년 이승복 어린이 사망

죽어서 반공의 국시를 이룬 소년은 학교에서 공모, 전시하는 반공포스터 대회의 단골소재였다. 사람의 몸에 늑대의 탈을 쓴 인민군이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그림과 함께, 용감한 소년이 외쳤다는 최후의 한 마디가 굵은 고딕체로 곁들여졌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트위터 사용자 @monk_william은 “학교에서 단체관람한 이승복을 주제로 한 반공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간첩이 소년의 입을 찢는 장면인데 (미국의 인종차별을 그린 영화) <미시시피 버닝>에 버금가는 공포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가르치는 비장함을 아이들은 장난끼로 쉽게 비틀곤 했다. 트위터의 @bohe77은 “북한군이 준 ‘콩사탕’이 싫다고 말한 것이 ‘공산당’으로 잘못 전달됐다는 서글픈 농담이 있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산골 소년은 70~80년대 전국 방방곡곡 초등학교에 편재한 동상이 됐다. ‘반공의 아이돌’이자, 아이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동상 괴담’의 주인공이었다. 자정이 되면 살아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반공웅변대회에서 아홉 살 소년이 죽음 직전 느꼈을 공포를 상상하며 고사리손을 번쩍 치켜들던 어린 연사도 학교 괴담 앞에서는 왠지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러다 1992년에는 계간 저널리즘에 이승복의 신화가 ‘허구’라는 기사를 실으면서 최초 보도언론인 ㅈ일보와 14년간 기나긴 진위공방이 시작됐다. 대법원이 2006년 ㅈ일보의 손을 최종적으로 들어줬지만 초등생들에게 공포와 증오 및 세상의 잔인함을 각인하던 반공교육은 사라진 뒤였다. 이승복 어린이에 관한 내용이 1995년부터 실시된 제6차 교육과정에서부터 빠져서 더 이상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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