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몰입 ‘레이디 맥베스’ 비극 딛고 햄릿의 어머니로 변신

문학수 선임기자

오경택 연출 ‘햄릿’ 거트루드역 배우 서주희

어떤 배우는 극중 캐릭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는다. 연극이 끝나는 순간, 일상의 나로 자연스럽게 복귀한다. 말하자면 ‘직업으로서의 배우’라는 정체성에 충실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배우들은 극중 캐릭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까닭에 일상에서 휘청인다. 배우 서주희(47)가 그렇다. 그는 대본을 받아드는 순간부터 극중인물로 변신하면서 헤어스타일과 목소리를 아예 바꾼다. 그뿐만 아니라 내면의 기질까지 극중인물로 탈바꿈하면서 작품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그가 이번에는 <햄릿>(12월4~29일, 명동예술극장)의 ‘거트루드’로 돌아온다. 남편을 죽인 시동생과 결혼하는 햄릿의 어머니다. 원작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동적이고 주변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문학사적으로 유명하지만 실속은 별로 없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무대의 거트루드는 달라질 성싶다. 연출가 오경택은 “원작에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던 거트루드의 이면을 파헤칠 것”이라며 “그래서 배우 서주희가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본격 겨울 추위가 막 시작된 지난 19일, 대학로에서 만난 서주희는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곤두세우는 여인, 모성 때문에 갈등하기보다 오히려 아들과 불화하는 여인”이라고 말했다.

15년 몰입 ‘레이디 맥베스’ 비극 딛고 햄릿의 어머니로 변신

▲ 생활도 극중 배역처럼 ‘올인’
‘맥베스’로 탈진, 정체성 혼란도
두 달 ‘묵언수행’ 끝 출연 결정

첫 질문은 왜 이렇게 ‘센 역할’만 맡느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배우 서주희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강렬하다. 성적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날것 그대로 토해내는 페미니스트(버자이너 모놀로그), 권력을 향한 욕망과 몽유의 진창에서 헤매는 죄의식의 화신(레이디 맥베스), 무대를 한바탕 뒤집어놓는 수다스러운 중년여인(대학살의 신) 등이 그렇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배우 서주희의 표정과 말투는 여린 소녀에 가까웠다.

“제가 데뷔할 때부터 좀 어정쩡했어요. 못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쁘거나 섹시하거나 지적인 외모도 아니고…. 말하자면 어떤 확실한 이미지가 없었어요. ‘애매한 중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죠. 그 어정쩡함을 인물을 극대화하는 노력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극단 생활을 한 적이 없잖아요. 데뷔할 때부터 프리랜서였으니까요.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안 맡으려는 역할이 저한테 오더라고요. (웃음) 뭐랄까… 아주 진을 빼는 역할 같은 것이죠. 20년 넘게 연극을 했지만 출연작 수가 별로 많지 않은 이유이기도 해요.”

특히 한태숙이 연출했던 <레이디 맥베스>는 “대표적으로 진을 뺀” 연극이었다. 서주희는 1998년 초연 이후 올여름까지 15년간 이 연극의 주인공을 연기해왔다. 극중 레이디 맥베스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녀적 저음으로 대사를 친다. 현실의 서주희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사실 그는 50을 바라보는 지금도 앳된 외모에 목소리마저 그렇다. “말도 마세요. 공연 초반에 정동환 선배님과 베드신을 하는데, 아마 관객에게 남녀의 정사로 보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빠 배 위에서 아기가 노는 것 같았을 거라고요.”

하지만 “일상의 나를 잊은 채 몰입”하는 습관이 <레이디 맥베스>에서 자그마치 15년간이나 이어졌으니, 이 배우의 몸과 마음이 온전하기는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서주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5년 넘어가면서부터 <레이디 맥베스>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서 “얼마 전부터는 대체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털어놨다.

“사실 좀 심각했어요. 두세 달 전에는 아예 연극할 마음을 접었죠. 제 안의 에너지가 거의 제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과 전화도 끊고 아무도 안 만났죠. 정말 신뢰하는 친구가 두 명 있는데, 그 친구들이 교대로 찾아와서 끼니를 챙겨줬어요. 간신히 살았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고…”

서주희는 그 두 달간의 칩거를 “묵언수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명동예술극장으로부터 날아온 메시지가 <햄릿> 출연 섭외였다. 두 달간 어떤 메시지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동해서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고 말했다. 햄릿 역을 맡은 대학 선배 정보석은 그가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연출가 오경택의 <갈매기>에서 받은 감동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장 큰 감동과 자극을 안겨줬던 세 편의 무대예술을 꼽았다. 이영란의 물체극 <밀가루는 밀의 가루이다>와 무용가 정영두의 <내려오지 않기>, 그리고 오경택이 연출한 연극 <갈매기>였다.

“연출가 오경택의 스타일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갈매기>를 영상으로 봤죠. 어느 순간, 배우로서의 욕구가 확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연출가라면 함께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었죠. 그런데 이번에 맡은 거트루드도 편안한 역할은 역시 아니에요. 여성과 모성의 갈림길에서 여자로 살기를 택한 인물, 결핍을 끌어안고 사는 보톡스 중독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히스테리의 주인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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