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을사오적이 만든 말 ‘한일합방’

엄민용 기자

대한제국은 융희 4년(1910) 일본과 전문 8조의 조약을 맺으면서 통치권을 일본에 넘겼다. 이때 맺은 조약이 일명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이다. 이 때문에 ‘한일합방’이라는 말은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국정교과서에 쓰였다.

하지만 ‘합방’은 “둘 이상의 나라가 하나로 합쳐짐”을 뜻하는 말로, 우리가 국권을 빼앗겼다는 의미가 없다. 실제로도 ‘한일합방’을 처음 쓴 사람들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으로, 당시 우리 민족을 동등한 위치로 간주하기 싫었던 일본조차 ‘합방’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한일합방’은 이제 교과서는 물론이고 국어사전에서도 사라졌다.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이를 대신하여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과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올라 있다.

그러나 ‘합병’과 ‘병합’ 역시 ‘합방’과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그거다. 따라서 일본이 군인과 경찰로 창덕궁을 포위한 뒤 날조된 문건으로 국권을 강탈한 사건에 ‘합방’ ‘합병’ ‘병합’ 따위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무력에 의한 침탈”의 뜻을 지닌 ‘병탄(倂呑)’을 써야 한다. ‘사람들 입에 익을 대로 익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들어가며 굳이 ‘합병’ 또는 ‘병합’을 사용하려면 ‘강제 한일합병(병합)조약’처럼 그 앞에 ‘강제’란 말을 써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만행이 드러난다.

유년 시절부터 ‘한일합방’이란 말을 하도 들어 습관처럼 이 말을 쓰듯이 ‘일제 36년’이라는 말 또한 마치 관용구처럼 널리 쓰인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배한 세월이 36년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계산이다.

우리가 국권을 잃은 국치일은 1910년 8월29일이다. 바로 112년 전 오늘이다. 이후 치열한 독립운동 끝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은 1945년 8월15일이다. 이 기간을 계산하면 34년11개월17일 만으로, 채 35년이 안 된다. 그럼에도 이 치욕스러운 역사를 34년으로 줄여 쓰지는 못할망정 36년으로 늘려 쓰는 것은 온당치 않다. 반올림을 해도 ‘일제 3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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