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이 ‘성전’이라는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

정원식 기자
타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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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정교회 수장인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76)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개신교·가톨릭과 함께 기독교 3대 분파인 동방정교회의 최대 교파 수장이 푸틴 대통령의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위한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5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키릴 총대주교가 푸틴 대통령의 핵심 우군으로서 푸틴 대통령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했다면서 그가 이끄는 러시아정교회는 국영방송이나 국영기업처럼 러시아 체제의 일부가 됐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정교회 신자가 인구의 63%를 차지하는 러시아에서 키릴 총대주교는 전쟁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그는 러시아정교회 TV 채널과 유튜브 등을 통한 강론에서 전쟁은 서방에 맞서 ‘루스키 미르(러시아 세계)’를 방어하려는 성스러운 투쟁이라고 말해왔다. ‘러시아 세계’는 우크라이나인과 우크라이나 영토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였다는 개념으로,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 이유로 내세운 핵심 논리 중 하나다.

지난 3월 초 민간인 학살로 러시아의 전쟁범죄에 대한 비난이 쇄도할 때도 키릴 총대주교는 독일 나치 정권의 세계 정복 시도를 분쇄한 것은 러시아라면서 “하느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달 모스크바 대성당 예배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측근 빅토르 졸로토프 국가근위대 대장에게 금박으로 장식한 성화를 수여하고 전쟁 승리를 기원했다.

가톨릭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일 이탈리아 언론과 인터뷰에서 키릴 총대주교를 향해 “푸틴의 복사(사제를 돕는 평신도) 노릇을 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지 말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은 키릴 총대주교를 제재 대상에 올리는 것을 검토 중이다. 러시아정교회 내부에서도 사제 273명이 지난 3월1일 비판 성명을 낸 바 있다.

본명이 블라디미르 군댜예프인 키릴 총대주교는 구소련 시절인 1946년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70년 레닌그라드신학대를 졸업한 후 교단에서 대외업무를 맡은 덕분에 여행의 자유가 없었던 냉전 시기에도 해외에 자주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0년간 레닌그라드 신학대 총장을 지낸 그는 2008년 알렉시 2세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2009년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됐다.

1990년대 공개된 구소련 공문서에 따르면 키릴 총대주교는 ‘미하일로프’라는 암호명을 가진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으로도 활동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이름이 직접 언급되진 않지만 1970년대 러시아정교회를 대표해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행사에 참여해 KGB 관계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미하일로프’라는 인물의 이력이 키릴 총대주교가 자서전 등을 통해 밝힌 행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가 KGB 요원이었다는 주장은 2009년 포브스도 제기한 바 있다.

정교회 지도자들과 KGB의 연계를 연구해온 영국 작가 펠릭스 콜리는 “키릴 총대주교가 KGB 요원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련 말기 정교회 지도자들이 비밀경찰과 협력한 것은 일반적이었다고 지적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전임자였던 알렉시 2세 총대주교에 대해서도 KGB를 위해 일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러시아정교회 측은 두 사람의 KGB 연계설을 부인하고 있다.

키릴 총대주교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러시아정교회 내에서 비교적 개혁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그는 1984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서구 신학자들의 책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신학대학교 총장직에서 해임된 바 있다. 2011년 총선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당시에는 정부가 시위대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회동해 가톨릭 수장과 러시아정교회 수장의 첫 회동 기록도 세웠다.

키릴 총대주교가 푸틴 대통령과 밀착하기 시작한 것은 푸틴 대통령이 세 번째 대통령직에 도전한 2014년 무렵이다. 키릴 총대주교는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둔 2012년 2월 당시 총리 신분이던 푸틴과 종교 지도자들의 회동에 참석해 푸틴이 대통령 시절(1999~20008년) 러시아를 1990년대의 경제위기에서 구해냈다면서 “(푸틴의 통치는) 신이 내린 기적”이라고 극찬했다.

러시아 탐사보도 매체 프로엑트는 2020년 10월 키릴 총대주교와 그의 두 사촌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 287만달러(약 3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9년에는 러시아 독립 언론 노바야가제타가 그의 자산이 40억~80억달러(약 5조~10조원)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2009년에는 3만달러짜리 스위스 명품 시계를 찬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돼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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