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연 “등번호 물려준 호성이…어이없고 속상”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

‘홈런왕에서 대학 교수로’ 인생 모법답안 쓰고 있어

“어떻게 매번 홈런을 날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9회말 역전을 노리자.”

야구는 인생에 비유된다. 달랑 공과 방망이 하나로 심장이 멎을 듯한 긴장과 탄성, 희열과 절망,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는 야구. 다른 게임처럼 빠져들어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무차별 난타를 당하면서도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강팀을 만나도 극적인 반전 드라마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야구의 매력이다. 그래서 세계를 ‘야구를 하는 나라와 하지 않는 나라’로 구분하기도 한다.

김봉연 “등번호 물려준 호성이…어이없고 속상”

1982년 암울한 시기에 출범해 기쁨과 감동을 선사했던 한국의 프로야구계가 최근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8구단을 둘러싼 잡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전대미문의 강력 사건의 주인공으로 야구 스타가 등장했다. 현역시절 손가락으로 못을 박을 정도로 힘이 세 괴물선수로 불리던 해태 타이거스 출신 이호성은 그 괴력의 손힘으로 끔찍하게 4모녀를 살인하고 스스로 ‘4번 타자’가 아닌 ‘사자(死者)’가 되었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인 김봉연 교수(56·극동대 사회스포츠학과). 그는 야구를 시작하며 달았던 백넘버를 이호성에게 물려준 한국 프로야구의 맏형이다. 그리고 그는 야구판을 떠나 성공한 드문 야구인이다. “한국 야구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됐느냐?” “무엇이 이호성을 그 상황으로 몰았는가?” 이 질문에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

- 이호성 선수 사건으로 국민이 놀랐지만 김교수의 충격은 더욱 클 것 같습니다.

“호성이는 연세대와 해태타이거즈 후배일 뿐 아니라 제가 야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달았던 등판 번호 27번을 물려줬을 만큼 아끼는 사이였습니다. 형·동생이 변호사·의사로 집안이나 야구 실력도 좋고 리더십과 카리스마도 있어서 선후배 사이를 잘 이어줬어요. 두 손가락으로 남들과 팔씨름을 해도 이길 만큼 힘이 좋고 뚝심있는 야구를 했죠. 섬세한 면은 부족했죠. 야구만 계속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너무 어이없고 속상해서 빈소에도 안갔습니다.”

- 프로야구 선수 출신의 90%가 감독이나 코치 등 야구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분야에선 대부분 실패했더군요. 야구에선 승부 근성이 투철한 이들이 사업엔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요.

“사회나 인생에 대한 준비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운동선수의 최대 약점이 단순하다는 겁니다. 그저 운동연습과 시합에만 신경을 쓰니 귀가 엷어 남의 말을 잘 들어요. 또 좋게 말하면 잔정에 약하고 나쁘게 표현하면 ‘거지 근성’이 있어서 누가 조금만 잘해주면 금방 넘어갑니다. 팬이라며 접근해 술 사주고 접대하고 얼마 뒤에 ‘조금만 투자하면 대박난다’거나 ‘그 명성으로 사업을 키우자’면 쉽게 전재산 넘겨주고 자기 이름 팔도록 하다가 망하는 겁니다. 운동선수들은 30대 중반쯤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사는데 그동안 운동만 했지 사회성을 기를 기회도 없고 자신에게 투자를 하지 않았으니 사고력이 유연하지 않아 다른 분야에선 성공하기 어렵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도 광주에서 주변 사람들 말에 혹해 투자를 했다가 두번이나 사기를 당했어요. 다행히 아내의 격려와 위로로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났습니다. 연말에는 해태타이거즈 출신 선수들이 모이는데 그나마 밥술이라도 먹는 사람들만 나오지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연락도 없어요. 왕년의 스타라는 자존심에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거죠.”

- 프로 선수들이 받는 억대 연봉을 다 어디다 씁니까? 저축도 하고 노후 보장도 해둘 것 같은데요.

“제가 82년에 받은 340만원이란 연봉은 당시 아파트 한채 값이었는데 그게 선수들의 연봉 협상 기준이 될 정도였고 CF도 찍어 목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체력 유지비며 친지들 챙기는 데 은근히 돈이 많이 들어가요. 저의 경우 고기 한번 먹으면 11인분 정도 먹는데 한창 때는 뱀탕이며 곰쓸개 등을 구해먹고 4명의 동생들 공부시키고 여동생 시집보내느라 돈을 모으지 못했죠.”

- 이호성 사건이 개인 문제보다는 스포츠계의 폭력적 환경영향이 크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학업이나 인성교육은 받지 못한 채 운동기계로 길러진 데다 항상 폭력과 돈으로 다스려져 인간성이 파괴된 ‘괴물’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지도자들 탓이 큽니다. 선수들을 폭력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또 똑똑하게 키우면 자기 자리를 차지할까봐 은근히 겁나서 공부를 안 시켜요. 정보차단하고 세뇌해 인민을 충성하게 만드는 김일성·김정일식 수법으로 선수들을 다루기 쉬운 ‘운동쟁이’로 만들지요. 선수들이 공부를 하면 합리적 주장이나 항의도 할 테니 통제도 어렵고 경기 승패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걱정에 무조건 때려잡는 겁니다. 그리고 운동부 선수들이 학교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엘리트 스포츠가 화두인데 우리도 제발 올림픽이며 국제경기에서 메달 몇 개 덜 따도 좋으니 학생 선수들에게 공부할 권리를 줘야 합니다. 그래서 풍부한 사고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사회에 대한 적응과 준비를 하게 해야 해요. 제가 태릉선수촌에 들어갔을 때 영어교육이랍시고 ‘I am a boy’를 가르치고 매너 시간에 ‘양손으로 먹어서 양식, 한손으로 먹어서 한식’ 등의 유치한 말을 하기에 화가 났습니다. 진정한 엘리트 스포츠가 정착되려면 감독만 아니라 선수들을 육성하는 정부의 시각과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프로 선수 생활 중에 석사학위도 땄고 대학교수가 됐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습니까.

“영어선생님인 큰형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선생님을 꿈꿨는데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출세한 거죠. 저는 항상 운동보다 공부가 우선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형이 공부하는 중학 1학년 영어교과서를 외우기 시작했어요. 전주 명문인 전주북중에 들어가선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해서 삼위일체란 참고서를 달달 외웠습니다. 군산상고에 진학해서도 수업시간에 충실했고 수학은 별로였지만 영어시험은 항상 90점 이상이었죠. 연대에서도 선생님이 되려고 교직과목을 이수했고 교생실습도 했죠. 제가 연대 다닐 때 머리도 안 감고 촌스러운 차림새라 별명이 촌놈이었는데 연습 후 도서관에 가면 다들 수군거렸습니다. 당시 이우주 총장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더 공부해서 학교에 남으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제가 해태에 있으면서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하던 날 단 하루 결근했습니다.”

- 주변에서 불편해 하지 않았습니까.

“김응용 감독은 ‘감독할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공부해?’라고 하셨지만 허락해주었죠. 후배들도 저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생활의 반이 원정게임이고 야간경기가 많아서 활용할 시간이 많습니다. 저는 지방 가는 차 안에서도 영어 테이프를 듣고 호텔에 짐 풀자마자 AFKN을 틀어놓고 따라 중얼거리니까 같은 방을 쓰는 후배들은 잠을 자거나 수다도 못떠니 답답할 수밖에요. 영어 공부하다 지루해지면 일어 공부를 했어요. 지금도 매일 영어단어 50개씩 외우는 게 습관처럼 되었지만 영어 원서는 세번쯤 읽어야 제대로 이해됩니다. 이승엽 선수도 대학교수가 꿈이라기에 야간대학이라도 다니라고 했어요. 야구연습하는 시간의 10분의 1만 공부에 할애하면 은퇴 후 안정된 생활이 보장됩니다.”

- 프로야구 선수 중 최초의 전임교수여서 책임감이 클 것 같은데요.

“2000년에 해태가 부도나고, 감독 준비 중에 구단주가 바뀌어 감독의 꿈도 좌절됐습니다. 갑자기 인생이 막막해졌죠. 마침 신생 대학인 극동대 겸임교수로 발령받았는데 개강하는 3월까지 3개월간 두문불출하고 틀어박혀 전공서적을 다 외우면서 수업준비를 했어요. 첫 수업이 3월2일 오후 1시30분이었는데 긴장되고 초조해서 점심밥이 안 넘어가요. 5분 전에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학생이 한 명도 없어 혹시 수업시간이 바뀌었나 알아보니 조금 기다리면 하나둘 올거라고 하더군요.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칠판에 한문으로 제 이름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한글로 ‘홈런왕 김봉연’이라고 썼는데 학생들 반응이 썰렁해요. 답답해서 ‘내가 왕년에 이승엽 같은 사람’이라니까 코웃음을 치더군요. 나를 몰라준다는 것에 실망하고 더 긴장되어서 예전에 제가 대학 때 배운 것처럼 한문이랑 영어랑 섞어서 칠판에 적으니 학생들이 ‘교수님, 한글로 쉽게 수업하세요’라고 난리고…. 한 2주일쯤 지나니까 학생들이 ‘우리 엄마가 팬이었대요’ ‘아빠가 한번 만나고 싶대요’라고 친근해지고, 재미있게 강의한다고 소문 나서 다음 학기부터는 수강학생들이 넘쳤습니다. 덕분에 전임교수를 거쳐 부교수에 이르렀고 6년 동안 홍보실장, 학생처장 등의 보직을 맡아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김봉연 “등번호 물려준 호성이…어이없고 속상”

- 야구를 시작한 계기가 “자장면을 먹고 싶어서”였다면서요.

“셋째인 봉구형이 같은 전주 중앙초등학교 야구선수였어요. 야구연습하는 형을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왔는데 어느날, 아무리 기다려도 형이 안 나와서 교무실에 가봤더니 야구부 형들이 자장면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본 순간, 제 인생이 결정된 겁니다. ‘야구부에 들어가면 매일 자장면을 먹는구나’란 단순한 생각에 다음날 야구부 연습장에 가서 저도 괜히 공을 던지며 놀았죠. 선생님이 저를 테스트해보더니 바로 며칠 후 시합에 내보내셨어요. 전 그날 이후 한번도 후보였던 적이 없습니다. 자장면은 매일 먹는 게 아니라 시합 끝나는 날만 먹을 수 있었지만 자장면의 맛이 야구 인생을 걷게 한 셈이죠.”

-원년 홈런왕, 3관왕인 MVP란 기록 외에 투혼과 승부근성을 보였습니다. 특히 자동차 사고로 314 바늘이나 꿰매는 대형 사고를 당하고도 27일 만에 출장해 해태 우승신화의 주춧돌을 놓았던 게 기억납니다.

“제가 만 서른살 넘은 나이에 프로야구를 시작할 땐 그저 2년 정도 뛰다 그만둬야지란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진정한 프로는 절대 환경이나 남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시합 중 발목이 부러져 깁스를 하고 벤치에 앉아 있던 82년, 백인천 선수의 집요한 추격에 마음이 급해져 타격 차례를 기다리던 후배 김우근을 불러 ‘네 대신 내가 나간다’며 깁스 풀고 붕대를 질끈 묶은 다음에 타석에 나섰죠. 걸어나가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홈런을 날려 한쪽 발을 질질 끌며 그라운드 돌아나와 22개의 홈런 기록으로 원년 홈런왕이 되었습니다. 결과야 좋았지만 어찌보면 선배의 횡포죠. 다음 해엔 친구 부부와 여행갔다가 자동차가 전복되어 300바늘 이상 꿰매는 수술을 하는 대형 사고가 났죠. 나흘 만에 깨어나서 병실에 있는 아내를 보고 한 첫말이 ‘지금 뭐해? 시합가게 유니폼 챙겨’였어요. 다행히 회복이 빨라 고기 먹고 병원에서 스윙 연습도 했죠. 퇴원하자마자 경기를 보러 갔는데 아나운서가 저 왔다고 방송을 해서 3만 관중이 환호하기에 일어나서 답례했다가 ‘네가 DJ(김대중 전 대통령)냐?’는 빈축도 받았습니다. 그해 MVP로 선정되어 포니2자동차를 받았죠.”

- 다 치고 싶지만 못 치는 게 홈런입니다. 홈런왕의 비결이 뭡니까.

“야구는 두뇌 플레이와 마음 가짐이 중요합니다. 언젠가 호성이가 ‘선배처럼 야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기에 ‘나처럼 하지 말고 네 스타일대로 하라’고 했어요. 자기를 알고 자기 스타일을 살려야 어떤 상황에서도 안 흔들리죠. 83년에 MVP가 된 후 잘난 척하며 인터뷰마다 ‘내년엔 다시 홈런왕이 될 거다’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웬걸, 계속 죽을 쒔어요. 홈런 욕심을 내니까 안됩디다. 그때 깨달은 게 ‘공심타법’, 즉 마음을 비우는 타법입니다. 홈런에 연연해하지 말고 안타라도 자주 치자라고 생각하니 홈런을 치게 되더군요. 제가 학생 시절부터 야구 일기를 썼습니다. 일본에 시합하러 갔을 때 방송에서 왕정치 선수가 매일 언제 일어나서 언제 자고 스윙 연습을 몇 번했고 느낌이 어땠다 등의 일지를 쓴다는 걸 보고 따라했죠.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그걸 보면 제 약점과 장점도 알게 되고 다시 의지가 솓아나요. 한방을 쓰던 호성이에게 그걸 보여줬더니 시큰둥해하더군요. 홈런이 언제 터질지는 몰라도, 절대 준비하지 않은 선수들은 칠 수 없습니다. 야구나 인생 모두 성공은 준비한 이들에게 오거든요.”

- 학창 시절 농구, 육상, 마라톤, 배구 등 여러 운동을 섭렵하고, 요즘은 프로 골퍼이자 골프 해설가로도 활약 중입니다. 모든 운동 중에서도 야구가 최고라고 말하는데, 야구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리는 야구가 우리 인생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타자 한사람이 방망이 하나로 만들어내는 일인극이라 개인의 역량이 중요하지만 팀의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경기이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홈런이 터졌을 때, 그 홈런이 만들어내는 정적 속의 희열과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죠. 야구가 9회말이 될 때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듯 인생도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스타 선수들이라도 언젠가 은퇴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다음에 멋진 삶이 기다리고 인생의 진정한 홈런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이제 매일 승부에 피 마르는 야구보다는 대학교수 생활이 더 좋지 않나요?

“야구를 안하니까 김응용 감독에게 야단맞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서 좋습니다.(웃음) 하지만 운동선수가 제대로 가르치겠느냐는 비웃음을 안 사려고 남보다 몇 배 노력합니다.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프로야구팀 감독을 꼭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이젠 유니폼보다 양복과 넥타이가 더 어울리고, 승률보다 입학 정원이 관심사인 대학교수 김봉연. 그래도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은 여전히 원년 홈런왕 김봉연의 그 홈런의 매력을 잊지 못한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가던 하얀공을 따라 “큽니다. 큽니다. 넘어 가느냐, 넘어가느냐….” 캐스터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다 넘어갔을 때 모두 함께 숨이 멎던 순간들. 야구장을 함성과 눈물과 축제로 만들었던 그. 야구평론가 김은식씨는 김봉연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풀어놓았다. “홈런왕 김봉연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한다. 그는 그저 힘이 좋았던 선수도, 타격 기술이 좋았던 선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방향을 틀어 자신의 기대를 배신할지 알 수 없는 교묘한 변화구 한 개에도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과 힘을 집중했던 사람임을 새긴다. 생각지 못한 삶의 배신에 우스꽝스럽게 무너지더라도 세게 한 번 부딪혀 보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김봉연이 상대했던 김일융과 김시진의 변화구보다 훨씬 교묘하고 능청맞은 세상에 백번 속아 아흔아홉번 헛스윙을 하더라도 언젠가 터뜨리고 말 홈런 한 방을 위해서 말이다.”

▶김봉연은 누구인가…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야구왕국 해태 맏형

김봉연 “등번호 물려준 호성이…어이없고 속상”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이자 야구팬들의 가슴에 홈런의 매력을 가장 강렬하게 새겨놓은 주인공이 김봉연 선수다. 전주에서 태어나 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군산상고 시절엔 고교야구 사상 최고의 시합으로 평가받는 1972년 우승으로 ‘역전의 명수’란 신화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연세대학교 1학년 때 대학 야구 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을, 같은 해 고려대와의 정기전에서 노히트노런의 기록을 남겼다.

실업팀 한국화장품을 거쳐 서른살이 된 82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도루왕 김일권, 타점왕 김성한, 그리고 홈런왕 김봉연 등 KKK로 불리는 해태 선수들은 프로야구의 재미와 즐거움을 선물하며 해태왕조의 신화를 창조했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선배 백인천 선수와 신인 이만수의 도전속에서도 그는 83년 22개, 86년 21개의 홈런을 날려 두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언제나 온힘을 모아 강하게 방망이를 휘두르다 수시로 헬멧이 벗겨져 ‘탈모왕’이란 별명도 얻었다.

88년 은퇴한 후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하다 일본 유학을 떠났다. 선수생활 틈틈이 공부해 원광대에서 스포츠생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박사과정을 밟는 한편, 2001년부터 교수로 변신했다. 극동대학 사회체육과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홍보실장에 이어 올해는 기숙사 관장을 맡았다.

프로골프 선수 자격증을 획득한 후 골프 해설가로도 맹활약 중이며 스포츠 마케팅으로 곧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스스로 “우아한 김우열의 홈런 스타일과 달리 지저분한 폼의 홈런을 날렸다”고 하지만 주변에선 “내가 본 가장 깔끔하고 화끈한 신사”라는 말이 들린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