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세대·계층…한국사회 편견이 녹아내린다

김다슬기자

“5·18광주 이제 알 것 같다” 전국민 화합 목소리

철부지 10대, 소비지향 20~30대 선입견도 깨져

‘쇠고기 고시 무효’ 헌법소원 접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최병모 변호사(가운데)가 5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에 대한 일부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시민 10만여명이 참여한 국민소송(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하고 있다. 서성일기자

‘쇠고기 고시 무효’ 헌법소원 접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최병모 변호사(가운데)가 5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에 대한 일부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시민 10만여명이 참여한 국민소송(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하고 있다. 서성일기자

촛불이 한국 사회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남녀노소와 계층을 불문하고 하나의 광장에 모인 촛불들이 편견을 없애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수십년 망국적 갈등요소였던 지역감정과 세대·계층 갈등, 집회·시위에 대한 사시(斜視)도 촛불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지역감정 해빙 조짐=지난달 31일 밤부터 1일 새벽 사이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발사하고 경찰특공대를 동원했다. 시민들은 그날을 ‘5·31 항쟁’으로 부른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5·18 민주화 항쟁에 빗댄 ‘작명’이다. 강경 진압에 정면으로 맞선 촛불시위가 민주화의 맥을 잇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한 네티즌은 31일 진압 사진을 5·18 당시 사진과 함께 인터넷에 올렸다. 게시판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글은 찾기 힘들고 화합을 내세우는 글이 박수를 받고 있다. “우리 엄마는 서울에만 쭉 살아서 아무 것도 몰랐고 이젠 우리 세대가 다 짊어지렵니다”(명랑폐인), “이제 서로를 이해하게 됐으니 지역주의는 날려 버립시다”(문리버)라는 글이 대표적이다.

31일 집회에서 만난 조고은씨(21)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자랐다”며 대뜸 80년 광주를 얘기했다. 그는 “5·18을 잘 몰랐고 주변에서 전라도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광주 시민들이 ‘빨갱이’나 ‘폭도’가 아닌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모씨(28)도 “경찰이 시민들에게 이렇게 무자비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80년 5월18일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5·18 항쟁을 직접 겪은 광주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임해용씨(44·회사원)는 경향신문에 전화를 걸어와 “지금까지 이어져온 예전의 아픔을 공감하게 된 것 같다”며 “서로의 편견을 털어버리고 화합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광장에서 만난 강모씨(52)는 “촛불시위를 하다 내가 겪은 5월 광주가 생각나 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전국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 세대·계층의 소통 확대=촛불집회는 10대부터 노인들까지 한 목소리를 내는 보기 드문 이슈다. 10대들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정부와 보수언론이 10대들을 ‘괴담에 속은 철부지들’로 몰아붙였지만 10대들은 오히려 대학생과 어른들을 광장으로 이끌어냈다. 10대들이 주도한 영어몰입교육과 교육자율화에 대한 문제 제기도 광장의 중심이슈로 자리잡았다. 집회에 참여한 이모양(17)은 “우리의 급식이 위험해지는 쇠고기 문제부터 대학입시까지 이명박 정부의 잘못을 계속 주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정치에 무관심한 소비지향 세대로 불리며 ‘된장녀’로 통칭되던 20~30대 ‘명품족 여성’들도 쇠고기 수입 반대에 적극 나서고 있다. 1일 오후 10시30분쯤 서울광장엔 갑자기 젊은 여성 3000여명이 출현했다. 인터넷 카페 ‘소울 드레서’(패션동호회), ‘쌍코’(성형수술정보공유동호회), ‘새틴’(화장품동호회) 등의 회원들이다. 김혜영씨(24)는 “젊은 여성들이 정치나 사회적인 이슈에 전혀 관심이 없고 명품과 화장품만 좋아한다는 기존 시선과 편견은 이번 기회에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운동권’에 대한 시선도 변하고 있다. ‘쇠고기 대오’에는 한총련이나 운동권 단체들도 자연스레 섞이고 있다. 대학 ‘통일·역사 학회’ 등 이른바 운동권 동아리에 학생들의 발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서강대 최모씨(23)는 “쇠고기 집회에 참가해본 학생들이 늘면서 사회과학 탐구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촛불집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연대’와 ‘참여’의 가치를 깨닫는 의식의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며 “지역감정이나 해묵은 편견의 문턱을 넘어 성숙한 시민사회로 가는 출발점에 서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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